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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트의 만찬』의 렌즈로 보면,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심은 아낌없는 ‘낭비’의 절정이다. 하나님은 합리적 계산이나 이해타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역하며 세상을 망가뜨린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 귀하고 세상 전체보다 더 귀한 당신의 아들을 ‘허비하듯’ 내어놓으셨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바베트의 만찬』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로도 알려진 노르웨이 작가 이자크 디네센의 대표 단편이다. 이야기는 19세기 중반, 노르웨이의 험준한 산과 깊게 팬 피오르 사이에 자리한 작은 마을 베를레보그에서 시작된다.
베를레보그의 두 자매
마을에는 나이 든 두 자매 마르티네와 필리파가 살고 있다. 이들은 한때 지역에서 존경받던 루터파 목사의 딸로, 아버지의 신앙과 삶을 이어 금욕적이고 검소한 삶을 살아왔다. 그들의 아버지가 생전에 성경을 가르치며 공동체를 이끌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신도들은 하나둘 늙어가고 공동체는 점차 쇠락한다. 두 자매는 남은 노인 신도들을 돌보며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소박하고 경건한 일상을 이어간다.
겉보기엔 평생 잔잔한 삶이었지만, 두 자매에게도 마음을 흔드는 순간이 있었다. 언니 마르티네는 젊은 장교 로렌스 로벤히엘름의 관심을 받았다. 장교는 우연히 마을에 들렀다가 마르티네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주 찾아왔지만, 끝내 고백하지 못한 채 한 달 만에 떠났다. 동생 필리파는 우연히 마을을 방문한 유명 가수 아실 파팽으로부터 천부적인 목소리를 인정받는다. 잠시 노래 수업을 받기도 했으나, 파팽의 돌발적 행동을 계기로 수업을 중단하고 그를 돌려보낸다.
두 인연은 자매의 삶을 겉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넓은 세상으로 향할 문이 열릴 듯하다 닫힌 사건 정도였지만, 그 만남들은 자매의 마음 깊은 곳에 조용한 자국을 남긴다.
바베트, 정착하다
파팽이 왔다 간 지 15년이 지난 6월의 비 내리는 어느 날 밤, 한 프랑스 여인이 자매의 집 문을 두드린다. 그녀의 이름은 바베트. 프랑스 내전의 혼란 속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고 홀로 도망쳐 온 난민이었다. 그녀는 과거 자매의 집을 찾았던 파팽이 써준 소개 편지 한 장을 들고 있었다. 두 자매는 신분도 과거도 알 수 없는 이 여인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려보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베트는 살림을 맡아 자매와 함께 살아가기 시작한다.
바베트 덕분에 투박했던 식사가 정갈해지고, 자매가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준비하던 음식도 한결 풍성해진다. 어느새 바베트는 자매의 집과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그렇게 12년이 지난 어느 날, 바베트는 1만 프랑짜리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자매는 그녀의 행운을 축하하면서도, 큰돈을 손에 쥔 바베트가 곧 떠나리라 생각해 마음이 심란해진다. 죽은 아버지의 100번째 생일까지만 함께 있어 달라고 청하고 싶지만, 차마 말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바베트가 먼저 부탁을 한다. 자매의 아버지 목사의 100번째 생일을 위한 만찬을 자신이 직접, 자기 돈으로 준비하고 싶다는 것이다. 평생 남에게 부담을 준 적 없는 자매는 당황하지만, 그 부탁은 바베트가 12년 만에 처음으로 한 요청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부자이기도 했다. 자매는 마지못해 허락한다.
만찬 준비
만찬 날이 다가오면서 베를레보그에는 낯선 물건들이 도착하기 시작한다. 한 수레나 되는 술병, 엄청나게 크고 생김새도 흉측한 거북을 시작으로 프랑스에서 배로 실려 온 정체 모를 식재료들. 자매와 성도들은 불안하다. 하지만 점잖은 그들은 설령 개구리나 달팽이가 나온다 해도 음식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그즈음, 젊은 시절 마르티네에게 연정을 품고도 고백하지 못했던 장교 로벤히엘름이 성공한 장군이 되어 마을을 다시 찾는다.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마음 한구석의 허전함을 지우지 못한 그는, 이번만큼은 만찬에서 제대로 대화를 주도하리라 마음먹는다.
마침내 약속된 날, 열두 명의 손님이 자리에 앉고 만찬이 시작된다. 와인 잔이 채워지고 음식이 하나씩 나온다. 장군은 곧 깨닫는다. 이 음식들은 시골 잔치에 나올 법한 것들이 아니라, 자신이 젊은 시절 파리에서 경험했던 최고급 요리라는 사실을. 놀랍게도 이 작은 마을에서 그 맛을 다시 경험하다니. 장군은 요리가 새로 나올 때마다 정체를 알아보고 감탄하며, 어느새 요리를 해설하는 역할을 한다. 그의 안목 덕분에 그날의 식사가 진정한 ‘만찬’임이 드러난다.

만찬이 가져온 것
그러나 바베트의 만찬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대부분의 손님은 알지 못한다. 요리의 이름도, 재료의 값어치도 전혀 모른다. 장군이 감탄하며 요리의 이름을 말해도 그저 멍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할 뿐이다. “그럼요, 물론이지요. 아니면 뭐겠습니까?”
