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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것이 마땅한 이치다. 그러나 학폭 이력이 대입의 당락을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 된 현재, 학교 현장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 대입에서의 불이익이라는 절벽을 등에 두고 물러설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관계 회복 기대는 말할 것도 없고 관계 동결도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본문 중)
김영식(덕양중학교 교사)
2026학년도 대학 입학 전형에서 학교 폭력 가해 이력을 가진 학생을 불합격시키고 있는 결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수시 모집 결과 학교 폭력 이력을 가진 학생의 75%가 불합격 처리되었고, 서울 주요 대학에서는 그 비율이 99%에 달했다. KAIST를 포함한 전국 4개 과학기술원 역시 학폭 이력 지원자 전원을 불합격 처리했다. 심지어 서울의 한 대학에서는 감점 처리를 받고도 합격선에 든 학생을 대학 측이 협의를 거쳐 최종 불합격 처리한 사실까지 확인되었다. 정시 모집 결과에서도 학폭 가해 이력 학생의 90.2%가 불합격으로 처리되었다. 학교 폭력에 대한 엄중한 ‘무관용 원칙’이 대학 입시에 반영되고 있음이 결과로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단호한 조치들은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가해자에 대한 엄벌 조치는 인과응보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학생들에게 학교 폭력에 대한 강력한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다. 타인을 고통 속에 몰아넣고도 반성조차 없는 인성을 가진 이가 아무런 제약 없이 고등 교육의 혜택을 누린다는 것은 교육의 본질적인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육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고민이 생긴다. 학교 폭력 이력을 대입에 엄격하게 반영하는 것이 인간의 내면적 변화와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교육 현장의 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엄벌주의가 만들어낸 ‘사과할 수 없는 교실’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것이 마땅한 이치다. 그러나 학폭 이력이 대입의 당락을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 된 현재, 학교 현장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학생들은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과의 일상적인 대화나 사소한 갈등을 트집 잡아 피해 학생을 가해자로 맞신고하는 이른바 ‘맞폭’ 사안이 늘어나고 있다. 내 자녀의 생활기록부에 흠집이 생겨 미래가 망가지는 것을 볼 수 없는 부모들은 상대방의 신고를 철회시키기 위한 압력성 신고, 나만 당할 수 없다는 보복성 신고, 자신의 불가피성을 강조하여 처벌 수위를 낮추려는 꼼수 신고를 남발한다. 대처에 미숙한 피해 학생들은 이 진흙탕 싸움 속에서 또 다른 상처를 입는다.
학교 폭력 사안이 접수되면 두 학생의 관계는 ‘절연’의 상태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사안이 발생하여 학교 폭력 신고가 이루어지면 두 학생을 분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고, 피해 학생이 원하면 가해 학생을 교실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피해 학생 보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가해 학생 입장에서는 처벌로 받아들여지며 피해 학생은 교실 속에서 다른 친구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사안 처리 과정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화해를 하게 되는 일은 많지 않다. 교사는 두 사람 사이에 개입하기 어렵고, 학폭 심의 과정에서 관계 개선을 희망하는 학생은 별로 없으며, 가해 학생 측에서 ‘맞폭’이라도 제기하게 되면 두 학생 사이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게 된다. 학교생활기록부 기재와 그에 따른 대입에서의 불이익이라는 절벽을 등에 두고 물러설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관계 회복 기대는 말할 것도 없고 관계 동결도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가해 학생의 폭력 행위는 옹호될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학교 폭력 대응 제도가 가해 학생이 한 걸음 물러서서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성장의 기회’와 학생 간의 ‘갈등 해결’과 ‘관계 회복’의 과정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현실은 직면해야만 한다.
