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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인 의미의 개인 개념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책임과 도덕적 자율성이다. 어쩌면 이것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나란히 놓을 수 없는 근거이기도 할 것이다. 개인은 의지의 자율을 따라 자신의 악한 본성을 거스르면서까지 스스로를 도덕의 입법가이자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주체로 놓는다. 그리고 이에 대한 결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이성적 존재자인 개별 인간이 내린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근대적 개인은 이성적 존재자이면서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는 개별 인간으로 선 자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본문 중)
김동규(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개인’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개인이란 말을 일상적 수준에서나 공적 수준에서 굉장히 다양한 의미를 담아 사용한다. 사소하게는 극장이나 박물관에 입장할 때, 개인 입장과 단체 입장을 구별하면서 개인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하고, 정당의 한 인사에게 특정 사안에 대한 의견을 물을 때 “이것은 당의 입장은 아니고, 개인의 견해인데…”라는 말로 시작하는 입장을 듣기도 한다. 또한 “너는 너무 개인주의적이야”라고 누군가를 힐난할 때는, 집단이나 전체를 생각하기보다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다소 이기주의적인 태도를 겨냥해서 개인이란 말을 쓰는 것 같다. 이처럼 개인이란 말은 일상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공적 차원에서 다양한 의미를 담아 사용된다.
그렇다면 철학적 차원에서 개인은 어떻게 탄생했으며,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는가? 일단 어원적 의미를 알아보자. 어원 연구에서 탁월한 성과를 낸 오스카 블로흐(Oscar Bloch)와 발트허 폰 바르트부르그(Walther von Wartburg)는 프랑스어 ‘엥디비뒤’(Individu), 곧 개인 또는 개별자, 개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라틴어 ‘인디스팅크투스’(indistinctus)에서 차용. ‘인디비두움’(individuum)은 ‘분할 불가능한 것’을 의미함[키케로의 저술에서는 ‘원자’를 지칭함. ‘인디비두우스’(individuus)는 고전 라틴어에서 ‘분할 불가능한’의 의미로 통용됨]. 이로부터 종(種)과 속(屬)에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특수한 것’을 의미하게 되었고, 이후 ‘모든 개별적 존재’를 지칭하게 되었으며, 구어체에서는 17세기부터 ‘불특정 인격’을 의미하게 됨”(Bloch et Wartburg 2009: 337).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블로흐가 이 개념의 라틴어 기원만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리스어 전통에서는 17세기 이래 널리 사용된 개인 개념에 관한 적절한 기원을 찾기 어렵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물론 그리스어와 문화 전통에서도 ‘이디오테스’(ιδιώτης)와 같은 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은 공적 영역에 참여하지 않은 사적 인간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리스 전통에서는 그런 인간을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존재로 보지 않았다.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례에서 보듯, 그리스 전통에서 인간은 우선 그리고 대개 폴리스 안에서의 인간이다. 또한 이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에게서도 잘 나타나는 바인데, 대표적인 예로 『크리톤』의 소크라테스를 들 수 있다. 그는 탈옥을 권하는 친구 크리톤에게 아테네의 시민으로서 도시의 법률을 존중하여 탈옥할 수 없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친다. 오늘날 통념에서 볼 때 부당한 일을 겪은 개인은 자신의 삶과 안전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할 법도 한데, 소크라테스가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두는 것은 아테네다. 이는 그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아테네 법정에 섰을 때도 일관되게 유지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구 사상과 역사에서 개인 개념의 발명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혹자는 중세나 르네상스, 종교개혁 시대에도 개인 개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거기서도 우리는 개인 개념의 단초 정도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개신교인들에게 익숙한 마르틴 루터의 선언을 보자. “내가 여기 서 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기를, 아멘(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Gott helfe mir. Amen).” 이는 1521년 4월 18일 보름스 제국의회(Reichstag zu Worms)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는 말로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자신의 저작과 그 입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고 루터가 한 선언이다(물론 그 진위 여부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루터는 자신의 이성과 신앙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 앞에 선 개인으로 저런 의지적 결단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어디까지나 신 앞에서의 결단이다. 내가 단독자로 서 있는 것 같지만, 그때 단독자인 개인은 어디까지나 신과의 연결 또는 유대 안에서의 개인이므로, 이를 완전한 단독자로 여길 수 있는지 의문이다. 다만 시대와 종교의 한계 내에서 신 앞에서의 단독자로서, 개별자로서 어떤 공동체나 전통에 귀속되어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존재의 발명이 분명 신앙의 전통 내에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서구의 종교적 전통에서 개인을 논하고자 할 때,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루터보다는 오히려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에게서 개인의 단초를 보려 한다].