하지만 미식가 장군만이 아니라, ‘맛알못’ 손님들 또한 그 진귀한 음식의 영향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그들은 그냥 식사를 하고 있을 뿐인데, 굳어 있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오래된 갈등이 녹아내린다. 서로를 향한 서운함이 사라지고, 오해가 풀리고, 어느새 마음이 열린다.
이 장면은 은총이 반드시 ‘정확한 이해’ 위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몰라도 누릴 수 있는 것이 은총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받은 것을 규정하고 개념화하지 못하면,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긍정적이지만 막연한 느낌 정도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장군이 일어나 해설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
어리석고 멀리 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은 거룩한 은총이 유한하다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우리의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은총이 무한함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 여러분, 은총은 우리가 그것을 믿고 기다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을 원합니다.1)
장군의 연설(이라 쓰고 ‘설교’라 읽는다) 덕분에 손님들은 자신들이 지금 은총을 누리고 있음을 자각한다.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 순간 식탁 위에 놓인 음식, 분위기, 대화, 기억, 화해의 장면들을 ‘은총’이라는 렌즈로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말로 “수많은 작은 후광이 하나로 모여 천상의 광채처럼 집안을 채우는” 장면이 펼쳐진다. “시간이 영원 속으로 녹아드는” 장면이다.
은총,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아낌없는 낭비
알고 보니 바베트는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였다. 왕족과 귀족을 위해 요리하던 솜씨를 아낌없이 발휘해 시골 마을의 12명에게 만찬을 내놓았던 것이다. 요리 이름도, 재료도 제대로 알아맞히지 못할 사람들이었지만 그녀는 완벽한 식탁을 준비했다. 자격 없는 이에게 주어진다는 은총의 중요한 특징이 그대로 구현된 순간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바베트가 복권 당첨금 1만 프랑을 전부 만찬에 쏟아부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솜씨를 평가할 능력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해. 이쯤 되면 묻게 된다. ‘이건 낭비가 아닌가? 귀한 재능과 재물이 허비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 바베트의 만찬은 지독한 낭비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낭비였다. 그 낭비를 통해 자그마한 공동체는 화해와 은총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바베트의 낭비가 없었다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을 시간, 선물이었다.
베를레보그 사람들은 운도 좋지, 하며 부러워하다가 문득 깨닫는다. ‘나 또한 오래전부터 이런 아낌없는 은총 속에서 살아왔구나.’ 창조 세계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어진 선물이며, 우리가 성장하는 동안 부모님과 여러 어른들이 내어준 시간과 사랑 역시 그렇다. 우리는 그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하고 때로는 배은망덕하게 굴지만, 그런 망각과 뻔뻔함을 넘어서는 셀 수 없는 은총이 지금까지 우리를 붙들어왔다.
아들을 보내심과 하나님의 만찬
『바베트의 만찬』의 렌즈로 보면,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심은 아낌없는 ‘낭비’의 절정이다. 하나님은 합리적 계산이나 이해타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역하며 세상을 망가뜨린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 귀하고 세상 전체보다 더 귀한 당신의 아들을 ‘허비하듯’ 내어놓으셨다.
인간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서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낭비가 아니라 투자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위해 인간으로 오셨을 때, 자격 없는 인간이 존귀함을 입었다. 사랑의 낭비가 인간을 귀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베트의 만찬』에 비추어 이 선물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우선 베를레보그 사람들이 만찬을 받아먹은 것처럼, 우리는 성육신의 사건이 다 이해되지 않아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육신은 인간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한 신비이기에, ‘완전히 알고 나서 받겠다’고 생각하면 영영 받지 못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이야기 속의 장군처럼 이 사건의 의미를 밝혀주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은총을 해설해 주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어떤 가능성을 열지 누가 알겠는가. 베를레보그 자매의 집에서 일어났던 화해와 감사의 기적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살짝 이루어질지.
낭비하는 삶
딱 받은 만큼만 주리라.
딱 돌려받을 만큼만 쓰리라.
손해 보지 않으리라.
낭비하지 않으리라.
둘러 가지 않으리라.
이런 마음이 필요한 때도 있다. 그런 상황이 있고, 그래야 하는 관계도 있다. 그러나 모든 상황, 모든 관계를 이렇게 대하면 곤란하다.
부모님과 어른들이 그처럼 따져가며 우리를 대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자랄 수 있었다. 누군가의 ‘허비하는 은총’이 없다면, 더 약한 누군가는 성장도, 특별한 경험도, 회복도 기대하기 어렵다. 허비하는 은총을 통해 성장한 사람은 또 다른 자리에서 누군가를 위해 허비하는 삶을 살게 된다.
하느님의 길은 사람의 눈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바다와 눈 덮인 산도 가로지른다.2)
두 자매의 아버지가 남긴 말이다.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길은 어떤 장애물에도 막히지 않는다는 의미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가 어떤 방식으로 펼쳐질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고백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서 젊은 시절 두 자매가 맺었던 인연들도 그러했다. 겉보기에는 아무 결실 없이 사라진 만남처럼 보였지만, 파팽과의 인연은 바베트라는 선물로 이어졌고, 로벤히엘름 장군과의 인연은 만찬의 의미를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시간들 또한 은총의 길 위에 놓여 있었다.
우리가 새로 맞이한 이 한 해가 바라는 일이 다 이루어지는 해가 되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삶의 이곳저곳을 가로지르는 하나님의 길 위에서 “자비와 진리는 하나가 되었고, 정의와 축복이 입맞춤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1) 이자크 디네센, 『바베트의 만찬』, 추미옥 옮김(문학동네), 66쪽.
2) 같은 책,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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