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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새로운 출발을 위해 한국 교회는 먼저 탈권위주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식론적 측면에서 권위주의는 주요한 사회 문제 속 공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첫째,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분하여 올바른 권위에 대한 가치체계를 정립해야 하며, 둘째, 권위주의를 심화하는 왜곡된 교회 구조뿐 아니라 연관된 사회체계를 바꾸어야 한다. (본문 중)
박성철(목사, 하나세교회)
I.
20세기 한국 사회는 일제 강점기와 한반도 분단, 한국 전쟁과 군사독재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시절을 보냈다. 그로 인한 급속한 변화는 놀라운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의 발전뿐 아니라 부정적인 결과물도 남겨 놓았다. 그중 첫 번째는 다양한 구조가 중첩하며 서로 다른 사회 정체성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공간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윤석열 정권의 12·3 내란 사태를 지지하는 낡은 태극기 세력과 이에 저항한 ‘빛의 혁명’의 새로운 주체들이 공존하는 현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
두 번째는 억압과 차별이 상호교차적으로 연관된 사회적 환경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파시스트 운동은 근대적 특징과 탈근대적 특징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정치적 메시아주의(political messianism)와 같이 종교와 정치가 결탁하는 현상과 ‘이대남’ 현상과 같이 신구(新舊) 가치관이 충돌하는 현상도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러한 문제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극우 세력처럼 현실을 외면한 채 희생양을 찾아서는 안 되며, 중첩적인 한국 사회의 특징과 억압의 상호교차성을 직시해야 한다.
II.
현대 사회에서 대중은 다층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데올로기와 같이 단일하고 통일된 가치 체계에 자신의 정체성을 종속하려는 시도에 거부감을 가진다. 기존의 주요 사회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면 억압과 강요로 여겨 거부한다. 둘째, 감성적 요인에 의해 이합집산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감성적 가치(체계)의 문제로 특정 집단이나 세대를 관통하는 공감(empathy)의 문제이다. 물론 이러한 다층적 정체성은 구조적 중첩으로 인해 공적 영역에서 상호 충돌하면서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게다가 특정한 정체성(예: 종교적 정체성)으로 단순화해서 해결하려 할수록 갈등은 더욱 심해진다.
또한 현대 사회는 과거의 거대 담론으로 담아낼 수 없는 사회적 억압과 차별의 다층적 특징을 포함하고 있기에,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 혹은 ‘교차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오늘날 억압은 “계급, ‘인종’/민족, 젠더, 장애, 섹슈얼리티 등을 포함한 사회 불평등의 요소들을 상호교차”시켜 파악해야 하며, “단차원적 개념화에 비해 보다 복합적인 차별의 유형을 산출”함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1) 예를 들어, “인종과 젠더, 혹은 섹슈얼리티와 민족의 상호교차”와 같은 “상호교차하는 억압의 특정한 형태”를 반영해야 한다.2)
한국 사회의 복잡한 현실은 ‘이대남’ 현상에서 잘 나타난다. 이대남을 대표하는 ‘역(逆)차별 의식’과 ‘반(反)여성주의’(anti-feminism)는 구조적 중첩으로 형성된 현실에 대한 거부감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대남은 다른 연령대의 남성보다 상당히 높은 성평등 의식을 가졌다. 하지만 한편으로, 기존의 권위주의에 기초한 남성 기득권이 유지되는 현실에, 다른 한편으로,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면서 그 기득권을 누릴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러므로 역차별 의식은 페미니즘을 수용하지 않으면서도 기득권을 누리는 남성 기성세대와 기득권을 누리지 못하는 남성 청년 세대의 갈등에 기인한다. 또한 반여성주의 원인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도피하려는 왜곡된 욕망에서 찾아야 한다. 현실을 직시한다면, 남성 기성세대의 기득권을 해체하여 더욱 평등한 사회를 만듦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해야 한다. 하지만 그 방식은 쉽지 않으며 무엇보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한 줌의 기득권도 포기해야 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렇기에 현실 도피 욕망이 작동하면서 ‘가상의 적’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얻는 포퓰리즘(populism)과 결탁하여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했다.
이는 결국 정치적 극단주의(political extremism)의 부상으로 나아간다. 사회적 입지가 약한 이대남은 정치적 효용감을 느끼지 못하기에 환멸감에 쉽게 휩싸이며 극단적인 주장에 매력을 느낀다. 오늘날 탈근대 파시즘(postmodern fascism)이 지지를 얻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근대 파시즘과 탈근대 파시즘 사이에는 극단적 권위주의와 권력 쟁취를 위한 사회적 불안의 도구화, 가상의 적과 희생양을 통한 대중적 지지 획득 등의 공통점도 존재하지만, 몇 가지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첫째, 탈근대 파시즘은 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통해 권력을 쟁취하려 했던 근대 파시즘과 달리 세부적인 주요 요소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형식적으로 주권재민 원칙과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인정한다. 둘째, 군대와 같은 소수 엘리트의 힘으로 권력을 쟁취하려 했던 근대 파시즘과 달리 엘리트주의(elitism)의 변형인 능력주의(能力主義, meritocracy)를 앞세워 포퓰리즘을 자극한다. 셋째, 인종주의적 민족주의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던 근대 파시즘에 비해 그러한 요소가 많이 약화했다.