따라서 완전한 독립적 개체로서의 개인에 대한 강조점은 아무래도 근대의 철학 전통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를 간과할 수 없다. 그 특유의 방법적 회의를 따라 발견된 일인칭 현재 시점의 생각하는 나로서의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는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이 코기토인 나가 학문과 인식의 토대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인 것은 아니다. 나의 인식과 사유가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선한 신의 존재가 나의 존재를 보증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에게 완벽한 독립적 개체로서의 나 또는 개인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만이 아니라 중세와는 다른 방식이긴 하나 여전히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시도했던 근대의 여러 사상가들, 예를 들어 로크나 라이프니츠 등의 예에서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독립적 개인의 의미를 발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이 때문에 여러 논쟁이 아직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개인 개념이 언제 누구에게서 나왔냐고 특정하기란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 주목한다. 이는 데카르트만 하더라도 다소 신학에 대한 의존성이 있기 때문인데, 이 근대철학의 아버지와 비교할 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그리스도교 신학적 의미의 신에 의존하는 개인의 개인성을 다른 누구보다 더 고양하는 경향을 보인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두 철학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두 철학자 모두에게 있어서, 동일한 두 개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근본적인 사상이다. 스피노자의 경우, 이는 ‘실체’ 또는 ‘자연’ 개념의 구성으로부터 직접 귀결된다. … 그가 ‘실체’ 또는 ‘자연’의 구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한하게 많은 양태로 무한하게 많은 사물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무한’은 유한한 ‘사물들’(‘인간’을 포함하여)이 자기 고유의 특별한 결합을 창조함으로써 끊임없이 자기를 차별화한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반면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이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원리, 즉 ‘식별 불가능자의 원리’인데, 이는 어떤 상황에서든 서로를 대체할 수 있는 두 개의 상이한 사물을 동시에 사유하는 것은 용어상의 모순이라는 사실로부터 생겨난다(이는 관찰로도 검증될 수 있다. 자연의 나무에는 동일한 두 잎이 없고, 동일한 두 시간의 순간이 없으며, 같은 모델의 동일한 두 사본이 없는 등등)”(Balibar 227-28).
즉, 스피노자의 자연과 마찬가지인 신이라는 유일실체의 주재 아래 개별자들은(개별 인간을 포함하여) 각기 고유한 개별성을 갖는다. 이것이 다소 형이상학적 주장이라면, 라이프니츠에게서는 논리적 차원에서 서로를 대체하는 두 가지 상이한 사물이 동시에 존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유를 따라 개체의 절대적 개체성이 보존된다. 당연히 이때의 개체에는 개별 인간도 포함하며,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른 어떤 존재로도 환원되지 않는 개별자로서의 개인 개념에 대한 직접적인 철학적 근거를 얻게 된다.
이것은 형이상학적이고 논리적인 귀결이지만, 이는 근대적 시민 주체로서의 개인의 발명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하고, 환원 불가능한 개별적인 존재의 정립은 그 존재의 절대적 지위를 보장할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환원 불가능한 개별자인 개인을 다른 것에 귀속시키는 모든 시도는 형이상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부자연스럽다. 그러므로 가장 원초적으로 개인의 존재를 보존하는 것이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자유의 길이다.
