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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교단 총회를 이해하려면 지교회의 당회와 노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우선 모든 회의체의 목적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로교 치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는 “총회의 목적이 먼저 신앙과 교리를 일체의 오류나 부패로부터 순수하게 지키는 것이고, 둘째로 교회 안에 품격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제7항 6조). 이것을 모든 치리회의 근본 목적이라고 이해하고 각각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중)
신동식(기윤실 공동대표, 빛과소금교회)
매년 9월이면 주요 교단들이 총회로 모입니다. 그리고 총회장을 비롯한 임원을 뽑고 각종 헌의안과 정책을 처리합니다. 이렇게 개신교 교회들이 총회로 모이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속한 장로교를 중심으로 교단 총회의 의미와 역할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교단 총회의 성경적 근거는 모세 시대의 장로들의 총회 그리고 유대교 회당 체제에서의 장로들의 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초기 교회에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초기 교회는 예루살렘 총회로 모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직분을 계급처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고위 사제직과 하위 사제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제 역시 초기 교회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4세기까지는 교회의 제도가 성경에 나타난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목사와 장로, 집사가 존재했고,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와 치리하는 장로인 장로, 재정과 구제에 전념하는 집사가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교회 정치 제도의 변화는 4세기에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핍박이 사라지면서 교회는 점점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확장된 교회를 다스리기 위하여 고위 사제직 즉, 교황, 주교직이 생겨나며 교회 제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직분의 변화는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는 멀어져 가기 시작했고, 2세기의 이그나티우스나 4세기의 크리소스토모스, 암브로시우스, 그리고 5세기 초의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비판받았습니다. 하지만 당대 교회의 중심이었던 로마 가톨릭의 강력한 변절로 인하여 성경적인 정치 구조는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정치 제도를 거부하고 끝까지 성경의 정치 제도를 지키려는 이들을 부르셨습니다. 6-7세기의 아르메니아의 바울파와 그들을 이어서 이탈리아의 왈도파 그리고 보헤미안 형제들과 알비파 영국의 롤라드파와 체코의 후스파등이 계속하여 정신을 이어받아 성경적 정치 제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종교개혁 시기 취리히의 츠빙글리가 장로회 제도를 가르쳤고 제네바의 칼뱅이 그것을 완성하였습니다.
장로회 정치 제도는 9세기 이후 왈도파가 주장했던 것처럼 당회, 노회, 대회, 총회의 구조를 지닌 제도였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초기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1559년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와 1578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제2치리서에 선명하게 확정되었습니다. 개신교회의 정치는 교황제도와 다름을 분명하게 나타내었습니다.

본 이미지는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이미지 입니다.
장로교 교단 총회를 이해하려면 지교회의 당회와 노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우선 모든 회의체의 목적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로교 치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는 “총회의 목적이 먼저 신앙과 교리를 일체의 오류나 부패로부터 순수하게 지키는 것이고, 둘째로 교회 안에 품격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제7항 6조). 이것을 모든 치리회의 근본 목적이라고 이해하고 각각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치리회의 출발점인 당회를 보겠습니다. 당회는 지교회의 치리회입니다. 당회는 지회의 목사와 장로로 구성됩니다. 세례 교인 25명이 있어야 목사와 장로가 세워지고 당회가 성립됩니다. 당회는 교인의 신앙과 행위를 살피는 일과, 교인을 교회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일과 제명하는 일을 합니다. 예배와 성례를 집행하고, 직분자에게 임직하고, 교회의 헌금과 재산을 관리하며, 권징을 시행합니다. 그리고 노회에 총대를 파송하고 교회의 정황을 보고합니다. 물론 당회의 세세한 규정은 각 교회가 교단 헌법에 근거하여 정관을 만들어서 정합니다.
둘째로, 노회를 살펴보겠습니다. 노회는 교회가 확장되어 지교회들이 생겨나게 되고 서로 돌아보아야 할 일들이 일어나고 당회가 감당할 수 없는 이단과 재판에 관한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세워진 회의체입니다.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는 한 지역의 목사, 교사, 장로가 교회들의 공동 관심사를 논의하기 위하여 모인 합법적 회의를 노회라고 칭하였습니다(7항 18조). 노회의 조직은 각 교단의 헌법대로 정하여 모입니다.
노회의 역할은 개 교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노회는 당회가 누락하거나 잘못 처리한 것을 바로 잡는 기본적인 일부터, 교회의 폐쇄와 목사, 장로의 면직과 같은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노회는 각 교회가 헌의하는 내용을 살피고 처리합니다. 재판에 대한 고소를 다루고 재판을 행합니다.
