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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보장된 교수직을 포기하고 히틀러의 독재정치에 맞서 싸운 본회퍼의 저항은 잔잔한 마음을 요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영화 속의 본회퍼와 실제 역사 속의 본회퍼가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감독에 의해 해석된 본회퍼와 역사적 본회퍼 사이의 간극이 적지 않을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본문 중)

 

고재길1)

 

지난 3월 중순, 선후배 교수들과 함께 극장을 찾았다. 영화를 보기 전에 후배 교수가 말했다. 오늘 영화 끝난 후의 비평은 본회퍼 전공자인 필자가 맡아야 한다고. 영화 상영 시간은 2시간 20분, 꽤 길었다. 본회퍼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한 영화는 그가 교수형으로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엔딩 장면이 끝났을 때, 필자는 말했다. 영화에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후배 교수는 약간 못마땅한 어투로 말했다. “영화가 참 감동이었는데…. 비평이 좀….” 물론 필자 역시 감동을 받았다. 미래가 보장된 교수직을 포기하고 히틀러의 독재정치에 맞서 싸운 본회퍼의 저항은 잔잔한 마음을 요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영화 속의 본회퍼와 실제 역사 속의 본회퍼가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감독에 의해 해석된 본회퍼와 역사적 본회퍼 사이의 간극이 적지 않을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에서 역사적 사실과 다른 중요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영화 속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에 필요한 폭탄을 구하러 영국으로 가는 일에 자원한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 일을 수행한 사람은 독일 군정보부 소속의 다른 동료였다. 본회퍼의 주요 임무는 독일 군부 내에 히틀러 암살을 계획하고 있는 선한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일이었다. 본회퍼는 히틀러의 독일제국교회와 맞서 싸우는 독일고백교회의 존재를 서방세계에 알리는 과제를 맡았다. 본회퍼는 이 일을 위해 영국의 벨 주교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교회 지도자들을 만났다. 또한 본회퍼는 전쟁이 끝난 이후, 연합군이 히틀러에게 저항했던 이들의 정통성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어쩌면 영화감독은 말로 저항하는 본회퍼보다는 폭탄을 구하러 가겠다고 자원하는 본회퍼가 영화의 흥미와 역동성을 더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시나리오 작가는 관객들의 맥박이 문서보다는 폭탄 이야기로 더 빨리 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둘째, 영화는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본회퍼를 정치적 저항가로 묘사하는 데 더 집중한다. 본회퍼가 초대 원장으로 사역했던 핑켄발데신학원의 생활은 문제의 장면을 보여 준다. 본회퍼는 신학생들과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고 연주하고 축구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신학원의 공동생활에서 나왔다. 니묄러 목사는 본회퍼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기는 새로운 공격을 시작하고 준비하는 피난처라고…. 그 말은 마치 신학원의 설립 목적이 히틀러와 나치 정권에 저항하는 투사를 준비시키는 것에 있다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신학원은 독일 고백교회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목적을 갖고 있었고, 본회퍼는 새로운 형태의 신학 교육을 시도했다. 그것은 모두 당시의 독일 교회가 소홀하게 여겼던 부분들이다. 그는 값비싼 은혜, 제자도, 원수 사랑, 홀로 있음, 함께 있음, 성경 읽기와 묵상, 기도, 섬김, 성찬, 시편 등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그의 책, 『나를 따르라』와 『신도(성도)의 공동생활』은 모두 그 신학원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본회퍼의 절친 주츠의 편지에 의하면, 신학원의 시기는 “외부의 섬김을 위한 내적인 집중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히틀러를 따르는 독일제국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독일고백교회 중에서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를 가리는 “교회 투쟁”의 시간이었다. 영화는 이 시간을 히틀러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과 정치적인 저항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연출 장면은 다소 지나친 것으로 보인다.

 

영화 <본회퍼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 스틸컷

 

셋째, 암살을 실행에 옮겼던 본회퍼의 동료, 게르스도르프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처럼 행동한다. 암살 시도의 장면과 오버랩이 되어서 다가왔던 대사를 기억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와서 죽으라고 하신다”는 그 말! 산상수훈의 원수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본회퍼의 책, 『나를 따르라』에 나오는 말이다. 이 이야기는 1935년의 핑켄발데신학원 시기에 나왔고, 게르스도르프의 암살 실패는 1943년에 있었다. 예수의 평화주의를 강조했던 신학원 시기의 말씀이 암살 실행의 배경으로 연출된 것이다. 이것 또한 영화상 필요한 감독의 각색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차라리 암살 공모의 배경이 되는 신학적 진술이 나왔다면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본회퍼는 그의 책, 『윤리학』에서 폭력을 처음부터 선택해서는 안 되며, 한계 상황 속에서 “마지막 수단”(ultima ratio)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본회퍼는 행동의 정당성을 “자기 안에서” 찾는 행동은 “이데올로기적인 행동”이며, 행동의 정당성을 “하나님의 손 안”에서 찾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이웃을 위한 책임적인 행동”이라고 덧붙인다.

