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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국가조찬기도회는 어떻습니까? 회장직을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기업인이 맡고 있으며, 임원들 가운데도 부정적 이력이 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과거 주빈으로 참여한 일부 인사들은 신흥 종교 단체와 연루되었다는 의혹까지 제기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과연 그 자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정결한 기도의 자리인지, 아니면 정치·경제·종교의 이해관계가 얽힌 무대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기도가 권력자, 종교인, 경제인의 네트워크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도가 아닙니다. (본문 중)

 

강영안(서강대 명예교수, 철학)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부탁합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조금 더 풀어 말하자면, “주님, 우리가 무엇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무엇을 소원하며 어떤 희망을 품고 이 땅을 걸어가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우리가 흔히 ‘주기도문’이라 부르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눅 11:2–4). 이 기도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기도의 중심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통치, 그리고 그분의 뜻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높아지고,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제자들의 삶의 열망이자 지향이 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철저히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공적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기도를 개인적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기도는 개인에게 적용되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을 위한 공적 유익을 지향합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가르침 속에는 기도가 정의와 평화를 향한 책임 있는 요청이어야 한다는 요구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진실하고 정의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그분의 나라이고, 그분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국가조찬기도회’를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모임은 1966년 김준곤 목사가 처음 도입한 뒤, 1970년대 군사 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제도화되었습니다. 미국에서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시작된 국가조찬기도회를 본떠 마련된 행사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의 전통 속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예배와 기도의 자리가 아니라,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이 서로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무대였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실제로 군사 정권 시절, 교계 지도자들은 이 자리를 통해 정치 권력과 밀착하며 종교적 영향력을 넓혔고, 정치인들은 기도를 빌려 국가주의적 비전을 정당화했습니다.

 

1980년 8월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당시)을 축복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기도회’ 모습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종교 권력자나 정치 권력자와 함께 앉아 그들을 위해 따로 기도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죄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기도하셨습니다. 바울이나 베드로 역시 로마 황제나 총독을 위해 별도의 기도회를 연 적이 없습니다. 교회가 권력과 나란히 서게 된 것은 이미 교회가 지배 체제의 일부로 편입된 이후였습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도 권력 앞에서 드려지는 외식적 기도를 신랄하게 꾸짖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사 1:15–17)

 

아모스는 외쳤습니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암 5:22-24).

 

기도가 정의와 결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닿지 못하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국가조찬기도회는 어떻습니까? 회장직을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기업인이 맡고 있으며, 임원들 가운데도 부정적 이력이 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과거 주빈으로 참여한 일부 인사들은 신흥 종교 단체와 연루되었다는 의혹까지 제기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과연 그 자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정결한 기도의 자리인지, 아니면 정치·경제·종교의 이해관계가 얽힌 무대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기도가 권력자, 종교인, 경제인의 네트워크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도가 아닙니다. 종교적 언어로 포장된 정치적 의례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정치와 종교가 결탁한 이러한 기도회는 이제 폐지되어야 마땅합니다. 기도의 본령을 벗어났을 뿐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회적 불신만 키우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적 기도 자체는 중요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국가 지도자들이 정의롭고 겸손하게 나라를 이끌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공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후반부는 철저히 공동체적이며 공의 중심의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간구는 개인적 축복을 넘어 공동체의 필요를 함께 아파하며 나누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고백은 공동체 안에서 상호 용서와 화해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는 간청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보호를 구하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교회가 진정 드려야 할 기도는 정권의 안정이나 국가의 번영을 위한 형식적 기도가 아니라, 고통받는 형제자매의 눈물을 기억하는 기도입니다. 교회는 권력자와 함께하는 기도회를 내려놓고, 병원 병상에서, 쪽방촌과 이주노동자 숙소에서, 난민의 천막과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드려지는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드려지는 기도야말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참된 기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자들과 함께 다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 고백은 단순히 기도의 형식을 배우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살며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지를 다시 배우겠다는 회개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공허한 외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의를 향한 갈망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실현되기를 바라는 열망입니다. 교회가 다시 진정한 기도의 자리로 돌아갈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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