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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단순한 도구(tool)나 기술(skill)이 아니다. 언어는 ‘세계와 타인을 해석하는 관점’을 담아내며, 타자와 관계를 맺고 책임지는 ‘윤리적 행위’이다. 그런데 학습자가 언어의 과정보다 결과에만 몰두하게 되면, 언어교육이 지닌 ‘인간적·공동체적 성찰의 힘’은 점점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본문 중)

 

김규미(세명대학교 외국어학부 교수)

 

필자는 AI라는 말을 들으면 오래전 보았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A.I. Artificial Intelligence>(2001)가 떠오른다.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는 로봇 소년이 등장하고 사람처럼 말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며, “정말 그런 세상이 올까?” 생각하고 그저 과장된 공상처럼 느껴져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지금의 대학 강의실을 바라보면, 그때의 상상이 이미 현실이 된 듯한 순간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학생들은 AI 튜터와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발음과 표현을 교정받고, 심지어 ChatGPT에게 에세이 초안까지 받아 온다. 기술은 너무도 조용하게, 그러나 너무도 빠르게 교실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얼마 전 한 대학에서 발생한 ‘챗봇 기반 부정행위’ 사례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가 마주한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학생 일부가 AI가 작성한 에세이를 거의 수정 없이 제출했고, 교수조차 처음에는 이를 식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규정 위반이 아니라, 학습의 윤리성과 공동체의 신뢰가 기술 앞에서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AI가 가져온 긍정적 변화도 분명하다. 언어 교육에서 AI의 영향은 특히 두드러진다. ChatGPT 나 AI 튜터는 학생에게 24시간 개인 과외 선생님 같은 존재가 된다. 문장을 입력하면 즉시 문법을 교정해 주고, 더 자연스러운 표현을 제안해 주며, 학습자의 수준에 맞춘 대화 연습까지 제공한다. 단기간에 언어 능력이 향상되는 긍정적인 효과도 분명하다. 학생들은 이전보다 훨씬 쉽게 영어 글쓰기와 말하기에 접근하고, 교실 밖에서도 학습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기술이 가져온 편리함 속에도 우리가 신중히 바라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 즉, AI는 언어를 ‘대행’하지만 학습의 본질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언어 학습의 본질과 AI 기술

 

언어 교육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소통을 배우는 과정이다. 언어 교육 연구자들은 오래전부터 ‘언어는 상호작용 속에서 습득된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롱(Long)의 ‘상호작용 가설’, 스웨인(Swain)의 ‘산출 가설’, 크라센(Krashen)의 ‘정의적 여과 가설’은 모두 언어 습득이 의미를 주고받고, 오류를 자각하고, 이를 수정하고, 다시 시도하는 반복적 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즉, 언어는 정답을 전달받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경험을 통해 습득된다.

 

그러나 AI 기술은 이러한 복잡하고도 중요한 언어 학습의 본질적 과정을 단 몇 초로 축약해 버린다. 문장을 쓰기도 전에 정답이 먼저 제시되고, 시행착오를 경험할 기회는 줄어들며, 학습자가 스스로 언어를 구성하고 조율하는 시간은 점차 사라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학생들의 불안이 나타난다. 실제로 몇몇 학생은 “AI 없이 글을 쓰는 것이 불안하다”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는 편리하지만, 학습자 개인이 시행착오를 통해 조금씩 정교해져 가야 할 ‘중간언어’(interlanguage), 즉 ‘학습자의 고유한 언어 발달 단계’가 충분히 성장하기도 전에 완성된 표현을 먼저 던져 주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언어 습득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과정, 즉 스스로 탐색하고 실수하고 수정하고 의미를 재구성해 가는 경험을 잃는다. 학생들이 이전보다 쉽게 영어 읽기·쓰기·듣기·말하기에 접근하고 있음에도, 정작 언어를 자신의 사고와 연결하는 “언어적 성찰 과정”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AI가 제공하는 문장은 정확할 수 있다. 그러나 왜 그 문장을 쓰는지, 그 표현이 어떤 맥락과 의도·관점을 담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형성하는지를 사고하는 과정은 기술이 대신해 줄 수 없다.