 

넷째, 이 영화는 미국에서 영화 부문 10위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미국의 트럼프를 추종하는 극우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를 많이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그들의 정치적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본회퍼를 자주 소급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미국의 민주당을 나치당과 일치시킨다. 그들은 미국 민주당에 대한 그들의 저항을 히틀러 독재에 대한 본회퍼의 저항과 다르지 않다고 확신한다.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 이 제목은 미국의 트럼프 지지자로 알려진 저널리스트이며 라디오 방송 진행자인 에릭 메탁사스의 책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본회퍼: 목사, 순교자, 예언자, 스파이』가 그 책이다. 메탁사스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 극우 기독교의 정치적 입장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영화는 본회퍼의 뉴욕 할렘가의 흑인 교회 경험을 많은 시간을 들여서 소개한다. 본회퍼가 할렘가의 예배를 통해서 새로운 체험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본회퍼가 그 교회의 목사로부터 저항을 위한 조언들을 듣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실제와 다르다. 만약, 자기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흑인 공동체와 라틴계 사람들의 마음을 실제로 얻으려고 했던 트럼프의 정치적인 의도를 이 영화에서 엿볼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지나친 생각일까? 미국의 극우 기독교인들과 광화문 광장의 전광훈은 모두 본회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본회퍼를 오용하고 남용하며 악용하고 있다. 그들은 각각 미국 국회의사당을 침입(2021. 1. 6.)했고, 서울 서부지방법원에 난입(2025. 1. 26)했다. 그들의 폭력은 “마지막 수단”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여긴 그들의 행동은 모두 “이데올로기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이웃을 위한 책임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이러한 비평에도 불구하고 본회퍼 영화는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이번 영화는 이전의 본회퍼 영화와는 다르게 본회퍼의 어린 시절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보여 준다. 핑켄발데신학원의 이야기와 미국 뉴욕의 유니언신학교 및 할렘가의 교회 경험도 많이 소개되고 있다. 고백교회의 “교회 투쟁”과 서방 세계의 교회 지도자들과의 만남도 잘 보여 준다. 이 모든 것은 본회퍼의 생애와 신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도 있다. 본회퍼의 마지막 삶의 시기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약혼녀,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서 독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결정하기 전, 본회퍼가 말씀 묵상 중에 결단하고 기도하는 중요한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이번 영화에서는 본회퍼의 윤리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본회퍼의 모습을 넘쳐나는 용기와 강한 결단력을 갖춘 정치적 투쟁가로 그리고 있다. 반면에 신학적 고민과 목회적 갈등의 상황 속에서 저항의 길로 나아갔던 본회퍼의 모습은 거의 보여 주지 않는다. 한 영화 안에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긴 쉽지 않겠지만 아쉬움이 떠나질 않는다. 독일의 본회퍼 학회는 이 영화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는데 그 이유들 중에는 이러한 아쉬움과 감독의 지나친 각색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본회퍼는 옥중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오늘 우리를 위하시는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지금도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시고 이 세상에 오셨고 낮은 자리의 약자들을 위해 행동하셨다.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는 이 땅의 낮은 곳으로 가서 “작은 자들(마 25:45)의 구체적인 필요에 응답해야 한다.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을 더 이상 지배하거나 주도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가 하셨던 것처럼 세상을 돕고 섬겨야 한다. 바로 여기에 본회퍼의 새로운 교회론적인 비전, “타자를 위한 교회”의 모습이 있다. 환대와 구원을 지향하는 “타자를 위한 교회” 안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의 방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영화의 제목을 수정하고 싶다. 본회퍼의 제자이며 친구였던 베트게가 쓴 책의 제목으로 고치면 어떨까? 『본회퍼: 신학자-그리스도인-동시대인』으로 말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본회퍼의 삶과 동행했던 베트게는 확신했다. 본회퍼는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신학자였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살았던 그리스도인이었고, 시대의 아픔과 고난받는 사회적 약자의 현실에 참여했던 동시대인이었다.

 


1) 고재길 교수는 부산대학교(B.A.)와 장로회신학대학교(M.Div., Th.M.)를 나와, 독일 훔볼트대학교(Humboldt Universität)를 졸업(Dr. theol. 본회퍼 사회윤리 전공)했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와 문화 교수로 기독교 윤리학, 본회퍼 신학과 윤리, 기독교와 정치·문화·사회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참고 자료

1. 김현주. “바퀴 그 자체를 저지하라: 본회퍼의 교회와 정부 그리고 구호”. 「기독교사상」 (2024. 6). 112-122.

2. 에브하르트 베트게/김순현 역. 『디트리히 본회퍼: 신학자-그리스도인-동시대인』(서울: 복 있는 사람, 2014).

3. 크리스티아네 티츠/김성호 역. 『디트리히 본회퍼: 저항의 신학자』(서울: 동연, 2022).

4. 고재길. 『한국교회, 본회퍼에게 듣다』(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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