징벌적 대입 제도가 가진 자체 문제도 있다. 첫째, 소년 범죄와의 형평성 문제다. 학폭보다 훨씬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소년범들은 대입에서 이러한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둘째, 이중 처벌의 문제다. 이미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를 통해 징계와 조치를 받은 학생에게 대입 탈락이라는 추가적인 족쇄를 채우는 것은 향후 끝없는 법적 분쟁을 예고한다. 셋째, 2차 처벌은 가해 학생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길을 가로막는 큰 장벽이 된다.
이 모든 혼란의 근저에는 2012년부터 시행된 ‘학교 폭력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조치’가 있다. 자식의 허물이 영구히 기록되어 삶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공포는, 학부모들로 하여금 자녀를 훈육하기보다 대형 로펌을 찾게 만들었다. 억울한 피해자의 입장을 생각하면 백번 이해가 가지만, 생활기록부 기재와 대입 연계라는 강경책이 과연 우리 아이들을 더 나은 인간으로 교육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지는 평가해 볼 지점이다.

가해자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식
폭력의 가해자를 다루는 성경의 이야기는 판단을 위한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타인에게 피해를 준 폭력 행위를 결코 묵인하지 않으신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은 ‘땅이 효력을 주지 않고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엄중한 형벌을 내리셨다(창 4:12). 구약의 율법들 역시 타인에게 입힌 피해에 대해 철저한 책임을 묻는다. 남의 생명을 빼앗거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는 엄벌하고 격리하여 또 다른 피해를 막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놀라운 자비를 베푸신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세기 4:13-15)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두렵다’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표를 주시며 사적 복수로부터 그의 생명을 보호하셨다. 공동체에서는 추방되었지만, 생존을 허락하심으로써 악인에게도 회개할 시간을 주신 것이다. 레위기의 ‘도피성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지나친 보복으로 억울한 가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고의가 아닌 우발적 범죄자에게는 살길을 열어 주셨다. 공의를 실현하되 인간의 연약함을 배려하여 회복의 여지를 남겨 두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은 신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다.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든 군중에게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요 8:7)라고 하셨다. 이는 죄를 눈감아 주신 것이 아니라, 심판의 자격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말씀하심으로써, 사람들 간의 사적 복수의 부적절함을 지적하신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피해자가 됨과 동시에 가해자들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감당하시는 일을 행하신다. 공의의 심판을 완성하시는 동시에,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죄인을 살리는 회복의 길을 만드신 것이다.
심판을 넘어 회복적 정의로
교육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성장시키시는 사역과 깊이 닮아 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신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죄인과 동행하며 온전함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 이와 같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교육 사역은 세상 속에서 교육 제도를 만들어 갈 우리에게 학교 폭력이라는 문제 속에서 무엇을 구현할 것인지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학교 폭력이라는 범죄에 대해 엄중히 접근하고 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징벌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잘못을 저지른 학생이라 할지라도 대중의 분노나 사적 복수의 대상이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학생의 미성숙함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어떻게 해야 그가 잘못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는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충분한 징계와 반성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는데도 배움의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것은, 과도한 처벌일뿐더러 문제 해결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분명 주어진 반성의 기회를 악용하여 자기 이익을 취하려는 악인이 있겠지만, 인간의 악함을 고려한다는 이유로 학생을 제대로 교육할 기회를 봉쇄하는 것은 지혜로운 결정이라 할 수 없다. 회개하지 않는 악인에 대해 성경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파멸의 길로 이끌어 감으로써 자기가 받을 벌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다만 우리에게는 미성숙한 학생을 선한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할 뿐이다.
학교 폭력 가해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매장이 아니라, 자기 잘못에 대한 직면과 인정, 사과와 책임, 그리고 배우고 성장하여 올바른 사람으로 성장할 기회다. 범죄에 대한 심판과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회복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교육 시스템 속에 구현하기 위한 방법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는 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힘은 앞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갈 우리의 학생들이 반드시 경험하고 익혀야 할 역량이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상처 입은 사람과 빗나간 사람 모두를 살려내는 참된 교육의 길을 한국 교회와 사회가 함께 만들어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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