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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 어르신이 필요했던 이유1)(기민석)

 

어르신은 성읍을 넘어 왕궁 정치에도 효과적이었다. 왕 곁에서 중요한 정책의 방향을 조율하고 결정의 무게를 가늠해 주었다. 르호보암의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 준다(왕상 12). 북쪽 백성이 세금과 노역을 줄여 달라고 요청했을 때, 원로 장로들은 백성의 짐을 덜어 주라고 충언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젊은 신하들의 혈기 가득한 조언을 따랐고, 그 선택은 결국 나라를 둘로 갈라놓았다. (본문 중)

 

기민석(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구약학)

 

공동체는 생명체와 같다. 손가락 끝에 가시가 박혀도 온몸이 저리듯, 한 구성원의 고통은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고대 이스라엘도 그러했다. 기원전 587년, 나라의 멸망과 유배의 고통을 겪은 후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통렬히 반성했다. 나라가 무너진 이유는 바벨론의 군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경외를 망각한 지도자가 권력을 남용하고 공동체 일원의 아픔을 외면했기 때문이었다고.

 

최근 매체를 통해 보고 듣는 국감의 장면은 마치 내 손가락 끝에 가시를 박는 듯하다. 권한을 부여받은 자들이 은밀하게 자행한 거짓, 위법, 탈법으로 인해 누군가는 처절하게 신음했기 때문이다. 통렬한 반성이 요구된다. 이 나라가 신정정치 국가가 아니니 지도자에게 하나님 경외를 요구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그들의 경솔한 언행은 ‘하늘의 분노’를 사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21세기 우리 사회를 고대의 구약성서를 통해 조명하는 것이 부적절할까? 한 가정의 아버지가 아들을 돌로 쳐 죽이려고 성문으로 끌고 가는 신명기의 내용에 경악하지만, 아이의 시신이 토막 난 채 냉장고에서 발견되었다는 지금의 뉴스도 그에 못지않다. 왕이 많은 군마와 은금과 아내를 두지 못하게 한 신명기의 ‘왕의 법’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정황에도 적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구약성경의 갖가지 사건과 법을 들여다보면 지금 나의 마음에 남는 단어가 하나 있다. ‘어른’이다. 신명기 21:18-212)은 반항하는 아들을 돌로 치라는 법이 아니라, 가부장의 폭력을 ‘장로’의 권위 아래 두어 통제하려는 제도적 장치였다. 장로를 뜻하는 히브리어 ‘자켄’은 ‘늙은’ 또는 ‘수염’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우리말로 쉽게 풀면 ‘어르신’에 가깝다. 이들은 경험과 연륜으로 공동체의 전통과 질서 유지를 책임졌던, 옛 가부장 사회의 어르신이었다.

 

오늘날에도 가정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현실을 생각하면, 고대 이스라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가장의 폭력이 얼마나 심각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가부장은 가족의 생사까지 좌우할 힘을 가졌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입다는 딸을, 유다는 며느리를 처분할 권한이 있었다. 반면 신명기는 아버지가 아들을 마음대로 처벌하지 못하도록 그를 성읍 장로 앞에 데려가도록 규정한다. 분에 겨워 아들을 해치려는 아버지가 흰 수염이 성성한 어르신들 앞에서는 함부로 날뛸 수 없었을 것이다. 되레 “네놈도 어릴 적에 똑같았잖아!” 하고 한소리 들었을 것이다. 장로는 가부장의 충동적 분노를 제어하고, 가정 내 폭력을 공적 판단 아래 두는 완충 장치였다. ‘어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존재다.

 

 

장로는 고대 이스라엘의 도피성 제도 속에서도 폭력을 억제하고 생명을 보호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민수기 35장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에게 도피성으로 피할 권리를 부여한다. 도피성에 간신히 도달한 도망자는 먼저 그 성읍의 성문 어귀에 서서, 그곳 장로들에게 자신의 사건을 설명해야 했다(수 20:4). 고의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장로는 도망자를 도피성 안으로 급히 피신시킨다. 복수자가 뒤쫓아 오기 때문이다. 이 긴박한 순간에 장로들은 삶의 경륜과 지혜로 침착하게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복수자는 “마음이 열에 받쳐서” 도피하는 자를 성급하게 죽일 우려가 있다(신 19:6). 피가 거꾸로 솟는 복수자를 붙잡아 매는 사람도 장로였다. 아무리 분노가 끓어도 성문 앞에서 휜 수염의 어르신들 몇 분이 묵묵히 서 있다면 자중해야 했을 것이다. 장로는 복수자의 격노를 막아서는 ‘에어백’이었다. 반면 살인의 고의성이 입증되면, 도망자가 살던 성읍의 장로를 통해 그를 복수자에게 넘긴다(신 19:11-12). 어르신들은 또 다른 희생을 막기 위해 보호해야 할 때는 보호하고, 공동체의 정의를 위해 넘겨야 할 때는 넘기는 분별력과 권위가 있었다.

