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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표정, 비유와 침묵까지도 이념의 렌즈로 해석되는 시대다. 이때 설교자는 쉽게 두 극단으로 기운다. 한쪽은 강단을 시대 논쟁의 전면에 세워 정치 강연처럼 말하는 길이고, 다른 한쪽은 오해를 피하려고 현실을 외면한 채 추상적 교리만 반복하는 길이다. 그러나 둘 다 설교의 본래 모습은 아니다. 설교는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되고, 현실에 종속되어서도 안 된다. 설교는 시대를 읽되, 그 시대를 복음으로 번역해야 한다. (본문 중)

 

이세령(목사, 복음자리교회)

 

지난 대선 무렵 들은 이야기다. 한 목사가 선물 받은 빨간 넥타이를 몇 주 연속 매고 강단에 섰다가 한 성도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목사님은 왜 자꾸 빨간 넥타이만 매십니까?” 넥타이는 그저 넥타이일 뿐인데, 이미 청중은 그것을 하나의 정치적 신호로 읽고 있었다. 웃어넘길 해프닝 같지만, 사실 이 짧은 장면은 오늘 교회의 현실을 잘 보여 준다. 말과 표정, 비유와 침묵까지도 이념의 렌즈로 해석되는 시대다.

 

이때 설교자는 쉽게 두 극단으로 기운다. 한쪽은 강단을 시대 논쟁의 전면에 세워 정치 강연처럼 말하는 길이고, 다른 한쪽은 오해를 피하려고 현실을 외면한 채 추상적 교리만 반복하는 길이다. 그러나 둘 다 설교의 본래 모습은 아니다. 설교는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되고, 현실에 종속되어서도 안 된다. 설교는 시대를 읽되, 그 시대를 복음으로 번역해야 한다.

 

 

마태복음은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준다.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을 4:23과 9:35에서 같은 세 동사로 요약한다. 예수님은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셨다.’ 이 반복은 우연이 아니다. 마태복음 5–7장에서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통해 가르치시면서 전파하신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그 나라가 어떤 삶을 요구하는지 풀어 주신다. 이어지는 8–9장에서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회복시키심으로써 고치시면서 전파하신다. 복음은 말로 설명될 뿐 아니라, 회복의 사건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10장에 가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가서 전파하라. 병든 자를 고치라’고 하신다. 제자들도 전파와 치유의 일에 참여한다. 하지만 11:1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신 뒤 친히 각 동네에서 가르치며 전파하러 가신다. 마태복음의 흐름을 따라가면, 제자들이 이 ‘가르치며 전파하는’ 사명을 온전히 맡는 때는 부활 이후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는 명령이 그때 주어진다. 왜 그때인가. 이제 복음의 중심 사건, 곧 십자가와 부활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설교는 시대를 말할 수 있다. 사회의 혼란과 공적 문제를 다룰 수 있다. 그러나 그 설교가 끝내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아직 마태복음이 말하는 의미의 복음 선포라고 하기는 어렵다.

 

요한복음은 설교의 해석 중심을 더 또렷하게 세워 준다. 예수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 5:39). 성경은 단지 옳은 원리를 모아 놓은 책이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이다. 구약성경의 약속은 각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현실을 견디고 해석하도록 붙들어 주었지만, 그 약속의 참된 성취와 능력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해, 성경을 바르게 읽는다는 것은 단지 본문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를 보는 일이다.

 

이 기준은 이념 과잉의 시대에 특히 절실하다. 오늘 우리는 성경을 읽기 전에 입장을 정해 놓고, 그 입장을 뒷받침할 구절을 찾기 쉽다. 그러면 성경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이 아니라 내 편을 지지하는 자료집으로 전락한다. 강단도 마찬가지다. 본문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자리에서 벗어나면, 설교는 금세 도덕 강의가 되거나 진영 논평이 된다. 그래서 설교자는 언제나 두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그리고 그 그리스도 앞에서 오늘 우리는 어떤 회개와 믿음으로 부름받는가. 이 질문이 살아 있을 때만 설교는 이념이 아니라 복음을 말하게 된다.

 

사도행전 17장의 아레오바고 설교는 설교가 현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바울은 아덴의 우상을 보고 마음에 격분했지만, 설교를 시작할 때 곧바로 정죄부터 하지 않았다. “너희가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현실과 언어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신”에게 세운 제단을 붙들고, 바로 그 신을 알게 하겠다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바울의 논증이 차례로 전개된다.

 

먼저 그는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신전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며,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시는 분도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분이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신다. 이어서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서 모든 민족을 만드시고, 시대와 경계와 한계를 정하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논지가 분명해진다. 인간이 신의 자리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와 공간과 종말을 정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헬라 시인의 말까지 끌어와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 말한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소생이라면, 사람이 금이나 은이나 돌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섬긴다는 것은 거꾸로 된 일이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형상을 만들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심판의 날을 정하셨고, 그 심판자를 정하셨으며, 그 증거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선포한다. 부활은 단지 놀라운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분이 참된 주이심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표지다. 인간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는 하나님의 역사가 부활이다. 그러므로 아레오바고 설교의 핵심은 이것이다. 너희가 신전과 형상 속에 가두어 섬기던 신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시대와 경계와 종말을 정하시는 하나님을 알라.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알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그가 세우신 부활의 주를 믿으라. 현실의 언어로 시작했지만, 설교는 결국 회개와 믿음으로 나아간다.

 

이 세 본문을 함께 놓고 보면, 설교의 길이 선명해진다. 마태복음은 설교가 가르치고 전파하고 회복하는 복음의 사건임을 보여 준다. 요한복음은 성경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사실을 못박는다. 사도행전은 설교가 시대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그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우상을 해체하고 부활의 주께로 사람을 이끌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래서 설교는 사회 문제를 다룰 수 있다. 불의, 혐오, 젠더 갈등, 공적 윤리의 혼란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설교는 해설이나 논평에 머물 수 있다. 설교는 반드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 현실 뒤에 놓인 우상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설교자와 청중 모두를 함께 회개로 부르며, 끝내 그리스도께로 데려가야 한다.

 

이념 과잉의 시대에 교회에 필요한 것은 무색무취의 중립이 아니다. 더 선명한 복음의 구조다. 강단은 시대의 소음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곳이 아니라, 그 소음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을 내는 자리다. 설교는 현실을 읽되 현실에 종속되지 않고, 시대의 언어를 사용하되 시대의 우상을 강화하지 않으며, 끝내 십자가와 부활의 주께로 사람을 이끌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진영의 확성기가 아니라 복음의 증인으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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