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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풍천교주의 신물을 고를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다른 것 대신 책사의 족쇄를 풀 열쇠를 요구한다. 사람을 얻으려면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먼저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풍천교주가 배워야 할 교훈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그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그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 상대는 물론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 그가 자의로 선택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모험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로 벌이신 모험이기도 하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오늘 소개할 웹툰 <절대회귀>는 무협 판타지 회귀물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초인적인 무력과 회귀라는 설정 자체가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런 장르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조건을 일단 기정사실로 놓고, 말하자면 그 설정에 대한 ‘불신을 잠시 유예한 채’, 그 위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지를 보는 것이다.

 

무림에 갑자기 등장한 절대 악의 손에 모든 것을 잃었던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그 절대 악의 등장에 대비한다. 2회차 회귀자만 확보할 수 있는 정보와 내공을 적극 활용해, 아끼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힘을 기르고 세력을 쌓아 나간다. 때로는 신중하게, 때로는 과감하게 일을 벌이고 방해자를 처단하며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 간다. 계략과 무력으로, 또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어 간다.

 

그런데 주인공이 대업을 이루기까지는 갈 길이 먼 이 웹툰에서,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주인공이 책사를 얻는 이야기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량을 얻는 장면에 비길 만하다. 다만 그가 노리는 인물은 변방의 실력자인 풍천교주의 책사다. 오늘은 풍천교주와 그 책사의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웹툰 <절대회귀> 포스터

 

기이한 공생 관계

 

풍천교주는 그가 다스리는 영역 안에서 절대 권력자다. 말 한마디면 누구든 죽일 수 있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있는 곳은 변방이다. 그는 중원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 더 큰 세계로 진출하고 싶어 한다.

 

그러려면 마력도 무술도 세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뛰어난 책사가 필요하다. 그의 곁에는 그런 책사가 있다. ‘족쇄를 목에 맨 사나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기묘하다. 어쩌면 병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책사는 풍천교주에게 조언을 하고 교주는 그의 말을 경청하며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책사는 매인 몸이지만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교주를 하대하고 심지어 욕을 할 수도 있다. 교주가 허락한 특권이다. 겉으로 보면 책사는 철저히 종속된 존재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보면 오히려 교주가 책사에게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교주는 책사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 대신, 마력을 사용해 푸른 하늘과 드넓은 들판을 환각으로 보여 줄 수 있다. 자유의 환상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책사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무시무시한 환각으로 그를 제압한다. 나름의 당근과 채찍이다.

 

풍천교주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머리가 비상한 책사는 왜 그런 관계에 머무르고 있을까? 남녀 관계에 비유하자면 두 사람의 관계는 짝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다. 책사는 비상식적인 처우 속에서도 풍천교주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었다(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동시에 그는 거칠고 난폭한 절대 권력자로 살아가며 누구에게도 속내를 드러낼 수 없는 풍천교주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라이벌의 등장

 

그렇게 오랫동안 나름대로 안정적으로 이어져 오던 두 사람의 기묘한 관계에 주인공이 끼어들면서 ‘삼각관계’가 만들어진다. 거사를 준비하는 주인공은 책사가 필요했고, 족쇄를 찬 사나이는 그 역할의 적임자로 보였던 것이다.

 

주인공의 등장으로 풍천교주와 책사의 관계는 시험대에 오른다.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마음이 드러나고(정확히 말하면 까발려지고) 혹독한 검증을 거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과정이 주로 대화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매회 화려한 액션이 펼쳐지고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 나가던 이 웹툰에서, 이 에피소드만큼은 액션이 거의 없다. 그런데 댓글을 보면 불만을 표하는 독자도 없다.

 

액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한 풍천교주가 괴성을 지르고 마침내 상을 뒤집어엎는다. 그것이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격렬한 장면이다. 칼이 부딪치는 장면도 없고 거창한 전투도 없다. 그런데도 풍천교주와 책사 사이의 밀고 당김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족쇄가 말해 주는 것

 

갑자기 풍천교주 앞에 등장한 주인공은 이런저런 빌미로 교주의 ‘신물’(神物)들을 하나씩 얻어 간다.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노리던 신물이 드러난다. 바로 교주의 책사였다. 그러나 주인공은 대놓고 책사를 회유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 사람들을 풍천교주의 처소로 데려와 보여 준다. 자신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그가 사람들과 어떤 관계로 묶여 있는지를 그저 보여 준다.