물론, 이런 개인 개념이 구체적 삶에서 그 활력을 부여받으려면, 홉스나 로크와 같은 이들의 정치 철학적 탐구, 인권 개념에 대한 기여가 탐색되어야 할 것인데, 이에 대한 논의는 미뤄두도록 하자. 다만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논의에서 이루어진 절대적 개별성에 대한 논의와 종교개혁이나 데카르트, 로크 등에서 발견되는 다소 신학적인 연결고리를 가진 개별성에 대한 논의가 충돌만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근대적 개인 개념은 이러한 관념들을 모두 가로지르는 가운데, 개인의 절대성을 고양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개인은 신학적 기원을 가질 수도 있고, 자연이나 우주론적 기원과 근거 안에서 형성된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동체나 신, 자연으로 단번에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개인의 개인성이 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러 매우 강하게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또한 어느 입장을 따르더라도 개인은 그 자체로 자율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데카르트처럼 그 존재의 근거를 신에서 찾건, 스피노자처럼 자연에서 찾건 간에 개별자들은 어떤 모종의 원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라이프니츠에게도 신의 ‘예정조화’1)라는 조화를 통해 개별자들은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네트워크를 이루어야 했다. 이를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따라서 자율성은 전부 아니면 무의 규칙을 따르는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개체의 내적·외적 관계들의 함수이다. 그것은 고립되어 있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처음부터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 이론은 개체성들이 상호 연결되어 ‘네트워크’ 또는 ‘체계’를 구축한다는 것을 함의한다”(Balibar 1996: 228).
여기서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개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단순히 이기적 주체라거나 아무것도 침해할 수 없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통 신학적 논의와 다소 거리를 두려 하는 스피노자에게서 개인들은 무조건적 자율성을 확보한 존재가 아니다. 개인은 고립된 존재라기보다 유일실체의 양태이며, 바로 그 점에서 상호 연결된 채로 자연의 운동과 운행 안에서 존재하는 존재들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통념적인 개인의 관념을 바꿀 필요가 있는데, 적어도 17세기 근대철학에서 개인은 고립된 절대적 자아가 아니라 체계와 상호 연결적 네트워크를 긍정하는 가운데 자유롭게 존재하는 존재들로 간주되는 경향이 더 강하다.
이와 더불어 근대적 개인의 의미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도덕적 주체로서의 개인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는데, 그는 도덕법칙에 대한 존중을 따라 스스로 입법한 도덕법칙에 스스로 종속되는 것을 의지의 자율성이라고 칭송하며 도덕적 개인의 의미를 개진했다. 우리는 도덕법칙을 거스를 수 있다. 스스로 기만하거나 스스로 도덕법칙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무책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이것이 어쩌면 인간의 악한 경향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근본적인 악함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도덕법칙을 준수하려 하고, 스스로 옳고 그름에 책임지려 할 수 있다. 그것은 선을 달성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비롯한 행위이며, 법칙을 존중함으로써 스스로 도덕법칙에 종속되는 의지의 자율성에 비롯한 행위이다. 그리고 이런 존재자들로 충만한 나라가 곧 목적의 나라, 목적의 왕국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원칙을, 내가 타율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다른 모든 것과 대비시켜, 의지의 자율의 원리라고 부르고자 한다. 개개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의 의지의 모든 준칙들을 통해 보편적으로 법칙 수립하는 자로 간주되어야 하는바, 그것은 이 관점에서 그 자신과 그의 행위들을 평가하기 위해 그러한데, 이성적 존재자의 이런 개념은 이 개념에 접속해 있는 매우 생산적인 개념, 곧 목적의 나라라는 개념에 이른다”(Kant 2005: B74). 울프는 이런 개인의 자율성 개념에 대해 좋은 설명을 제시한다. “책임 있는 인간은 변덕스럽거나 무정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도덕적 제약에 구속되어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이 그러한 제약의 심판자라고 주장한다. 그는 타인의 조언을 들을 수 있지만, 그것이 좋은 조언인지를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 책임 있는 인간은 도덕적 결정에 도달하고, 이를 명령의 형태로 자기 자신에게 표현하므로, 우리는 그가 자기 자신에게 법을 부여한다, 즉 자기입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그는 자율적이다”(Wolff 1970: 13-14).
