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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와 생물 멸종 위기를 직면하여 헌법 개정에 ‘기후 위기 극복과 생태 보전’에 대한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 마디로 기존의 헌법을 ‘기후생태헌법’으로 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008년, 에콰도르는 세계 최초로 헌법에 ‘자연의 권리’를 명시하여, 자연을 단순히 객체가 아닌 살아있는 주체로 인정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끌었다. 이후로 볼리비아, 파나마 등의 국가들 역시 법률에 자연의 권리를 명시하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하고 있다. (본문 중)

 

김영준(기후위기기독인연대 공동대표)

 

기후생태헌법을 요구하는 목소리

 

헌법(憲法)은 법의 법, 즉 최상의 법이다. 권력은 법률을 통해 국민을 강제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헌법으로 권력을 통제한다. 헌법에는 인간으로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부터, 입법‧행정‧사법 권력 기관에 대한 권한 배분 등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작동 원리가 담겨 있다. 우리나라의 현행 헌법은 40년 가까이 낡은 틀에 머물러 있는데, 계엄과 탄핵 시기를 지나며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여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이와 함께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와 생물 멸종 위기를 직면하여 헌법 개정에 ‘기후 위기 극복과 생태 보전’에 대한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 마디로 기존의 헌법을 ‘기후생태헌법’으로 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008년, 에콰도르는 세계 최초로 헌법에 ‘자연의 권리’를 명시하여,1) 자연을 단순히 객체가 아닌 살아있는 주체로 인정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끌었다. 이후로 볼리비아, 파나마 등의 국가들 역시 법률에 자연의 권리를 명시하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자연의 권리’를 중심 사상으로 삼는 ‘기후생태헌법’이 성서와는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는지, 이 사상이 성서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성서를 생태적 관점에서 살피기

 

성서는 고대의 문서이며 시대적 문화적 제약 속에 있는 인간에 의한 기록이라는 특성 때문에, 인간 중심적 시각이라는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성서 곳곳에는 생태적 사상의 자원들이 보물처럼 묻혀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했던가. 생태계 문제에 관심이 없던 지난 시대에는 보이지 않던 말씀들이 오늘날 점점 그 빛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는 대표적인 몇 가지 본문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의 성전인 창조 세계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 2:15)

 

창세기에는 두 가지 창조 이야기가 나온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첫 번째 창조 이야기(창 1:1-2:4a)는 인간을 창조의 중심으로 보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정복하라’라는 구절은 지난 시대에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을 허용하는 근거로 오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창조 이야기(창 2:4b-25)는 모든 피조물의 연결과 평화로운 관계를 강조한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의 관점에서 첫 번째 창조 이야기를 다시 해석하면, ‘정복하라’라는 명령은 착취나 파괴가 아닌 ‘경작하며 지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학자들은 창세기의 첫 번째 창조 이야기(1:1-2:4a)가 출애굽기의 25-40장의 성막 건축의 이야기와 평행을 이룬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비교에 따르면, 성막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장소로서 축소된 우주이고, 창세기 1장 우주의 창조는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우주적 성전의 건축 사건이 된다. 이런 관점에 비추어 보면, 이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이다. 따라서 인간은 성전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인 창조 세계를 돌보고 유지하는 존재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2) 이 성전의 일부가 되는 동식물과 생태계의 파괴는 곧 성전의 파괴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피조물들을 보실 때 일곱 번이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나타난다. 이것은 피조물의 본래적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한 선언이며, 이 점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작품인 자연을 함부로 착취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인 창조 세계를 경작하고, 돌보고, 유지해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창조 세계에 대한 다스림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인 ‘공평과 정의’의 원리를 반영해야만 하며, 인간의 폭력적 생태계 파괴를 허락하지 않는다.

