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2-3회 발행되는 <좋은나무>글을 카카오톡으로 받아보시려면(무료),

아래의 버튼을 클릭하여 ‘친구추가’를 해주시고

지인에게 ‘공유’하여 기윤실 <좋은나무>를 소개해주세요

 

카카오톡으로 <좋은나무> 구독하기

 <좋은나무> 뉴스레터 구독하기

공식적으로 1980년 광주는 민주화 항쟁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여전히 그와는 다른 생각으로 광주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의무를 조금은 더 지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소년이 온다』가 광주의 전모를 드러내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는 광주의 경험을 우리 몸으로 직접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소년이 온다』를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본문 중)

 

정영훈(경상국립대 교수, 문학평론가)

 

1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소재로 한 소설입니다. 이전 한강 소설에서는 인물들의 삶 배후에 역사적 현실이 뚜렷하게 놓인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 점에서 『소년이 온다』는 한강 작품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작가는 광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열 살 무렵 서울로 이사했고, 광주에 관한 이야기는 풍문으로만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오래 간직해 둔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작가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있었을까요.

 

광주민주화항쟁을 소재로 한 작품 가운데 기억할 작품으로는 임철우 작가의 『봄날』이 있습니다. 임철우 작가는 1980년 당시 전남대학교를 다니던 학생이었습니다. 그 역사적 현장에 작가도 함께 있었던 것이지요. 광주에 관해 말할 자유가 주어졌을 때, 있었던 일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쓴 것이 바로 이 작품이었습니다. 전체 5권 86장의 방대한 분량에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봄날』 같은 작품을 앞에 두고 생각할 때, 과연 광주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덧붙인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하는 의문이 한강 작가에게 있었습니다. 광주에 관해 쓰려면 써야 할 이유나 명분이 있어야 하겠고, 무엇보다 제대로 잘 써야 한다면 작가로서의 고민이 없을 수 없었겠지요.

 

확실히 『소년이 온다』는 광주를 소재로 한 이전 소설들과는 꽤 달라 보입니다. 어느 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소년이 온다』는 광주에 ‘관한’ 소설이라기보다는 광주를 ‘앓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광주를 생각하면 몸이 떨리고 아파 오는데, 광주를 앓고 있는 이 몸의 감각을 문장으로 쓴 소설이라고나 할까요. 이렇게 『소년이 온다』는 이전 소설과는 꽤 다르지만, 여전히 작가 고유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2

 

소설은 전체 7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계엄군이 전남도청으로 진입하기 직전까지의 며칠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인칭 시점으로 쓰인 것이 이채로운데요, 주인공 소년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는 작가의 의도가 담긴 서술 방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장은 계엄군이 쏜 총탄에 맞아 숨진 친구 정대의 이야기입니다. 죽어서 혼이 된 정대가 시체 더미 위에 놓인 자기 몸을 보고,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느끼는 여러 생각들을 풀어냅니다. 3장 이후는 현장에 함께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구성 방식이 조금 특이한데요, 각각 1985년(3장), 1990년(4장), 2002년(5장), 2010년(6장)을 현재로,1) 은숙, 한 사내, 선주, 동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7장은 동호에 관해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그 가족에게 허락을 구하기 위해 광주를 방문하는 작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80년 5월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2013년 현재로까지 점점 앞으로 나아갑니다. 소설에서 앞선 사건은 이후 사건의 원인이 되고, 이후 사건은 앞선 사건의 결과가 되곤 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인물은 긍정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원래 있었던 좋은 상태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계속 상황이 나빠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시간이 만들어 내는 변화를 통해 작가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감지합니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는 다릅니다. 장들 사이에 보통의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인과관계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1985년의 은숙은 1990년의 사내, 2002년의 선주 등과 어떤 관련도 맺지 않은 채 독립해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내나 선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특이한 구성과 관련하여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인물들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이 1980년 광주에 영원히 붙들려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가 1980년 5월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인물들은 모두 1980년 광주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1985년의 은숙은 1990년, 2000년, 그 이후까지도 계속 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고, 2002년의 선주 역시 그 전에도 그 후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라고 말입니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인물들 각자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과거이거나 미래일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는 계속 시간이 흘러가지만, 이들이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시간은 조금도 흐르지 않은 채 여전히 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인물들은 1980년 광주를 영원한 현재로 하여 살아갑니다. 과거에 붙들린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인물들은 하나같이 깊은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은숙은 동호를 데리고 같이 나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품고 살아갑니다. 때가 되면 허기가 느껴지고 입안에 군침이 도는 자신을 보며 치욕을 느끼기도 합니다. 죽은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텐데 말이지요. 진수는 어떤가요. 도청을 사수하겠다며 버티는 동호에게 진수는 결국 체념하듯 말했습니다. 적당한 때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고요. 그러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손들고 나가는 애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요. 하지만 그 말대로 했다가 동호는 죽게 되지요. 진수가 삶을 마감한 현장에는 동호의 시신이 담긴 그 사진이 놓여 있었습니다. 진수는 평생 그렇게 자책하며 살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살아갈 의지를 놓아 버린 것이겠지요.

