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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있었던 세미나에서 필자는 극우 성향 기독교 운동(세력)이 가져오는 부정적 결과를 미국의 개신교 극우화의 역사적 사례와 비교 고찰하여 신앙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두 가지로 제시했다. 이중 신앙적 차원은 기독교 신앙이 본질이 왜곡됨에 따라 교회 공동체 내부의 건강성이 저해되는 것을 비롯해서, 기독교와 나아가 종교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추락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사회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부정적 양상은 혐오와 배타주의가 확산하는 것, 대화와 타협의 정신을 약화시키고, 사회를 극단적 진영 대립으로 몰아가도록 논리가 아닌 수사(rhetoric)를 제공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본문 중)
신하영1)
대선이 끝났다.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은 거리 곳곳에 “국민의 위대한 승리”라고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 집권 여당이 된 것을 자축하면서 계엄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을 정권 교체로 ‘한방’ 먹인 국민에게 공을 돌리는 메시지였다. 그런데 이번 대선은 국민에게 승리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상처투성이 영광으로 남았다. 12.3 계엄 이후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수면 위로 떠오른 거대한 해일 같은 혐오와 분열이 국민들의 감각과 정서를 집어삼켰다. 지난 2022년 대선에서 “여성가족부 폐지”와 같은 밑도 끝도 없는 혐오의 불쏘시개를 던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고, 사회를 통합시키려는 의지가 과연 있는가 싶었던 3년여 정부의 실책들로 인해서 존중과 공존은 더욱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되어 왔다.
12.3 계엄 이후 대선까지 반년 동안 두 번의 계절을 지나면서, 수년간 ‘절차적으로 용인된’ 혐오가, 그리고 그간 그 혐오로 인해 억눌린 저항의 목소리가 용광로처럼 뒤섞이던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는 시민정신의 축제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계급과 이념과 젠더 등 모든 것들의 각축장이라고 그 시간을 평할 것이다. 거시적으로 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건과 시기를 평가하는 것은 역사와 다음 세대의 몫으로 남겨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시적으로, 지금 당장 우리 손에 쥐어진 성찰의 몫은 무엇일까.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 2막 3장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혼돈이 이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냈도다.
가장 신성모독적인 살인이
주께서 기름 부으신 성전을 부숴 열고
그 건물의 생명을 앗아갔도다.
Confusion now hath made his masterpiece.
Most sacrilegious murder hath broke ope
The Lord’s anointed temple, and stole thence
The life o’ the building!2)
전쟁 후 왕이 암살되는 대혼란이 일어난 다음 찾아온 무섭도록 극적인 침묵과 혼란을 묘사한 이 장면에서 주목할 것은 왕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아니다. 이 장면은 그보다도 모든 사건에 연루된 모든 등장인물에게 이제 곧 닥칠 죄와 책임의 무게에 대한 무거운 예고에 가깝다. 그래서 살인 사건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사건 이후의 ‘인간의 질서와 신성함이 사라진 상태’가 등장인물 모두에게 빚으로 남겨진다. 모든 사건들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충격이 지난 자리에 남겨진, 연루된 이들에게 행위와 의도에 따른 대가, 혹은 업보(karma)를 남긴다.
계엄부터 대선에 이르는 두 계절의 시간이 기독교에는 어떤 정산서를 가져올까. 필자는 지난 3월, 전국교수연구자연대와 사회공공연구원이 주최하는 “제2차 극우파시즘 토론회”에 발제자로 참석했다. 발제자 초빙 이메일에 나온 주제명은 “극우파시즘과 극우 기독교”였는데, 나란히 적힌 두 단어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이 발제 다음에 이어지는 주제는 “극우파시즘과 극우 유튜브”였다). 기독교가 극우와 함께 거론되고, 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반하는 극우파시즘과 기독교가 연관 검색어처럼 나란히 놓이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다. 민주주의가 현대 대한민국의 근간이라는 점에서 한국기독교가 국가를 위협하는 극우세력과 도매금으로 취급되거나 혹은 그 세력 자체로 호명되는 이 현실은 이제 ‘혼돈이 만들어낸 최악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남았다.
사랑과 용서가 없어진 자리에는 배제와 정죄가 남는다.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잊은 교회는 성경에 대한 일차원적 해석을 고집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경의 표현을 자의적으로 이용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계엄 사태 이후 ‘내란 우두머리’로 기소된 전 대통령을 수호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집회에 기독교 목사가 나서서 폭력을 선동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지난 3월 있었던 세미나에서 필자는 극우 성향 기독교 운동(세력)이 가져오는 부정적 결과를 미국의 개신교 극우화의 역사적 사례와 비교 고찰하여 신앙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두 가지로 제시했다. 이중 신앙적 차원은 기독교 신앙이 본질이 왜곡됨에 따라 교회 공동체 내부의 건강성이 저해되는 것을 비롯해서, 기독교와 나아가 종교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추락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사회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부정적 양상은 혐오와 배타주의가 확산하는 것, 대화와 타협의 정신을 약화시키고, 사회를 극단적 진영 대립으로 몰아가도록 논리가 아닌 수사(rhetoric)를 제공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앙적 차원의 분열과 손실, 사회적 차원의 신뢰 하락은 12‧3 계엄 사태 이후 반년간의 시간 동안 한국 개신교가 안팎으로 경험하고 있는 상황을 너무나 잘 설명한다.
누군가는 계엄과 대선 이후 혼란이 ‘수습’되고 정국이 ‘안정화’되었다고 말하겠지만, 한국 기독교는 지금의 커다란 침묵 이후 다가올, 혹은 이미 도래한, 거대한 혼돈이 빚어낸 작품을 마주해야 한다. 혼돈 속에서 혐오와 무질서를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던 과오에 대한 청구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수치로 확인되는 한국 교회에 대한 신뢰도 하락,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에 범람하는 개신교 극우 집회에 참석한 목회자와 신도들을 향한 조롱과 희화화는 이 청구서의 제일 윗줄을 차지한다. 하지만 지금 제일 두려운 것은 단기간에 회복이 불가능한 우리의 손실이다. 그것은 신자들이 목회자에게 가지는 믿음, 교회 내 미래 세대가 교회를 통해 건강한 기독 시민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와 같은 것들이다.
대선이 지나고 누군가는 승자가 되고, 누군가는 다가오는 지방 선거 혹은 총선을 위해서 힘을 키우고 있다. 어지럽던 시간을 돌아보고 과거의 손실을 복구하기 보다는, 새로운 세력을 규합하거나 기회를 틈타려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교회는 달라야 한다. ‘개신교의 극우화’를 세속 사회학자들이 중요한 연구 주제로 삼을만큼 교회를 향한 사회의 불신은 이제 “다 그런 것은 아니다”의 ‘선 긋기’가 통하지 않을 정도에 이르렀다. 이제는 극우화라는 극단적인 행태를 낳게 된 교회 속 문제, 한국 교회 공동체의 구조적 결함을 ‘우리의 문제’로 제대로 직면할 때다. 빚을 제때 갚지 못하고 상환 능력이 없는 개인은 신용불량자가 되고, 회사는 부도를 맞는다. 1997년 IMF 사태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한 장면에서 김혜수 배우가 역할을 맡은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은 이미 위기의 징후를 알고 있었음에도 눈감고 방조하거나 외면한 정부 관계자들을 향해 말한다.
“그 사람들은 몰랐던 게 아니라, 모른 척한 겁니다.”
1)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기윤실 상임집행위원.
2)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천병희 옮김(민음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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