 

 

(2) 언약의 대상인 인간과 동물

 

이번엔 범위를 조금 좁혀서 동물을 살펴보자. 동물은 어떤 존재일까? 인간과 동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아파르)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페쉬 하야)이 되니라.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아파르)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네페쉬 하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 2:19)

 

위 본문을 보면 인간과 동물은 동일한 재료인 흙(아파르)으로 만들어졌고, 창조된 결과 또한 동일하다(네페쉬 하야). 그런데 같은 히브리어 단어를 번역자들은 사람은 ‘생령’으로, 동물은 ‘생물’로 번역했는데, 여기서 이 번역의 인간 중심성이 드러난다. 창조의 원리 안에서 인간과 동물은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며, 모두가 동등한 ‘살아있는 생명’(네페쉬 하야)이다.

 

또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인간보다 동물을 먼저 창조하셨고, 그들을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으며, 땅에서 번성하라고 복 주시며, 먹거리까지 친히 마련해 주셨다. 게다가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다시는 세상을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언약을 맺으실 때,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들과도 언약을 맺으셨다(창 9:9-17). 하나님께 이처럼 소중한 존재를 우리가 함부로 대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동료 피조물로서 인간과 동물은 많은 것을 공유하는 존재이다.

 

(3)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대상인 만물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15-20)

 

자연을 포함한 ‘만물’은 바로 성부 성자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예수님이 십자가로 화평을 이루시고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 대상이었다.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구원하고자 하시는 정도의 존재라면, 그 존재에 관하여 우리는 어떤 권리를 인정해야 할까. 신학자 제임스 던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께 두신 당신의 창조 목적과 구속 목적을 모두 이루셨다”라고 한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구원)의 경륜은 하나이다. 우리가 구속을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창조도 중요한데,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복음 전파의 대상인 만물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만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이 본문은 예수님이 주신 핵심 명령 중 하나인 대위임령(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 마 28:18-20)의 마가 버전이다. 그런데 여기서 ‘만민’은 잘못된 번역이다. 원어인 헬라어 단어는 ‘크티세이’(κτισει, 피조물)로,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모든 피조물’(all creation)로 번역하고 있다(NASB, NIV 등). 하지만 최근 번역인 새한글성경과 가톨릭성경을 제외한 다른 한국어 번역 성경(개역개정, 새번역, 공동번역)은 이 말을 ‘만민, 모든 사람’으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도 인간 중심적 번역 경향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는 명령은 무엇을 의미할까? 로마서 8:21-22에서 바울 사도는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라고 말한다. 즉, 그 모든 피조물이 바라는 것은 바로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동물을 비롯한 많은 피조물들이 어떤 억압을 당하고 있는지는 명확하다. 현대 사회에서 가축은 생명이 아닌 기계로 취급받고 있다. 공장식 축산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1년간 도살되는 닭의 수가 약 660억 마리이다. 이것은 명백한 생태 학살이며, 닭은 단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수많은 피조물이 이처럼 고통받으며 복음의 선포를 기다리고 있다.

 

시대마다 신학은 고유한 역할을 감당해 왔다. 남미에서 억압과 착취의 악을 고발하는 ‘해방신학’이 출현했던 것처럼, 인간과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는 기후 위기의 시대에 새로운 관점의 신학인 ‘생태신학’이 부상하고 있다. 성서의 창조와 구원의 메시지를 새롭게 발견하고 전통적인 신학을 재구성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녹아내리는 빙하들과 영구동토층, 느려지는 해류 순환, 이미 절반이 사라진 산호초, 불타오르는 거대한 아마존의 숲, 산성화되는 바다, 1,000만 년 만에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생물 멸종…. 우리는 이 모든 현상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중한 피조물들의 고통스러운 외침과 호소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이들의 외침에 응답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자연의 권리’를 포함한 기후생태헌법을 제정하는 일일 것이다.

 


1) ‘자연의 권리’라는 개념은, 지구의 생명체들은 존재 자체로 권리를 지녔다는 생각이다. 이 개념을 실정법의 영역에서 명시하고, 지구 생명체들에게 법인격을 부여하려는 학문이 바로 ‘지구법학’이며, 신학자 토마스 베리가 그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지구법학회, 『지구법학』(문학과지성사, 2023), 18-19.

2) 강철구 외, 『성서, 생태위기에 답하다』(한국학술정보, 20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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