 

『소년이 온다』표지, ⓒ창비

 

3

 

우리는 한강의 다른 작품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존재인지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소년이 온다』의 인물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제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폭력 앞에 노출된 이들의 영혼은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집니다. 진수는, 영혼은 유리 같은 것이라고, 깨지기 쉬워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데 그게 그만 깨져 버렸다고 말합니다. 진수와 같이 복역했던 사내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내는 그날 죽을 줄 알면서도 끝내 도청을 지키고 있었던 이유는 양심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양심은 비단 그의 몸 안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게서도 같은 종류의 양심을 발견했고, 보석 같은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양심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말입니다.

 

이들의 영혼을 파괴한 것은 군인들의 잔인한 폭력과 그 이후 이어진 가혹한 고문입니다. 작가는 이 참혹한 현장 속으로 독자를 이끕니다. 다수의 독자들이 1장 도중에 읽기를 그만둡니다. 총에 맞아 찢기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하여 부풀어 오르는 시신들에 관한 문장들을 읽어 내기 어려워서였을 테지요. 확실히 지나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과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로 과도한 것은 묘사의 수위가 아니라 이들 문장이 겨냥하고 있는 그 행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범죄는 너무 잔혹해서 차마 그에 관해 이야기할 엄두가 나지 않지만,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그 본질에 가 닿을 수 없습니다. 작가에게는 1980년 광주가 바로 그런 경우였을 것입니다.

 

한 가지 사실을 더 언급하고 싶습니다. 단지 국가 폭력으로만 광주를 다루려고 했다면, 어쩌면 이토록 잔혹하게 장면들을 묘사할 필요는 없었을지 모릅니다. 국가 폭력이라는 말이 1980년 광주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용어일 수는 있어도, 이 체로는 걸러지지 않는 것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국가가 명령하기는 했지만 이를 실행한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 인간이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4장의 사내는 묻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여서, 자신들은 다만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인가 하고 말이지요. 인간이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사내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이런 존재라면,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할까요. 사람들을 현장으로 불러낸 것은 그들의 양심이었습니다. 진수의 내면에 유리만큼이나 깨지기 쉬운 양심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또 사람을 고양시키는 선한 양심이 사내의 육체 안에 깃들어 있지 않았다면,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거리로 나서지 않았을 테고, 마지막 날까지 도청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처참하게 인간성이 파괴되는 일도 없었겠지요. 사내는 원래 뜻했던 바대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 있었을 테고요. 하지만 사태는 그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남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 줄 정도로 희생적이기도 합니다. 어느 쪽도 비인간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될 것인지는 선택이나 의지의 문제인 것일까요. 어쩌면 사내는 그렇게 질문을 던져 놓고 스스로 내기를 걸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선한 양심이 있다고 믿는 쪽으로요. 자신들이 겪은 일이 한낱 예외적인 사건은 아니라고 해도, 또 인간 속 어딘가에 잔인한 본성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여전히 양심의 소리를 거부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고 말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유일한 힘이라고, 자기 몸에 새겨진 흉터들이 바로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사내는 믿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사내가 날마다 싸우고 있다는 그 싸움의 본질이었다면 과한 해석이 될까요.

