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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복음으로 인한 한국 여성의 해방은 전통적인 가부장제에서 근현대 가부장제로의 이동을 의미했다. ‘로맨틱한’ 가부장제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현대 교회의 강단에서 자주 소환되었다. 사랑이 넘치고 아내를 보호하며 목숨까지 내어주는 책임적 가장은 ‘하나님께서 가정에 세우신 제사장’이다. 이 질서 안에서 아내란 구원에 있어서는 평등한 존재이지만, 기능적 위계를 창조 질서로 받아들이고 남편과 남자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신앙적’인 것이라고 내면화한다. (본문 중)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기독교사회윤리학)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주최한 시리즈 기획물 “12.3 계엄 이후 한국교회, 어디에서 다시 시작할 것인가” 연속 강의를 맡아 발제할 기회가 있었다. 강의가 아니라 그야말로 ‘발제’ 즉 하나의 의제를 제기하는 과제였다. 여섯 명의 발제자 중에서 유일한 여성이고 보니, 내가 선택할 의제는 젠더/여성주의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 일종의 소명과도 같은 거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기독교윤리학자로서 나의 관심 분야가 있으나, 시리즈 강의에서 유일하게 여자가 한 명 배치되었을 때, 만약 내가 젠더 이슈를 발의하지 않는다면 공적 담론의 장에서 여성 의제가 논의될 가능성 자체가 닫히기 때문이다. 하여 제목은, “한국교회 ‘여자 사용 설명서’ 비판”, 다소 도발적으로 붙였다. 한국교회가 현금의 위기를 직시하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출발선을 찾으려 한다면, 그동안 ‘당연’으로 여겨왔던 여성 인식과 실천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견 제시인 셈이다.

 

사실 여성에게 불평등한 사회 구조와 관행은 오래된 것인데, ‘12.3 계엄 이후’라는 시의성이 주어진 상황에서 뭐가 다를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직‧간접적으로 알고 지내는 2030 청년 여성들의 ‘불편함’을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접했다. ‘빛의 혁명’이라고 부르는 24-25년 광장의 저항에서 단연 돋보였던 2030 청년 여성들! 그중에는 ‘교회 여성’ 혹은 ‘한때 교회에 다녔던 여성’도 많았다. 통계 수치를 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활동하며 알던 젊은 교회 여성 활동가들이나 여자 청년들은 대부분 광장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진보적인 남자 어른들’이 그녀들을 칭찬했다. 예쁘다고, 기특하다고. 그런데 ‘좋은 평가’이건만 다수의 2030 여자 청년들은 어느 지점이 ‘불편’했을까? 그동안은 철없이 지내다가 마치 불법적 계엄으로 ‘계몽’되고 ‘정치적 주체’로 거듭난 듯 대하는 것이 어이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의 여자 청년들은 10-20년 전부터 광장에서 꾸준히 여성 의제들을 이야기해 왔는데 그건 관심 없더니, ‘탄핵과 정권 교체’라는 공동 의제로 모이자 이제야 눈에 보이냐는 비판이었다.

 

그녀들이 불편함을 드러낸 지점이 옳았다는 생각은 당시도 들었지만, 최근 조국혁신당에서 벌어진 성 비위 사건과 이를 대하는 당내 주요 인사들의 언행을 보니 확신이 더해진다. 검찰 개혁이라는 중차대한 과업을 앞두고 “‘사소한 것’ ‘죽고 사는 일도 아닌 것’으로 당내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철없는 여자들’”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20여 년 전, 지방 선거를 앞두고 여성들이 당내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하자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고 말했던 한 정치가는 이번 대선 과정에서도 여성을 ‘남편의 지위에 따라 고양되는 존재’ 정도로 평가함으로써 뼛속 깊은 가부장제적 편견을 들킨 바 있다. 하긴,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1960년대 말 흑인 인권운동과 연대하여 ‘시민’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의제를 법안에 담으려 했던 젊은 여자 청년들은, 의회 의장이었던 나이 지긋한 흑인 남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소녀들아, 지금 우리는 더 중요한 의제가 있단다. 그런 사소한 건 나중에 천천히 처리하자.”

