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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들의 감상도, 평론가들의 평가도 이 두 질문 사이에 서 있다. 일부는 “너무나 감동이었고, 힐링이었던 인생 드라마”로 이야기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일부는 “지나친 가족주의가 불편한 드라마”였다고 말한다. 애순과 관식에 대한 의견도 “나에게도 있었으면 하는 최고의 부모”라는 평과 “희생만이 강조된 과장된 판타지”라는 평으로 나뉜다. (본문 중)
이민형(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 교수)
리뷰 의뢰가 오리라 예상은 했다. 하지만, 가능하면 늦게 왔으면 했다. 드라마의 여운이 어느 정도 가신 다음에야 온전한 리뷰가 가능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품의 마지막 화를 보고 난 후 며칠은 먹먹한 감정이 마음에 남았다. 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매 화를 볼 때마다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서인지, 뇌가 빨리 정리를 해버린 느낌이었다. 주변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드라마를 소화하기가 힘들었다는 사람부터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사람까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가족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 드라마 한 편임에도 그토록 많은 사람이 <폭싹 속았수다>를 보기 위해선 상당한 체력과 감정이 필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왜 우리는 그토록 이 드라마를 보면서 폭싹 속아야 했을까?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 해녀 광례의 딸 애순이 관식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서 딸 금명과 아들 은명, 동명을 낳아 키우는 과정을 교차 편집하며, 한 가족의 인생사를 그린 작품이다. 제주의 작은 마을과 90년대 이후의 서울을 배경으로 어렵게 시절을 버티는 이들 가족과 주변 인물들은 때로는 툭탁거리며 서로를 원망하기도 하지만, 결국 가족과 이웃이라는 연결고리 속에서 사랑과 헌신으로 삶을 채워 나간다. 특히 새침한 문학소녀 애순이 억척스러운 엄마가 되고, 무쇠 같던 시골 청년 관식이 무르디 무른 아빠가 되는 과정은 이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식을 위해 삶을 바치는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도록 모든 것 다 바쳐서 지원하고, 못할 것 같으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느라 애순과 관식은 제 자식들이 다 자란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고, 노인이 되도록 “폭싹 속은” 삶을 산다.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그네들의 삶이 고맙고도 애처로워 눈물을 흘리다가도, 지나치리만큼 희생적인 그들의 사랑 이야기에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폭싹 속았수다>를 보고 난 우리의 마음은 “저게 (가족의) 사랑이지”와 “저게 (가족의) 사랑인가?”의 사이에서 방황하다 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시달린다. 시청자들의 감상도, 평론가들의 평가도 이 두 질문 사이에 서 있다. 일부는 “너무나 감동이었고, 힐링이었던 인생 드라마”로 이야기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일부는 “지나친 가족주의가 불편한 드라마”였다고 말한다. 애순과 관식에 대한 의견도 “나에게도 있었으면 하는 최고의 부모”라는 평과 “희생만이 강조된 과장된 판타지”라는 평으로 나뉜다. 완성도도 높고, 자극적이지도 않은 휴먼 드라마가 상당히 높은 시청률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극과 극으로 나뉜 반응을 보인 적이 있나 싶을 정도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NETFLIX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양쪽의 의견이 다 납득이 된다. 나 역시도 시청자로서는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평론을 하는 입장에서는 불편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가족의 희생과 사랑은 늘 감사를 넘어선 감동을 선사하는 주제임이 분명하다. <폭싹 속았수다>는 그런 면에서 이 주제를 극대화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배경, 서사, 연기 등―을 고루 갖춘 작품이었고, 그래서 더 사람들에게서 깊은 공감을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희생과 사랑이 강조된 가족의 이야기는 독립된 주체로서의 인간, 사회의 책임과 역할 등을 다루지 못한 채, 세상의 모든 짐을 가족의 몫으로 치환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한국 사회에서 그런 가치가 통용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겠으나, 이제는 그런 가치에서 벗어난 사회가 되었고, 가족의 의미와 구성이 바뀌고 있다. 무엇보다 자생력과 공생력을 갖춘 개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 <폭싹 속았수다>의 서사는 자칫 과거로의 회귀를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다.
개인적인 감상을 하나 더하자면, 애순과 관식의 헌신적인 사랑의 결과가 (겨우?) 금명―다소 이기적이고, 불뚝불뚝 화를 내며, 자존심은 필요 이상으로 세고,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작가조차도 그 시절 그네들의 그런 모습이 옳지만은 않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르고 평생을 살았던 아빠와 하고 싶었던 것을 무기한 뒤로 미룬 채 버텨온 엄마가 “한껏 사랑했다”는 평이 아니라 “매우 수고했다”는 평을 들은 이유도 사랑인 줄 알고 했던 희생이 알고 보니 그저 고생이었다는 의미는 아니냐는 말이다.
물론 지나친 해석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그런 가족”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혹자에게는 못내 아쉬울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당연한 변화일 테다. 다만, 그만큼 “나”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절대적 환대의 공동체가 없는 현실과 그것을 알기에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마음을 주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많이 쓰인다. 굳이 직업병을 핑계로 한마디를 덧붙이자면, “그렇지만 우리에겐 교회가 있다”라고 선뜻 이야기할 수 없는 작금의 상황이 더 안타깝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과 헌신이 없이도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공동체, 그것을 꿈꾸고 이룰 수 있다면, 이제 우리 모두는 조금 덜 폭싹 속아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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