 

4

 

『소년이 온다』의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짊어진 채 살아갑니다. 살아남은 자에게는 살아서 할 일이 있다고 믿어야 살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한 예로, 선주는 무시로 동호의 환영을 봅니다. 그때마다 선주는 동호가 찾아오는 이유를 생각해 보곤 합니다. 책임을 물으려고 오는 것은 아닌지, 집에 가라고 한 번 더 채근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려고 오는 것은 아닌지, 왜 아직 살아 있는지 묻기 위해 오는 것은 아닌지, 살아남은 자로서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키기 위해 오는 것은 아닌지.

 

선주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살아남은 자로서의 의무였을 것 같습니다. 죽은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듯합니다. 노동 운동에 몸담고, 지금은 환경 단체에서 일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겠고요. 은숙은 출판사에서 일하며 편집을 담당했지요. 검열과에 다녀오는 일은 대부분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뺨 일곱 대를 맞은 후 하루에 한 대씩 잊겠다고 다짐하지만, 잊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에는 광주가 겹쳐 있지요. 그녀가 편집을 담당한 희곡집 내용처럼 죽은 이들을 위해 장례식을 치르는 것이 그녀가 자신에게 짊어지운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인물들은 이렇게 의무를 진 자로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정말 동호는 이런 의무를 지우기 위해, 제대로 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단지 그 이유로만 거듭 찾아오는 것일까요. 이 물음과 관련하여 저는 애초 동호의 마음에 있었던 미안함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동호가 도청에 남은 이유는 정대가 총에 맞았을 때 자기 혼자 도망쳤다는 사실이 못내 죄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자책하는 마음이 동호를 현장에 있게 만들었습니다. 현장에 남아 죽은 사람들을 돌보고, 작은 몸짓으로나마 저항하는 것 외에는 속죄하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은숙과 진수, 선주 같은 인물이 동호를 두고 마음에 생각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2장을 읽어 보면, 정작 정대는 동호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나와 함께 있었는데”라는 정대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은 원망이 아니라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만약 정말로 동호의 영혼이 선주를 찾아왔다면, 동호가 선주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도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5장 마지막 장면에서 선주는 병상에 있는 선배 언니를 찾아가 한 마디를 해 주려 합니다. “죽지 마. 죽지 말아요” 하고 말이지요. 어쩌면 이것은, 동호가 살아남은 이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이 아니었을까 하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5

 

광주민주화항쟁이라는 말은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광주는 복권되었습니다. 은숙이 그토록 바랐던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그러니 이제 광주를 기억하는 일을 그만 그쳐도 될까요. 공식적으로 1980년 광주는 민주화 항쟁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여전히 그와는 다른 생각으로 광주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의무를 조금은 더 지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소년이 온다』가 광주의 전모를 드러내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는 광주의 경험을 우리 몸으로 직접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소년이 온다』를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1) 소설에는 명확한 연도가 나오지 않지만, 인물의 나이나 1980년 광주와의 시간적 거리를 통해 해당 연도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영역본의 경우 각 장의 제목에 정확한 연도를 명기하고 있어 이를 반영하였습니다.

 

* <좋은나무> 글을 다른 매체에 게시하시려면 저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02-794-6200)으로 연락해 주세요.

* 게시하실 때는 다음과 같이 표기하셔야합니다.
(예시) 이 글은 기윤실 <좋은나무>의 기사를 허락을 받고 전재한 것입니다. https://cemk.org/26627/ (전재 글의 글의 주소 표시)

<좋은나무>글이 유익하셨나요?  

발간되는 글을 카카오톡으로 받아보시려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하여 ‘친구추가’를 해주시고

지인에게 ‘공유’하여 기윤실 <좋은나무>를 소개해주세요.

카카오톡으로 <좋은나무> 구독하기

 <좋은나무> 뉴스레터 구독하기

<좋은나무>에 문의·제안하기

문의나 제안, 글에 대한 피드백을 원하시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해주세요.
편집위원과 필자에게 전달됩니다.
_

관련 글들

2025.07.21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보고 교회 다니라고요?(정병오)

자세히 보기
2025.07.04

무식하게 두꺼운 책이 다 읽힌다: 옥성득의 『한국교회 첫 사건들』에 대한 서평(손승호)

자세히 보기
2025.06.23

내 안에 있는, 나를 해치는 것과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을까?―한강의 『희랍어 시간』 읽기(정영훈)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