 

그 모습을 보며 책사는 느끼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풍천교주는 그 정도가 더했을 것이다. 자신과 책사의 관계가 그들과 얼마나 다른지, 그것을 누구보다 또렷하게 보게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밀고 당기는 시간이 이어진 끝에 풍천교주는 깨닫는다. 자신이 그를 영원히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숴 버리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풍천교주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책사에게 욕을 하고 괴롭히며 거칠게 대한다. 겉으로 보면 폭력적인 관계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끊어지지 않은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 풍천교주에게 책사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가 진심을 말하고 조언을 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그 책사의 목에 족쇄를 채웠을까. 어쩌면 답은 단순할지도 모른다. 그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풍천교주는 책사의 목에 족쇄를 채워서라도 그를 붙들어 두고 싶었고, 바로 그 족쇄 덕분에 그를 잃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책사의 해석은 의외로 담담하다. 교주는 그저 하던 대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데, 그 상태가 그냥 계속 이어졌을 뿐이었다.

 

죽어야 산다는 원리의 무협적 변주

 

풍천교주는 책사를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지금처럼 그를 곁에 두고 자기 영역에서 절대자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주인공의 등장으로 인해 점점 그럴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린다. 그러다 자존심과 혈기, 만용과 절박감과 무력감이 뒤섞인 어떤 순간, 그는 책사와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망쳐 버린다. 그리고 더 이상 예전처럼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결국 그는 책사를 놓아준다. 자신의 가장 귀한 신물, 자신의 지위를 보장해 줄 ‘브레인’을 포기한다. 그 순간에 뜻밖의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욕을 퍼붓고 악담을 하면서도 기어이 자신을 보내 주는 풍천교주에게 책사가 무언가를 건넨다. 오래전에 만들어 두었던 족쇄 열쇠의 복사본이었다. 그는 족쇄 때문에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족쇄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 결정으로 교주의 운명이 뒤집힌다. 주인공의 수하가 된 뒤 책사가 처음으로 한 부탁이 풍천교주를 받아 달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살려 달라는 요청이었다. 주인공은 자신의 책사가 처음으로 한 부탁을 들어준다. 결국 풍천교주는 자신이 한사코 붙들고 있던 손을 놓음으로써 살길을 얻게 되었다. 집착을 버리는 선택이 그의 생존 가능성을 열어 준 셈이다.

 

낭. 만. 작. 렬.

 

풍천교주가 살아남으려면 마지막 선택이 필요하다. 스스로 주인공 편에 서야 한다. 그러나 책사가 “당신을 살려 주고 싶으니 이쪽에 붙으시오”라고 말한다면 풍천교주가 그 말을 들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존심이 그를 반대쪽 길로 이끌 것이다. 그래서 책사는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풍천교주 자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 밑으로 들어가겠느냐는 교주의 말에 책사는 묻는다. 그렇게 살아온 삶이 정말 행복했느냐고. 이제 밖으로 나와 보지 않겠느냐고. 자유롭게 살아 보지 않겠느냐고. 위험을 감수하며 가슴 뛰는 삶을 살아 보자고. 그리고 덧붙인다. 우리는 서로의 무덤에 꽃 하나 놓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 그대로 낭만 작렬이다.

 

족쇄를 벗고서

 

세상에는 뒤틀린 방식으로라도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족쇄야말로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형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관계에 일말의 의미가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족쇄 때문이 아니라 족쇄에도 불구하고 남은 것일 테다.

 

족쇄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면 선택은 하나다. 족쇄를 더 단단히 조이고 환각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붙들어 둘 수는 없다. 어느 순간에 임계점을 넘으면 족쇄는 그 관계에 남아 있던 작은 의미마저 파괴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의미 있는 관계의 씨앗이 제대로 자라려면 결국 족쇄가 벗겨져야 한다. 물론 그렇게 되면 관계 자체가 끝날 수도 있다. 그것은 감수해야 할 위험이다.

 

주인공은 풍천교주의 신물을 고를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다른 것 대신 책사의 족쇄를 풀 열쇠를 요구한다. 사람을 얻으려면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먼저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풍천교주가 배워야 할 교훈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그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 원한다면 그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 상대는 물론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 그가 자의로 선택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모험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로 벌이신 모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건강한 관계의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절대회귀>는 바로 그런 모험으로 독자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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