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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극우를 택하면 근본주의가 된다. 말인즉 기본에 충실하겠다는 것이지만 종교 일반의 근본인 사랑과 반대로 간다. 종교는 모두 절대 진리를 주장하므로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다원적 사회에서는 평화와 공존을 위한 해법이 필요하다. 그런데 근본주의는 남들도 내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정복욕과 지배주의로 구현되어 갈등과 폭력을 부른다. 그래서 종교적 극우는 정치권력에 협조하여 주도권을 잡는 전략을 종종 채택한다. (본문 중)
권수경(목사, 일원동교회)
극우의 특성
극우나 극좌는 오른쪽 왼쪽처럼 상대적이지만 나름 정해진 특징도 있다. 극우파는 한 마디로 주류의 지배로서, 수와 돈과 권력의 우위를 이용해 내 이익을 꾀하는 태도다. 소수와 약자는 내 지배 대상이며 혹 순응하지 않으면 배제와 혐오를 가한다. 통치를 위해 거짓과 폭력도 동원하지만 내가 다수이니 걱정할 건 없다. 개인보다 전체를 우위에 두는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즘 같은 사상과, 인종주의에 근거한 배타주의 등이 극우파의 구체적 모습이다. 남을 향한 양보나 약자를 위한 배려가 생략되므로 극우는 대개 비인간적 집단 이기주의가 된다.
종교가 극우를 택하면 근본주의가 된다. 말인즉 기본에 충실하겠다는 것이지만 종교 일반의 근본인 사랑과 반대로 간다. 종교는 모두 절대 진리를 주장하므로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다원적 사회에서는 평화와 공존을 위한 해법이 필요하다. 그런데 근본주의는 남들도 내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정복욕과 지배주의로 구현되어 갈등과 폭력을 부른다. 그래서 종교적 극우는 정치권력에 협조하여 주도권을 잡는 전략을 종종 채택한다. 정치꾼들도 종교적 색채를 슬쩍 발라 근본주의자들을 현혹한다. 권력과 종교가 결탁해 탐욕의 키로 다수를 조종하는데, 사랑의 이름으로 혐오와 폭력을 실천하는 모순이 바로 근본주의다.
보수를 우파라 부른다면 극우는 보수파의 극단적 형태다. 하지만 인류 보편의 가치를 존중하며 안정을 추구하는 참 보수와 달리, 극우가 지키려는 것은 앙시앵레짐(옛 체제-편집자) 같은 강자의 기득권이며 인간의 이기적 탐욕이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는 보수적 태도를 보이므로 자신들이 전통 가치관의 옹호자라고 속거나 위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인격적인 다수가 극우의 논리에 속아 뜻하지 않게 이익 추구 집단으로 전락한다. 극우가 그렇게 순진한 보수의 뒷배 노릇을 자처해 건전 보수를 몰락시킨 일이 역사에는 흔하다.
극우의 등장
유럽과 미국에서 극우파가 약진하고 있다. 백인, 남성, 기독교인이 주류다. 유럽에서는 무슬림 이민자에 대한 반감이 중심이다. 국제적인 정치, 경제 문제로 수천만 무슬림이 유럽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값싼 노동력은 반가워도 이들을 위한 복지 재정은 아깝다. 무엇보다 이들은 주류 기독교 사회에 동화되지 않는다. 미국은 다수의 유럽인이 아시아계 원주민을 소수로 만들고 세운 나라로서 이백 년 이상 이어진 노예제도를 통해 수백만 명의 흑인도 불러들였다. 다양성 가운데 공존과 연합을 추구해 왔는데 최근 소수자 배려에 대한 다수의 불평 때문에 주춤하고 있다.
소수자를 무시하는 태도는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주류가 힘을 쓰던 근대가 저물면서 여성, 가난한 자, 장애인, 소수민족 등을 배려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중심 무대를 차지한 성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특권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약자에 대한 배려 자체를 거부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극우는 이를 틈 타 보수 윤리를 내세우며 다수의 이익을 부추겼고, 타인종, 타종교, 타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혐오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 결과 세상은 배려, 양보, 이해, 존중 등 아름다운 가치들을 외면한 채 동물의 왕국 같은 약육강식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다.
극우의 기초는 죄로 부패한 인간성이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탐욕의 뚜껑을 여는 일은 쉬우나 한 번 달아난 것들을 다시 담기란 극도로 어렵다. 터진 봇물을 막고 둑을 다시 쌓는 일에 비길 만하다. 극우의 약진은 그만큼 많은 건전 보수가 달콤한 유혹에 넘어갔다는 뜻이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계몽과 경고가 있어야 하고 제도적 장치도 함께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좋은 본을 보이는 희생자들도 필요하다. 인간 본성을 거슬러야 하니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다.
한국의 극우
한국에서도 극우가 세력을 얻고 있다. 한국의 극우는 두 가지 점에서 독특하다. 우선 자민족 중심주의 대신 외세 선호 경향을 보인다. 특이한 역사 때문이다. 외세의 도움으로 광복을 얻었고 이후에도 경제 개발, 국가 안보 등에서 큰 혜택을 입었다. 그런데 뿌리는 더 깊다. 일제에 부역하여 돈과 권력을 획득한 이들이 오늘까지 그것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 오점을 청산하지 못해 더러운 돈과 권력이 연이은 독재와 결탁해 왔고, 오늘까지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일본이 좋고 미국이 사랑스럽다. 그런데 중국인은 극도로 혐오하니 극우가 맞긴 맞다.
