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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초기 랍비 유대교에는 회복주의나 시온주의의 주장을 지지하는 견해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오직 메시아만이 민족의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었기에,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의 사고에는 세속적 국가 건립의 전망이 존재하지 않았다. 초기 교회는 유대교를 경멸했으며 따라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에 돌아가 국가를 건립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중세 교회도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성지를 다시 탈환하여 훼손된 땅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 성지가 유대인의 땅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본문 중)
권지성(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구약학 교수)
현재 가자 지구 인종 청소를 주도하는 현대 이스라엘의 세속적 국가 이념인 ‘시온주의’ (Zionism)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19세기 말 테오도어 헤르츨은 『유대 국가』라는 저술을 통해 시온주의를 종교적 회복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근대 민족주의와 정치 이론의 언어로 설명했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 대한 종교적 열망이 아니라 국제법과 외교를 통해 확보해야 할 영토를 목표로 하는 국가 건설 이념으로 정착시켰다.1) 하지만, 이 운동이 실제로 ‘국가 형성’의 프로젝트로 작동할 수 있었던 역사적, 외교적 무대는 16-19세기에 걸친 초기 기독교 시온주의(Christian Zionism) 및 ‘회복주의’(restorationism)가 마련해 주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이 유대인의 귀환과 팔레스타인 정착을 정당화하는 제국의 식민주의적 기획을 선행적으로 구축해 두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시온주의’는 중동 팔레스타인 영토가 성서가 말하는 옛 유대인 국가의 땅이며, 그 땅의 점유는 유대인들에게 신적으로 주어진 권리라는 믿음을 가진 기독교 운동을 말한다.2) 좀 더 일반적으로 일컫는 ‘시온주의’는 유대인들이 결국 팔레스타인 영토로 회귀할 것이라는 믿음인 ‘회복주의’에서 출발한 신념으로서, 하나님이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여 그 땅과 민족을 회복시키시는 것을 종말의 섭리적 사건으로 간주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이다.3)
사실, 초기 랍비 유대교에는 회복주의나 시온주의의 주장을 지지하는 견해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오직 메시아만이 민족의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었기에,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의 사고에는 세속적 국가 건립의 전망이 존재하지 않았다. 초기 교회는 유대교를 경멸했으며 따라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에 돌아가 국가를 건립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중세 교회도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성지를 다시 탈환하여 훼손된 땅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 성지가 유대인의 땅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대인들에 대해 호의적이었는데 유대인이 열방의 증인으로서 흩어져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대체로 종교개혁 시대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대략 12세기에 싹트기 시작하여 16세기까지 이어진 반유대주의 흐름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추방되거나 학살당하기도 하였다.
16세기의 칼뱅주의자들도 먼 미래에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영적으로 회복되리라 믿었으나,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누구도 유대인이 문자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기대는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16세기 독일인 마르틴 보르하우스와 볼프강 카피토에 의해 유대인의 회복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주장되었고, 칼뱅의 후임인 베자는 로마서 11:25-26의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유대 민족의 회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해석은 1550년대 제네바에 있던 영국인 망명자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이 망명자들이 만든 『제네바 주석 성경』 속에는 유대인을 하나의 독립된 민족 국가로 인식하는 관점이 들어 있었는데, 이는 16세기 영국이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되며 형성된 영국 민족주의의 영향이었다. 유대인의 개종과 장차 그들이 옛 영토로 귀환한다는 사상은 영국인들이 보기에는 자연스러운 성서 해석이자 예언의 성취였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 시온주의의 기원이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교황주의와 이슬람 튀르크에 맞서기 위해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유대인들을 독립된 민족으로 여겼다. 17세기 영국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으로 인식했기에 이 지고한 부르심에 충실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것을 신이 부여한 사명이라 여겼다.