이를 종합해서 볼 때, 근대적인 의미의 개인 개념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책임과 도덕적 자율성이다. 어쩌면 이것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나란히 놓을 수 없는 근거이기도 할 것이다. 개인은 의지의 자율을 따라 자신의 악한 본성을 거스르면서까지 스스로를 도덕의 입법가이자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주체로 놓는다. 그리고 이에 대한 결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이성적 존재자인 개별 인간이 내린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근대적 개인은 이성적 존재자이면서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는 개별 인간으로 선 자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보태자면, 칸트 역시 개인을 도덕적 주체로 설정하지만,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목적의 왕국의 일원으로 본다는 점이다. 여기서 목적의 왕국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에게서도 개인이 하나의 단절된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타인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그 자체 목적으로 대하는, 스스로 도덕적 입법가이자 책임 있는 자율적 인간으로 자신을 수립하는 존재자들의 공동체인 목적의 왕국은 이런 점에서 개인이 역시 모종의 네트워크 속에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즉, 개개인은 도덕 공동체의 일원인 것이다.
짧게나마 근대에 본격적으로 형성된 개인 개념을 살펴보았다. 언급한 각 철학자들의 입장은 사실 꼼꼼하게 따지고 들자면 한없이 서로 간 차이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개인 개념에 수렴하는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개인은 다른 것으로 대체 가능하거나 어떤 식으로 공유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충만한 힘과 이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것이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어떤 역량을 부여받은 존재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연적으로 이성을 타고난 존재일 수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된, 환원 불가능한 고유한 개체라는 점이다. 아울러 이렇게 분리된 존재이기는 하나 개인으로서의 개체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건, 도덕적 의미에서건 어떤 공동체나 네트워크를 지향하고 있다. 이것은 조금 작은 형태로 말하면 사회가 될 것이고, 더 광범위한 형태로 말하면 우주가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서든지 개인은 근대적 의미에서라도 고립되기만 한 개인으로 불려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개인이 근대로 넘어오면서 사유나 행위, 실천, 책임의 기본 단위로 말해진 것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과거의 개념처럼 보이지만 개인 개념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각기 고유한 존재인 인간은 개인으로서 그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이때 절대적 가치와 역량을 가지는 개인은 다른 전통이나 권위, 대체 가능한 매개체로 환원될 수 없다. 또한 이 개인은 스스로의 행위나 실천에 도덕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이다. 책임은 최소화하고, 권리는 최대화하려는 것이 오늘날 사회의 모습일지 모르나 적어도 철학자들은 책임 있고, 역량 있는 개인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지 쉽게 짐작하기 어렵지만 개인은 그저 자율적이고, 절대적이기보다 모종의 원리를 따라 결속된 공동체나 네트워크의 형태로 보존되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 점에서 공동체와 개인을 무조건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이 근대 개인주의의 정신은 아닐 것이며, 어쩌면 이는 단지 이기적 개인을 개인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것일지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근대적 의미의 개인 개념에도 가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가 했던 것처럼, 전통과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이야기를 가진 자아 관념이 근대적 개인에서는 배제되었다는 공동체주의적 비판은 제쳐두고라도, 이러한 개인의 관념이 힘과 이성의 역량에만 의존한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만일 내게 도덕적 판단 능력이나 이성의 힘이 원초적으로 부재한다면, 회복 불가능한 장애를 입은 인간이라면, 그때 나는 자율적 개인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는가? 소위 이성의 시대로 불리는 근대의 시대정신은 이런 의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1)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란 신이 창조의 시점에 서로 독립적인 단자들이 완벽히 조화롭게 움직이도록 미리 설계했다는 개념이다-편집자.
참고 문헌
Bloch, O. et von Wartburg, W. (2008). Dictionnaire étymologique de la langue française (“Quadrig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Balibar (1996). “What Is Man’ in Seventeenth-Century Philosophy? Subject, Individual, Citizen.” The Individual in Political Theory and Practice. Edited by Janet Coleman. Oxford: Clarendon Press.
Kant, I. (2005). 『윤리형이상학 정초』. 서울: 아카넷.
Wolff, R. P. (1970). In Defence of Anarchism. New York: Harper and 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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