또 하나의 특징은 교회가 극우의 선봉에 서 있다는 점이다. 근대사에 도움을 준 나라가 기독교가 주도하는 국가였고, 광복 이후 교회가 상대적인 특혜도 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극우 집회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펄럭거린다. 이스라엘 국기도 간간이 보이니 신학적 오류도 한몫했다. 여기에도 숨겨진 뿌리가 있다. 권력과의 유착이다. 독재자가 등장할 때마다 유명 목사들이 앞다투어 축복해 주었다. 권력층이 불의한 이익을 추구할 때, 목사들도 동조하여 떡고물을 많이 얻어먹었다. 선동된 교인들은 자신도 모른 채 극우 사상의 돌격대 노릇을 해왔다.
한국의 극우는 근본주의에 사로잡힌 교회가 특정 정파와 결탁하여 세속 정치를 주도하려는 형국으로 나타난다. 이념이 십자가를 앞섰으니 새로운 우상이다. 성령으로 하나 되는 교회보다 같은 이념을 가진 비그리스도인, 심지어 이단마저 오히려 동지로 여긴다. 그들과 조직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결합하고, 동조하지 않는 이들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도 극단적 용어로 악마화하는 전형적인 극우의 모습을 보인다. 현실 정치를 두고 체제 전쟁이라며 격렬하게 저항하는데,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오간 데 없이 정복과 지배 등 세상 원리를 추구한다.
우상숭배의 연속
한국 교회의 극우화는 오랜 우상숭배 역사의 연장이다. 일제 강점기에 현실 도피적 내세 신앙에 치중하던 교회는 광복 후 성찰 없는 이념 분쟁에 휘말렸다. 이후 독재 정권들의 부당한 권력에 쉽게 고개 숙이고, 적당한 도피주의와 뒤섞어 인권과 자유 등 보편 가치를 외면해 왔다. 국가가 경제 발전을 경험하던 시기에는, 돈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잃고 기꺼이 탐욕의 노예가 되었다. 공의와 사랑의 본이 되어야 할 교회가 앞장서 맘몬에게 절하며 온 나라를 탐욕과 경쟁과 다툼의 소굴로 만들었다.
한국 교회는 돈과 권력을 사랑한다. 성경의 경고를 무시한 채 오랜 세월 가진 자 편을 들어왔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 주 5일 근무제, 사학법, 목회자 납세 등 이슈가 있을 때마다 교회는 부자들의 논리를 대변했다. 소위 대형 교회가 돈을 앞세워 전체 교회를 쥐락펴락해 온 역사다. 돈과 권력 아래 교회의 윤리적 부패는 극에 다다랐다. 개 교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돈의 힘으로 움직이는 교회, 부자들이 큰손 역할을 하는 교회는 공의도 말하지 않고 자비도 언급하지 못한다.
그런 흐름의 연속으로 이제 극우 이데올로기를 부르짖는다.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하고 약자 배려에 비중을 두는 정책을 빨갱이 사상이라며 비난한다. 혹 세상이 그런 비난을 제기할 때 잘 설득해야 할 교회가 거꾸로 비난의 주역이 되었으니, 더불어 사는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어찌 안다 하겠으며, 죄가 만든 모든 장벽을 십자가로 허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찌 주님이라 부르겠는가. 특정 이념에 사로잡힌 극우 한국 교회는 인권, 자유, 평등, 자비 등 하나님이 인류 보편에게 주신 가치를 외면하고 기득권, 지배, 주도 등에 집착하고 있다.
은혜를 바라며
극우파는 인류 역사에서 부침을 거듭해 왔다. 탐욕이 집결되면 살아나다가도 다수가 각성하면 숨을 죽이곤 했다. 죄로 부패한 인간 가운데 하나님이 양심과 자비심을 주셨고, 그런 일반 은혜가 있어 인류는 지금껏 생존해 왔다. 그런데 그런 은혜에 더하여 십자가 구원이라는 특별 은혜까지 알고 고백하는 교회가, 악을 누르고 선을 펴는 대신 극우와 손잡고 인간의 썩은 본성을 부추기다니 말이 되는가. 자연보다 못한 수준으로 떨어져 버린 계시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모독을 받고 있다.
세상은 역사를 반복하지만, 교회는 영원한 진리를 가졌다. 그런 교회가 세상에 휘말린다면 망하는 길밖에 없다. 다시 십자가를 붙들어야 산다. 이념 귀신을 얼른 내쫓고, 정치 놀음을 당장 중단하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 하셨으니, 다시금 주께 간절히 매달려 본다. 교회가 스스로 재를 뒤집어쓰지 않는다면, 기대할 것은 쓰라린 채찍뿐이다. 그것도 주께서 아직 촛대를 옮기시지 않았을 경우 가져볼 마지막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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