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교황과 가톨릭 권력으로부터 영국 왕실과 개신교를 지켜내려는 청교도들의 사명 의식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이들이 주장한 종교적 사명 의식은 근대 영국의 국가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유대인과 연대하여 교황권에 대항하고 종말론적 승리의 미래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회복이 필수적이었으며, 이것이 영국인의 부르심이 되었다. 여기에는 역사적 천년왕국 사상이 핵심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16-18세기의 청교도들은 유대인들을 존경과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이는 기독교 시온주의 사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후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후천년주의자들의 낙관적 회복주의는 쇠퇴하지만, 이 회복주의 사상은 미국 청교도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렇게 생겨난 회복주의자와 시온주의자들은 아직(19세기 초까지는)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한편, 17세기에 시작된 독일 경건주의는 유대인들의 개종을 선교와 관련된 성서적 가르침의 핵심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이후 19세기 영국 시온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경건주의자들이 주도한 유대인들을 위한 농업 프로그램은 초기 시온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 시온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영국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였다. 역사적 전천년설과 극단적 재림주의의 부흥 속에서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의 복음화는 이 영국인들의 특징적인 신념이 되었다. 이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은 에드워드 비커스테스(Edward Bickersteth)인데, 그는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이 실제로 일어난 이후에 그들의 개종이 일어날 것으로 보았고, 이런 생각은 초기 기독교 시온주의를 싹트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다.4) 샤프츠베리 백작(본명은 앤서니 애슐리 쿠퍼)은 그의 영적 조언자인 비커스테스로부터 기독교 시온주의적 영향을 받았으며, 장인인 외무장관 파머스턴을 설득하여 결국 영국 정부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정치적으로 지원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종교적 신념은 영국의 중동 외교 전략에 결합되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회복주의적 ‘유대인 복귀’ 구상이 재점화 될 때쯤, 샤프츠베리는 1838–40년 이집트의 팔레스타인 침공 위기라는 국제 정세를 활용해 유대인 정착을 “완충 지대” 설립으로 제시하며 정치적 설득을 시도했다.5) 그는 유대인 귀환과 정착을 영국의 중동 패권, 인도 접근, 상업 시장 확대 같은 제국의 번영 기획과 연결시켰으며, 팔머스턴은 이를 “실용적이고 국익에 부합하는” 구상으로 평가하며 정책적 검토 대상에 올렸다.6) 샤프츠베리가 직접 계획을 주도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팔머스턴은 1838년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설치해 현지 거점을 제도화하였고,7) 1840년에는 회복주의자 윌리엄 영을 부영사로 임명하는 방식으로 ‘보호 인프라’를 강화한다. 팔머스턴의 1840년 지시문은 유대인의 귀환과 정착이 술탄의 재정을 늘리고 동시에 무함마드 알리를 견제해 오스만 질서의 붕괴를 막는다는 논리를 제시하며 유대인 정착을 권고하는데, 여기서 유대인의 종말적 회복 기대는 철저히 제국의 안정, 통상, 지정학 계산과 결합했다.8) 이 결합은 “빈 땅 신화”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샤프츠베리의 “나라 없는 땅/땅 없는 나라” 구호로 정식화되었으며, 후대에는 시온주의 논쟁의 상투어로 유통되며 정착을 정당화하는 언어가 되었다.9) 그 뒤 1845년 예루살렘에 부임한 초기 영사 제임스 핀은 유대인을 “역사적 이스라엘의 계승자”로 간주하고 영사 보호를 제공하는 한편, 예루살렘-야포 도로변 토지 매입을 촉진해 유대인 농업 정착을 도왔다. 또한 1852년 “아브라함의 포도원” 같은 농장을 세워 고용과 기술 훈련을 제공함으로써(노동/토지/기술 결합), 발푸어 선언 이전에 이미 ‘정착촌’의 기반을 놓았다.10) 영국 영사관의 지원, 선교 기지 조사, “빈 땅” 담론, 초기 농업 정착 실험이 맞물리면서, 비로소 샤프츠베리의 종교적 신념은 유대인의 물리적 정착을 가능케 하는 보호, 지식, 토지, 노동 인프라 구축이라는 선행 작업 완수로 실현되었다. 이 초기 시온주의는 훗날 시온주의가 “정착 식민” 형태로 발전할 때 활용할 모범 사례가 된다.11)
따라서, 샤프츠베리의 이 활동을 오직 순수한 신앙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순진한 평가다. 샤프츠베리는 오스만 제국이 약화되는 정세 속에서 자신의 유대인 회복에 대한 신념을 영국의 팔레스타인 영향력 확대와 경제적 이익이라는 제국적 계산과 결합된 여러 정책 프로그램으로 밀어붙였다. 따라서 19세기 복음주의자들의 회복주의가 식민주의의 열망과 맞물려 초기 기독교 시온주의로 진화했다고 보아야 한다.
1) Avineri, Making, 115–16.
2) 루이스, 『시온주의』, 21.
3) Sizer, Armageddon, 185; Goldman, Zeal, 3. 회복주의는 신적 소명과 유대인의 회심을 먼 미래에 일어날 일로 생각한 반면, 기독교 시온주의는 그런 기대를 포함할 수 있지만 현대 유대 국가/이스라엘의 영토 사유화 프로젝트를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정치 군사적 실천 그 자체를 가리킨다(Goldman, Country, 4; 25).
4) 루이스, 『시온주의』, 199.
5) Ari’el, Unusual, 82–83.
6) Sizer, Armageddon, 70–72.
7) Goldman, Zeal, 23.
8) Sizer, Armageddon, 71.
9) Goldman, Zeal, 22–23; Sizer, Armageddon, 73.
10) Ari’el, Unusual, 101.
11) Sizer, Armageddon, 73; Ari’el, Unusual,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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