종교적 영역에서 탈근대 파시즘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적 메시아주의다.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현실 정치를 대표하는 지배자를 신적 지배의 대리자로 여겨 따르는 현상이다.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대중을 권력 쟁취의 도구로 전락시키며,3) 필연적으로 교회의 정치 도구화를 촉진한다. 예를 들어, 지난 3년 동안 기독교 극우 세력은 윤석열 정권의 비호 아래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며 한국 교회를 과잉 대표했다. 또한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집단으로 전락하였다. 이는 근본주의 대형 교회가 부족한 정치적 정당성을 종교적 정당성으로 대체하려 했던 윤석열 정권의 이해관계에 편승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극우 세력은 포자화(sporulation)4)를 통해 특정 지역이나 계층이 아니라 특정한 이슈(반동성애, 반여성주의, 반이민자, 반중국 등)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물론 큰 덩어리에서 보면, 누룩(고전 5:6-7; 갈 5:9)처럼 사회적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는 뚜렷한 지향성과 함께 전광훈이나 손현보 같은 대표자도 있지만, 하나의 통일된 뿌리나 조직 혹은 집합체로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느슨한 동질감으로 묶여 있다고 볼 수 있다.
III.
진정한 새로운 출발을 위해 한국 교회는 먼저 탈권위주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식론적 측면에서 권위주의는 주요한 사회 문제 속 공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첫째,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분하여 올바른 권위에 대한 가치체계를 정립해야 하며, 둘째, 권위주의를 심화하는 왜곡된 교회 구조뿐 아니라 연관된 사회체계를 바꾸어야 한다. 물론 과거와 같은 강요된 연대나 단면적 저항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므로 필자는 이를 횡단적 연대와 저항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닫힌 전문성보다 횡단성(transversality)5)이 중요한 사회로 변했다. 그러므로 횡단적 연대와 저항을 위해서는 서로 다른 이슈에 대한 공감을 중시하며. 이슈를 상호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전문성은 필요하지만, 한 분야의 전문성만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 교회도 이를 인정하고 신약성서 속 누룩의 비유를 통해 새로운 통찰을 얻어야 한다(눅 13:20-21). 이는 칼 바르트(Karl Barth)가 강조한 정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익명성과 연관성이 있는데,6) 필자는 그리스도인의 익명성이 정치적 디아코니아(political diakonia)를 통해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디아코니아는 새로운 조직과 체계를 통해 실현될 수 있는데, 나이와 직분, 연고주의와 관계없이 특정 거점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에 따라 책임을 나누고 지역 조직도 초연결사회의 다양한 기술을 사용하여 역할에 맞게 단순화해야 한다.
결국 한국 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새로운 출발을 위한 자발적 협력을 이루어낼 것인가?’에 달렸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다른 계층과 세대로 인해 발생하는 생각의 차이를 존중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 의식과 성찰적 인격이 필요하다. 과거처럼 당위성을 앞세워 맹목적인 참여를 요구해서는 절대로 횡단적 연대와 저항으로 나아갈 수 없다. 복잡해 보이는 현실이지만, 기독교의 모든 실천적 행위가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또 다른 ‘나’로서 바라보며 공감하려 노력하는 사랑의 가치(마 22:39)에서 시작됨을 기억한다면,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방향을 잃지 않을 것이다.
1) 앤서니 기든스, 필립 W. 서튼, 『사회학의 핵심 개념들』, 김봉석 옮김(파주: 동녘, 2018), 230.
2) P. H. Collins, Black Feminist Thought: Knowledge, Consciousness and the Politics of Empowerment (Routelege: New York, 2000), 18.
3) Yong Bock Kim, “Messiah and Minjung: Discerning Messianic Politics over against Political Messianis”, in Minjung Theology. People as the Subject of History, ed. by Yong Bock Kim (Singapore: Christian Conference of Asia, 1981), 193.
4) 생물이 불리한 환경을 견디기 위해 내구성이 강한 포자를 형성하는 것-편집자.
5) 상호 교차 또는 연결을 통해 새로운 관계, 통찰, 또는 구조를 형성하는 특성-편집자.
6) Karl Barth, “Christengemeinde und Bürgergemeinde”, (Zürich: EVZ, 1970), 76-78. (그리스도인이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활동할 때 반드시 명시적으로 ‘기독교인’으로서 행동하거나 기독교적 상징과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주권과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한 윤리적 책임을 실천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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