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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에서 한중 관계를 두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일부 시민들의 반중, 혐중 시위가 이어지고 있고, 정부는 이에 대해 계속 경고를 보내고 있다. 이런 와중에 국내에 체류 중인 일부 중국인들이 중국 군복을 입고 한강 공원을 행진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런 일들은 양국 관계의 정상화에 힘쓰는 정치적 노력을 훼손하는 행동으로서 우려를 낳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에서 열린 APEC 회의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관계가 발전적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기독교인들이 반중·혐중 정서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본문 중)

 

허준(가명, 중국 선교사)

 

최근 우리 사회에서 한중 관계를 두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일부 시민들의 반중, 혐중 시위가 이어지고 있고, 정부는 이에 대해 계속 경고를 보내고 있다. 이런 와중에 국내에 체류 중인 일부 중국인들이 중국 군복을 입고 한강 공원을 행진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런 일들은 양국 관계의 정상화에 힘쓰는 정치적 노력을 훼손하는 행동으로서 우려를 낳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에서 열린 APEC 회의를 기점으로 두 나라의 관계가 발전적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기독교인들이 반중·혐중 정서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한국인이 왜 반중, 혐중을 하는가?

 

한국은 경제적으로 세계 10위권을 오가는 강국이 되었지만, 여전히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 국가 사이에서 두 국가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북한과 대치 중인 안보 현실 속에서 우리는 두 강대국과의 협력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운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미‧중 양국 정상의 리더십과 정책에 따라 큰 파도를 맞아야 한다. “미국이나 중국이 기침하면 한국은 감기에 걸린다”라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그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냉혹한 현실이며, 우리 국민들 또한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종종 강대국들을 향해 분노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논리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남의 나라를 먼저 침략한 적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 따르면 외세로부터의 크고 작은 침략을 900여 차례나 겪었고, 급기야 일본에게는 주권을 빼앗기는 아픈 역사까지 겪었다. 이러한 기억들 때문에 우리는 외세가 우리의 주권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개입하려 할 때, 참지 못하고 저항하고 분노하게 되는 것 같다.

 

냉철한 현실 인식과 다문화 사회의 도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냉철해야 하며, 감정적 반응을 넘어 양국 간에 엄연히 존재하는 내·외적 문제들을 직시해야 한다. 현재 한국은 심각한 인구 절벽에 직면해 있으며, 부족한 노동력과 인구의 공백을 다문화 이주민들이 채우고 있다. 2025년 8월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은 약 273만 명, 불법 체류자까지 포함하면 약 320만 명에 이른다. 이 중 중국인(홍콩인 포함)은 전체 외국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수가 무려 100만 명에 육박한다.

 

세계는 이미 글로벌화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었다. 이처럼 여러 민족들이 흩어져 살며 우리 곁으로 온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자 계획이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들을 향한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의 사명을 받게 되었다. 비록 과거에 우리는 많은 외세의 침략으로 고통받았던 나라였지만, 이제는 그런 과거의 기억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독교 정신과 사랑으로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그들을 안아 주고 품어 주는 것, 그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이고, 또한 우리 민족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선교적 난관과 우리의 자세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2012년 시진핑 주석 취임 이후 중국은 모든 종교는 국가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종교의 중국화”를 기치로 내걸고 외국 종교 세력, 특히 기독교 선교사를 ‘국가 안보 위협 요인’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많은 선교사가 추방되었다. 모든 종교를 국가 통제하에 두려는 이러한 탄압과 핍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중국 내의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에 유학 온 중국인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에는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제자훈련도 받던 학생들이, 이제는 본국의 기독교 박해 분위기로 신분 노출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으며, 교회에 나왔던 학생들도 부모의 반대 등으로 인해 더 이상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추방당한 중국 선교사들이 제주도에서 운영하던 중국인 신학교에 중국 공안 당국이 직접 찾아와 경고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국외에 나온 중국인들에 대해서도 감시의 눈길이 멈추지 않는 것이다.

 

물론 우리 곁에는 조선족을 포함해 많은 중국인들이 와 있으며, 그중에는 국가 보안 시설을 촬영하거나, 공공장소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의 마음이 무겁고 복잡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녀로서, 우리 시대에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의 삶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정치적 이해관계, 문화적 차이, 경제적 갈등을 넘어선 답을 성경 말씀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 답이 결코 ‘반중’이나 ‘혐중’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마태복음 18:21-22에서 용서의 한계를 묻는 제자에게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인류 역사 속에서 아무리 강한 제국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는 모두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제국들의 강함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제국들의 역사 속에서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민족들을 팔을 벌리시고 따뜻하게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전해야 하고, 우리가 그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해야 한다.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는 말이 있다. 작은 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져 결국 단단한 돌을 뚫는다는 말인데, 비록 작은 힘이지만 끈기 있게 노력하면 큰일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한 방울의 물이 계속해서 떨어져 돌을 깨뜨리듯이 사랑의 힘은 혐오보다 훨씬 더 강하다. 우리가 그들을 배척하고, 멸시하고, 혐오하면,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더 큰 분노로 결국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증오는 더 큰 증오를 낳고, 분노는 더 큰 분노를 일으킬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주 예수님의 능력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소망하며 반복해서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사랑으로 우리 가까이에 온 이웃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성숙한 시민 의식과 당당한 외교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가만히 참기만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길거리에서 소리치며 위협하는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그 대신에 중국인에 의해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가 공식적 발표를 통해 발언하거나, 시민사회에서는 중국 관계 기관이나 선교 단체, 사회 문화 단체 등의 성명 발표나 주한 중국대사관에 서한을 보내는 등의 성숙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나 선교 단체를 통해 중국인 학생들이나 노동자들과의 교류의 기회를 만들어 상호 이해를 넓히는 노력도 필요하다.

 

또한 정부는 저자세 외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부가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당당하게 요구할 것은 요구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일 때, 국민은 안심하고 정부를 신뢰할 수 있다. 과거 특정 국가나 인종에 대한 혐오 표현을 규제하는 법안이 발의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자칫 중국 등 특정 국가에 대한 건전한 비판까지 처벌하는 ‘역차별 법안’이 될 수 있다며 분노했다. 또한, 제주도 무비자 입국 문제나 외국인의 운전면허 취득 문제 등 실생활과 밀접한 사안에 관한 법을 개정할 때는 국민적 공감대와 동의가 필요하다. 정부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태도로 대한민국에 정말로 이익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 모색해야 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세상의 모든 민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이며, 국적과 민족을 떠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두가 한 가족이며 형제이다. 하나님 나라 안에는 국경도, 차별도, 반중도, 혐중도 없다. 비록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고 추구해야 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진리와 사랑의 균형을 현명하게 추구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와 중보를 통해 변화될 중국을 소망하며, ‘반중’, ‘혐중’이 아닌 ‘복음적 사랑’의 길을 끝까지 함께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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