 

언어는 단순한 도구(tool)나 기술(skill)이 아니다. 언어는 ‘세계와 타인을 해석하는 관점’을 담아내며, 타자와 관계를 맺고 책임지는 ‘윤리적 행위’이다. 그런데 학습자가 언어의 과정보다 결과에만 몰두하게 되면, 언어교육이 지닌 ‘인간적·공동체적 성찰의 힘’은 점점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AI가 언어를 빠르게 ‘대행’해 주는 시대일수록, 언어 교육이 지켜야 할 가치는 더욱 선명해진다.

 

우리가 지켜야 할 언어 교육의 핵심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교육 체제가 이러한 변화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현실이다. 학교는 AI 활용을 장려하면서도 동시에 남용을 막아야 하는 이중적 상황에 놓여있고, 평가 기준과 사용 지침은 여전히 모호하다. 교사 연수, 학습자 윤리 교육 등은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채, 많은 책임이 교사 개인에게 전가되고 있다. 이러한 간극은 결국 교육 공동체의 신뢰를 약화시키고, 학생은 “무엇이 정당한 학습인가?”라는 질문을 두고 혼란을 느낀다. 결국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공유된 기준과 공동체적 합의가 부재한 현실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언어 교육의 본질은 무엇인가? AI시대의 언어 교육은 단순히 기술을 활용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기술의 도움 속에서도 인간이 언어를 통해 성장해야 하는 이유를 되묻는 교육, 바로 그 본질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래서 AI 시대 언어 교육이 포기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다. 이는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언어가 인간의 사고·관계·윤리 속에 형성된다는 본질과 관련된 핵심 가치들이다.

 

첫째, 질문을 만드는 능력이다. 학생이 AI에게 무엇을 묻는가가 사고의 수준을 결정한다. 좋은 질문은 깊은 사고에서 나오며, 이 질문은 ‘언어적 성찰’을 전제로 한다. AI가 답을 줄 수는 있어도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능력은 대신할 수 없다.

 

둘째, 비판적 언어 의식(critical language awareness)이다. AI가 제시한 답변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놓인 맥락·의도·관점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언어는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세계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셋째, 상호작용과 공동체적 경험이다. 언어는 함께 말하고, 듣고, 응답하는 과정에서 생명을 얻는다. AI는 대화를 흉내 낼 순 있지만 ‘다른 사람의 말 앞에 머무는 경험’ 그리고 그 안에서 관계를 형성해 가는 과정은 결코 대신할 순 없다.

 

넷째, 책임 있는 언어 사용의 윤리다. 언어는 관계를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AI를 활용하더라도, 타인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태도, 자신의 말과 글에 대해 성찰하는 윤리적 감수성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교육은 결국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보다 ‘어떤 마음으로 말할 것인가’를 배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AI 기술 시대의 언어 교육, 어디로 향해야 할까

 

교육의 문제는 결국 사람과 공동체의 문제다. AI 시대의 언어 교육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기술의 속도나 효율성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어떤 인간을 길러내고자 하는가?’라는 오래된 물음이다. 또한 ChatGPT는 우리에게 빠른 정답을 줄 수 있지만, 서로의 말과 삶을 이해하기 위해 머무르는 시간, 실수하면서도 함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말과 글을 통해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은 결코 대체할 수 없다.

 

영화 속 로봇 소년은 인간이 되고자 꿈꾸었지만, 오늘의 AI는 인간의 언어를 흉내 내면서도 결코 ‘관계의 깊이’에는 닿을 수 없다. 언어를 통해 관계와 의미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고유한 경험은 여전히 우리 손에 남아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묻는다.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언어 교육을 통해 어떤 인간을 길러내고자 하는가?’ 이 질문 앞에 진지하게 서는 것, 이것이 AI 시대에 우리가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이며, 교육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책임이자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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