또한 노회가 행하는 중요한 일은 목사직에 대한 일체의 업무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목사직에 대한 모든 권한을 노회가 가집니다. 동시에 교회에 대한 권한도 가집니다. 교회를 설립하고 분립, 합병, 폐지하는 일과 목사의 청빙도 지도합니다. 또 지교회의 장로 선거를 승인합니다. 교회가 스스로 장로를 세울 수 없고, 반드시 노회의 승인을 받고 자격을 점검하는 고시를 치른 후 세워집니다. 이것은 독립 교회나 회중 교회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노회는 목사와 지교회를 다스리는 중요한 치리회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총회입니다. (장로교 전통에는 노회와 총회 중간에 대회라는 회의체가 존재하는데, 지역별 모임이라 할 수 있는 회의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장로교 교단들이 대부분 대회를 열지 않습니다.) 노회 이후에 총회가 열립니다. 총회는 모든 지교회 및 치리회를 관할하는 교단의 법적인 최고 회의체입니다. 총회의 회원은 각 노회에서 파송한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며 목사와 장로의 수를 같게 합니다. 노회를 대표하여 총회에 참석하는 총대는 노회가 정한 방법대로 선출하여 보냅니다.
총회는 교단 소속 교회 및 치리회의 모든 일을 감당합니다. 특별히 당회나 노회에서 합법적으로 제출하는 헌의, 청원, 상고, 고소, 문의, 위탁 판결 사안을 접수하며 치리합니다. 총회는 단지 재판과 행정만 관할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헌법을 해석할 권한을 지닙니다. 교리에 대한 논쟁에 대하여 해석하고 변증합니다. 그리고 노회를 설립, 합병, 분립, 폐지하는 일을 합니다. 또한 이단들을 구별하며 신학적인 판단을 내리고, 지교회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는 방안들을 마련하여 지교회를 돕습니다.
총회로 모이는 것은 지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회의체로 모이는 것입니다. 총회가 없으면 이단의 발흥과 교회의 분란을 막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총회의 유용성이 있습니다. 독립 교회나 회중 교회는 이런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총회는 정치적 결의는 하지 않고 교회의 일에 대해서만 결정합니다. 1590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총회가 모이는 첫 번째 이유는 부분적으로 이단을 반박하고 다음 세대에게 공적 신앙고백을 하기 위해서였으며 …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모든 것이 적절하고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하는 만큼 교회에서 좋은 정책과 질서가 구축되도록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1648년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31장 4절에서 총회는 교회적인 사항 이외의 다른 일은 취급하지도 말고, 결정해서도 안 되고, 국가에 관한 정치 문제에 간여하지 말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정치가 교회를 허무는 일을 결정할 때는 총회는 정치적 결의와 참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총회의 본질적 역할은 오직 교회의 사안들만을 논의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총회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 역사와 역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신학교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총회는 교회의 연합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목사를 세우는 일을 합니다. 이런 목적으로 총회는 목사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세웁니다. 그러므로 신학교는 총회의 지도를 받습니다. 따라서 본래 세속 기관인 교육부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목회자 양성기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교는 총회의 정책을 따릅니다. 하지만 신학교는 총회의 하부 기관이 아닙니다. 신학교는 총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기반입니다. 목사는 교회의 선생인 교수들을 통하여 양육됩니다. 그러기에 신학교와 총회는 동일한 목표를 지니고 협력합니다. 신학교는 총회가 나아가야 할 신학적 방향을 가르치고, 총회는 신학교가 총회의 신학을 더욱 분명하게 가르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총회와 신학교가 이러한 관계를 잘 유지하면 건강하지만, 그렇지 않고 분쟁하게 되면 교단 자체가 어려워집니다.
총회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총회가 부패하면 교회에 큰 어려움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총회를 바라보며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총회의 일이 나와 관계없는 것이 아닙니다. 총회는 지교회를 어렵게 하기도 하고 유익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관심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총회는 무엇보다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심을 다 해야 합니다. 교회를 허무는 일을 막아내야 하고 스스로 깨끗해야 합니다. 특별히 강단이 정치 선동의 장이 되는 것을 엄하게 치리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 성도는 일반적으로 총회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 내의 ‘정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이단의 침입을 막을 수 없고, 교회를 바르게 세울 수 없습니다. 불의하고 부도덕한 교회를 권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총회가 정직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신자들이 살피고 참관하는 일도 해야 합니다. 쉽지 않지만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일을 위해 신자는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까요? 작게는 교회에서 교단 신문의 비치를 요구하여 교단의 소식과 흐름을 살펴보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일에 대하여 당회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헌의안을 낼 수 있습니다. 또한 노회와 총회에 참석하여 일하는 목회자들이 정직하게 책임을 잘 감당하는지 살피는 것도 중요합니다. 목사를 믿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참으로 목사들이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정직한지 살피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번 9월에 열리는 교단 총회부터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 참관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회의를 방송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총대로 참석한 우리 교회의 목사들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살피는 것도 유익합니다. 총회의 건강은 교회의 건강이고 곧 신자의 건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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