 

돌아보면 한국 교회도 그랬다. 1934년 23차 장로회 총회를 준비하면서 교회 내 여성 인권에 대한 여러 가지 교회법 발의안들을 준비하고 사전 작업을 수행했던 여성들, 그녀들을 지원하기 위해 김춘배 목사가 총회 직전이었던 8월 「기독신보」에 기고문을 실은 적이 있었다. 성서에 근거하여 남녀 차별적 교회법을 고수하겠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하루 더 모욕함이요 교회 발전을 그만치 지연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 김 목사는 주장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조용하여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는 2천 년 전의 일(一)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알고 그러는 것도 아닐 터인데요.” 글의 방점은 여권 확보를 위한 복음적 근거에 있었다. 그런데, 그 논의가 성서 해석 방법론에 대한 논쟁으로 전환하면서 ‘남자들끼리의 싸움’으로 변질되었고, 그 과정에서 결국 여성들도, 여성 의제들도 사라져 버렸다.

 

 

한국 교회사에서 ‘전도부인’(Bible Women)의 ‘사용’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내외법이 확고했던 유교적 조선에서 여성들을 향한 전도에 필요한 인력이 전도부인이었고, 초기에 강력한 전통적 가부장제 시스템 안에서 고통당하던 여성들이 ‘하나님의 가문’에서 적극적으로 해방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섰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성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에게 전도부인은 ‘목회 보조자’ 정도의 배치였다. 때문에, 교회 조직 내 지위도, 여성 지도자 양성 교육과정도 ‘제한적’이었다. 이건 한국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여성 선교사들의 채용이나 월급 지급, 관리는 남성 선교사와 매우 차이가 났고, 선교사의 아내 경우도 전문성 유무와 상관없이 무노동 ‘사모’의 역할에 더하여 집안 살림까지 도맡아서 하는 이중 배치에 놓여 있었다.

 

결국 영국 청교도의 가정 언약 개념이 근현대 이성애적 핵가족의 이상과 선택적 친화성(elective affinity)을 가지며 신성화된 상태로 한국에 들어왔음을 보지 못한 탓이다. 기독교 복음으로 인한 한국 여성의 해방은 전통적인 가부장제에서 근현대 가부장제로의 이동을 의미했다. ‘로맨틱한’ 가부장제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현대 교회의 강단에서 자주 소환되었다. 사랑이 넘치고 아내를 보호하며 목숨까지 내어주는 책임적 가장은 ‘하나님께서 가정에 세우신 제사장’이다. 이 질서 안에서 아내란 구원에 있어서는 평등한 존재이지만, 기능적 위계를 창조 질서로 받아들이고 남편과 남자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신앙적’인 것이라고 내면화한다. 가정에서 먹이고 환대하고 돌보는 역할에 배치되는 여성들은 교회 안에서도 교회 주방과 안내 데스크, 약간의 성가대 자리가 전부인 ‘거룩한 보조자’의 역할을 맡아왔다.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가? 제대로 된 시작은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감이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지향점이기도 했다. ‘근원으로!’(ad fontes). 그렇게 외치긴 했어도 모든 면에서 처음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여성 의제들이 특히 그렇다. 그러니 어긋난 지점에서 아무리 이리저리 수습용, 방어용 노력을 해보아도 흔들리는 터전 위에 비본질적인 것들만 얹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을 듣기 위해 스승 곁에 앉은 마리아의 선택을 “이 좋은 것”이라고 했으며 빼앗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 이 똘똘한 제자는 예수님의 메시아 됨이 수직적 권력 구조 다툼의 맨 꼭대기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왕 되시고 아버지 되신 나라, 세상 모든 피조물이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어 자신의 개성대로 하나님께 직접 묻고 이웃과 수평적으로 관계하며 자신의 소명을 마음껏 펼침으로 그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는 질서를 위해 기꺼이 자기 몸을 내어주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순전한 향유 한 병을 오롯이 주의 발에 부었다. 작금의 한국 교회는 정치적 진영 논리에 따라 한쪽에 붙는 선택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이 ‘처음’일까? ‘근원’일까?

 

하나님의 귀한 형상으로 지음받은, 세상의 반을 떠받치고 살아온 여성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 가부장제 문화와 실천이 12.3 계엄 이후에도, 보수 쪽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앞으로 나아가며’ ‘새로움을 이 땅에 가져 오겠다’는 진보 진영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들키면 덮으려 하고 변명하려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이건 ‘사소한 문제’니 대의를 보자는 말로 자꾸 ‘진보’로부터 멀어진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기도한다. 그럼 알게 될 거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의 반이 나머지 반이 그래왔던 것처럼 온전히 그의 형상으로 살아낼 자유와 힘을 갖도록 우리의 삶과 제도와 교회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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