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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홀 선교사는 물론이고 그의 아들 셔우드 홀에 이르기까지 이 집안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애정은 넘쳐났습니다. 셔우드 홀 선교사는 1932년부터 결핵 퇴치를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만든 일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실은 일제 강점기 중에도 매년 한국의 전통문화를 그림으로 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단순히 한국의 문화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은연중에 한국의 정치적‧민족적 독립을 지지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본문 중)
손승호(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 사무국장)
로제타 홀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 9. 19. – 1951. 4. 5.)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제법 유명한 선교사입니다. 영국계 미국인인 로제타는 188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다가 1887년 의료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The Women’s Medical College)에 입학하여 1889년 의사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정동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 의료 기관인 보구여관의 2대 원장으로 1890년 내한하게 됩니다.
1891년에는 약혼자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도 선교사로 내한합니다. 이듬해 두 사람은 서울에서 결혼을 하고 평양으로 이주해 선교사로 활동합니다. 하지만 1894년 청일 전쟁의 부상병을 치료하던 제임스가 이질에 걸려 그만 사망합니다. 아직 신혼인데 말이죠. 낙심한 로제타는 두 살 된 아들과 박에스더 부부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동행한 박에스더가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됩니다. 미국에서 로제타는 남편 제임스를 기념하기 위한 병원을 설립할 기금을 모아 한국에 보냅니다. 그 기금을 바탕으로 1897년 2월 평양에 기홀병원(홀 선교사 기념 병원)이 설립됩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로제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이후 35년간 한국의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합니다.
로제타는 서양 의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피부 이식을 거부하는 조선인 화상 환자에게 자신의 피부를 떼어 줄 만큼 헌신적인 의사였습니다. 그리고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설립하면서 한국의 여성 의사 양성에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로제타를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역시 한국 최초로 맹아와 농아를 위한 특수 교육을 실시한 것입니다. 1894년 평양에서 시각 장애인인 오봉래에게 점자를 가르친 적이 있었던 로제타는, 남편의 사망으로 일시 귀국했을 때 뉴욕 맹인 교육 학원에서 ‘뉴욕 포인트’ 점자를 배웁니다. 그리고 1898년 다시 평양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면서 기름 바른 한지에 바늘로 점을 찍어 만든 한글 점자 교재를 만들고 오봉래를 가르쳤습니다. 머리가 좋았던 오봉래는 이후 일본 유학까지 마치고 한국의 첫 특수 교사가 됩니다. 그리고 이 흐름이 평양맹학교 설립으로 이어지고, 미국북감리회 선교부는 로제타를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합니다. 로제타 홀은 1910년에는 청각 장애인을 위한 농아 학교를 개교하였고, 1914년에는 평양 모란봉에서 동아시아의 전문가들을 모아 국제회의를 개최하여 특수 교육을 위한 국제 연대의 길을 열기도 합니다. 이런 행적을 보면, 그는 사이즈가 다르다고 해야 할지, 보법이 다르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굉장한 사역들을 개척합니다.
오랫동안 한국을 위해 헌신한 로제타 홀은 1933년 안식년 휴가로 귀국한 후 1935년 고향에서 선교사 은퇴를 합니다. 그리고 85세의 나이로 1951년 4월 뉴저지의 은퇴 여선교사 안식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현재 그의 무덤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혀 있는데요. 그의 남편과 아들 부부, 딸, 손자가 모두 양화진에 묻혀 있습니다.
홀 선교사의 한국 사랑
로제타 홀 선교사는 물론이고 그의 아들 셔우드 홀에 이르기까지 이 집안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애정은 넘쳐났습니다. 셔우드 홀 선교사는 1932년부터 결핵 퇴치를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만든 일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실은 일제 강점기 중에도 매년 한국의 전통문화를 그림으로 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단순히 한국의 문화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은연중에 한국의 정치적‧민족적 독립을 지지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래에 소개해 드리는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의 문화유산은 로제타 홀이 조선의 국권 피탈을 얼마나 가슴 아파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유물입니다.

이 엽서는 로제타 홀이 1906년 9월 12일에 제물포(현 인천)에서 쓴 것으로 담배 피우는 지게꾼의 사진을 활용한 엽서입니다. 제가 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을 대리하여 인터넷 경매에 참여해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낙찰받은 것입니다. 저의 그 영웅적이었던 눈치 싸움에 대해 이야기해 드릴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경매 실력은 형편없어서 입찰 경쟁이 붙으면 대부분 졌는데 이것은 다행히도 건져 냈습니다. 이 엽서의 내용을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위) 9월 12일, 한국의 제물포 – 영국 제독 환영 행사를 기념하며. 한국은 이 행사에 빠져 있다. (Sept. 12th Chemulpo, Korea — To commemorate the reception of the British Admiral. Korea is not in it.)
(왼쪽) 영국 국기와 일본 국기가 정확히 동등하게 교차하며 멋지게 내걸렸다. 한국 국기는 볼 수 없다. (Great display of British and Japanese flags crossed exactly even. No Korean flag to be seen.)
(오른쪽) 하늘도 종일 울었다(비가 내렸다). 왜일까? 이 광경을 지켜본 슬픔 때문일까? (The heavens wept all day. Why? Can it be from grief at the sight.)
이 내용에 따르면 1906년 9월에 제물포에 영국 제독이 왔었고, 그를 환영하는 연회가 열렸습니다. 1906년이면 조선이 을사늑약(1905년) 체결로 외교권은 빼앗겼지만, 아직 국권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던 때입니다(한일 강제 병합은 1910년에 일어납니다). 하지만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떤 연유로 영국 제독의 환영 연회에 유니언 잭과 일장기만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로제타 홀은 그 모습 속에서 몰락해 가는 조선을 느끼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래서 종일 내리는 비를 보며 하늘도 울고 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로제타 홀이 자신의 선교지인 한국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지금 이 엽서는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의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 기념 기획 전시인 “to 조선, from 한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전시는 내년 6월까지 진행되므로 혹시 실물을 보시고 싶은 분들은 전시 기간에 꼭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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