 

어르신은 성읍을 넘어 왕궁 정치에도 효과적이었다. 왕 곁에서 중요한 정책의 방향을 조율하고 결정의 무게를 가늠해 주었다. 르호보암의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 준다(왕상 12). 북쪽 백성이 세금과 노역을 줄여 달라고 요청했을 때, 원로 장로들은 백성의 짐을 덜어 주라고 충언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젊은 신하들의 혈기 가득한 조언을 따랐고, 그 선택은 결국 나라를 둘로 갈라놓았다. 이 사건은 ‘경륜과 지혜’ 대 ‘충동과 오만’의 충돌이었다. 직접 살아보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데이터와 예측력을 미안한 말이지만 직접 살아보지 않은 젊은이는 아무리 유능해도 가질 수 없다.

 

신명기 17장은 왕에게 과도한 군사력, 은과 금, 많은 아내를 금하고, 율법서를 곁에 두고 평생 읽으라고 명한다. 왕을 법 안에 놓아 공동체의 생명과 정의를 지키려는 자정 장치다. 그러나 그 법이 실제로 힘을 발휘하려면, 왕 앞에서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는 어르신의 존재가 필수였다. 제사장과 신하, 그리고 왕궁의 장로가 곧 왕의 어른이었다. 권력의 폭주를 막고 공동체의 안녕을 지키던 가장 탁월한 정치 기제였다.

 

고대 사회에서 어른은 사회의 생존을 지탱하는 핵심이었다. 학교도, 도서관도, 검색창도 없던 시절, 사회 발전의 동력인 정보의 축적과 전달은 전적으로 사람, 그중에서도 오래 살아 많은 것을 본 어른의 몫이었다. 옆 마을에 고래를 본 어른이 있다 하면 직접 찾아가 뵙고 듣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 정보를 얻을 수 없던 시대였다. 어른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고 ‘살아 있는 검색 엔진’이었다. 젊은이가 풀지 못하는 문제를 어른의 경험이 때로는 정확히 예측했고, 공동체는 그 지혜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어른의 역할은 급격히 약해졌다. 인터넷과 정보화 기술은 어른이 지녔던 지식의 우위를 무너뜨렸다. 검색 한 번이면 5분 안에 대부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어른의 경험은 더 이상 유일한 판단 근거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기술만이 아니다. 절제와 책임을 잃은 어른에 대한 비판은 이미 고대에도 있었다. 성문 앞에서 재판을 맡았던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뇌물을 받고 가난한 이들을 억울하게 했고, 예언자들은 그들을 신랄하게 꾸짖었다. 그들의 타락은 정의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어른의 권위는 시대가 빼앗는 것만은 아니다. 스스로 무너뜨리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어린이에게 달렸다”는 말은 절반만 옳다. 미래는 어린이가 살아갈 세상이지만, 그 미래를 마련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어른에게 있다.

 

골목 어귀 구멍가게 아저씨, 새벽마다 빗자루 들고 학교 앞을 쓸던 노인, 괜히 마주치면 허리가 먼저 굽혀지던 교회 장로나 동네 큰집 어른들. 그들에게는 직함보다 먼저 세월이 주는 무게와, 남의 집 사정까지 품어 안는 어른다운 기운이 배어 있었다. 싸움이 나면 슬쩍 불러 타이르고, 화난 아버지 앞을 가로막고, 말 못 할 집 사정을 조용히 챙겨 주던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어르신’이라 불렀다. 따뜻하지만 함부로 넘을 수 없는 선, 그게 권위였다.

 

교사에게 빗자루를 휘두르며 조롱하는 학생들, 그 장면을 촬영해 웃으며 인터넷에 올리는 손가락들, 그 곁에서 누구도 “야, 그만해라” 한마디 하지 못하는 교실과 복도. 어른이 실종되어 법과 규정만 늘어난다. 인공지능이 최고의 조력자가 되어 인생 상담도 해주는 시대이지만, 우리가 구약의 시대보다 더 문명화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도 분명 어르신이 있었다. 정치인들도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원로를 찾아가 실마리를 얻는 것이 자연스러운 전통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들을 ‘꼰대’라 부른다. 어르신을 잃기도 했지만, 어르신 스스로 도태된 측면도 있다. 퇴임한 대통령, 장관, 판사와 검사, 은퇴한 목사, 교수, 선생님이 만든 세상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1) 이 글은 저자의 다음 저서의 일부를 편집 개정한 것이다: 기민석 <구약의 민주주의 풍경>(홍성사, 2017).

2) “18어떤 사람에게 고집이 세고 반항하며 아버지의 말이나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는 아들이 있다고 합시다. 부모가 꾸짖어도 듣지 않는다고 합시다. 19그러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를 붙잡도록 하십시오. 그러고는 그 도시의 원로들에게 데려가도록 하십시오. 그가 사는 곳의 성문으로요. 20그러고는 도시의 원로들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하십시오. ‘얘는 우리 아들입니다. 고집이 세고 반항하며 우리 말을 듣지 않습니다. 천박하며 술꾼입니다.’ 21그러면 그 도시의 남자들이 모두 그에게 돌을 던져서 그를 죽이도록 하십시오. 이처럼 나쁜 짓은 그대 이스라엘 가운데서 뿌리 뽑아 버리도록 하십시오.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신명기 21:18-21, 새한글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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