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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긴 이야기에서 감동을 찾던 나와 달리 그들은 장면 장면에서 슬픔을 느꼈다고 했다. 짧은 장면에도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는 말로 들렸다. 설득력 있는 서사가 영화의 후반부까지 이어지며 큰 감동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 소셜 미디어의 릴스나 유튜브의 짧은 영상을 즐겨보는 그들에게는 길게 이어지는 서사보다는 짧지만 깊게 드러나는 감정에 더욱 공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본문 중)
이민형(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 교수)
그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무엇인가를 작정한 듯 보였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시선을 한 곳에 고정했다. 이내 눈물을 흘리는가 싶더니, 펑펑 울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그녀는 눈물을 쏟아냈다. 이 정도면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해야 하는데, 생각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녀뿐 아니라 주변의 곳곳에서 사람들이 눈물 콧물을 쏟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찰나의 순간 나의 MBTI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라면, 혼자 말똥말똥 주변을 둘러보는 나는 공감을 못 하는 T 유형의 인간이 분명했다. 몇 번이고 검사한 결과에 따르면 나는 극 F의 성향을 가진 공감형 인간이었는데 말이다. 결국 난데없이 MBTI로 튀어버린 생각을 억지로 끌어오다 보니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그렇게 끝이 났다.
고백하건대, 장항준 감독을 좋아한다. 유해진 배우도, 유지태 배우도, 전미도 배우도 좋아한다. 처음 보는 박지훈 배우도 배역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를 감독과 배우에 대한 선호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모름지기 영화는 배우의 연기와 촬영 기술, 감독의 연출과 음악, 미술 등이 더해져 이야기를 전달하는 종합 예술 아닌가! 굳이 평론가들이 강조하는 작품성이나 완성도까지 가지 않더라도, 영화는 진득하게 서사를 풀어가면서 관객을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짧은 생애를 살았던 단종에 대한 단편적인 사료에 감독의 상상력을 더해 만든 이야기이니 진지한 사극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무리 꾸며낸 이야기라고 해도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가 개연성인데, 이 영화는 개연성이 너무나 부족했다.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고, 관계가 깊어지고, 중심인물들이 각성하고, 애틋한 마음이 생기고, 결국 목숨을 걸고 타인의 권위를 지켜내는 상황을 보여 주기엔 장면 장면이 지나치게 축약되어 있었고, 인과관계가 약했다. 그러다 보니, 장면이 바뀔 때마다 이야기의 틈새를 메꿔야 하는 것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 되어버렸다.
사실 영화를 보는 도중에는 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나름 이야기에 젖어 들기 위해 장면의 사이사이를 메꾸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자, 허기처럼 아쉬움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영화에 몰입하려던 지난 두 시간의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기대가 지나치게 컸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감독이 연출하고 좋아하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작품에는 늘 높은 기대치가 드리워지니 말이다. 아쉬웠지만, 그래도 그들의 행보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극장에서 나왔다. 집에 오는 길에 찾아보니 <왕과 사는 남자>를 찾아 본 관객의 수가 천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글을 쓰는 지금은 관객이 약 1,300만 명이라고 한다). 사실 영화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허술하다는 개인적인 평가를 차치하고서라도, 그리 특별할 것이 없었는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을까? 이전에 개봉했던 사극 영화에 비교하자면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울 텐데, 그럼에도 인기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아 검색을 해보았다. (AI는 사용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했을 뿐이다.) 영화에 대한 평가가 거의 없다. 대부분 천만 관객의 흥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왜 천만 이상의 관객이 들었는지, 영화의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생략된 채, 단종의 슬픈 사연에만 집중한다. 영화 촬영지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는 기사도 보인다. 요약을 해보자면, 영화의 서사와 완성도, 그리고 무엇이 관객을 끌어들였는지에 대한 분석은 없고,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요약한 글, 감독과 배우들의 인터뷰, 사람들이 몰려드는 현상에 대한 기록만이 넘쳐난다. 이토록 반복적으로 노출이 될 만한 영화인가 싶다가도 이토록 반복적으로 노출이 되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쩌면, <왕과 사는 남자>에 쏟아지는 기대 이상의 관심은 온라인상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아니,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이러한 생각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하지만,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눈길을 끌었던 그 여성의 반응이었다. 그녀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서사에 녹아들지 못해 눈물이 나오지 않았던 나와 그 사람들은 어떤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늘 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냥 장면 장면이 슬펐어요.” 하나의 긴 이야기에서 감동을 찾던 나와 달리 그들은 장면 장면에서 슬픔을 느꼈다고 했다. 짧은 장면에도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는 말로 들렸다. 설득력 있는 서사가 영화의 후반부까지 이어지며 큰 감동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소셜 미디어의 릴스나 유튜브의 짧은 영상을 즐겨보는 그들에게는 길게 이어지는 서사보다는 짧지만 깊게 드러나는 감정에 더욱 공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것이 감독이 의도한 바였는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감독의 성격이 드러나는 연출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요즈음의 세대에게는 설득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젊은 사람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왕과 사는 남자>의 슬픈 장면에 대해 공유하고 있었나 보다.
이제는 영화라는 예술의 성격도, 아니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가 바뀔 때가 된 것 같다. 하나의 긴 이야기보다 순간순간의 감동이 더 중요한 관객들이 생겼으니 말이다. 시대가 바뀌면 예술의 모양도 바뀐다. 아쉽지만,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래도 그 많은 젊은이들이 극장을 찾았다는 것이 어디인가. 그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도리어 생각은 교회로 이어진다. 교회의 서사는 어떠한가. 여전히 성서일과에 따라 구약과 시편, 서신서와 복음서를 읽고 이를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는 설교를 좋아하는 나의 기호는, 이제 불편한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어딘가에서 머릿속으로 빨리 감기를 누르는 사람이 있겠지. 단편적인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는 시대에 우리의 이야기는 어떠해야 할지, <왕과 사는 남자> 생각이 어느덧 교회로 옮겨져 더 많은 숙제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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