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자리에서 이름을 부르다
— 첫째 날, 주정공장 수용소와 곤을동을 지나(냉이)
제주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주정공장 수용소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제주 주민 수탈의 도구였던 이곳이, 해방 이후에는 4·3 당시 주민들을 가두는 수용소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1949년 봄,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주민들은 내려오면 살려주겠다는 말을 믿고 하산했지만, 상당수는 제대로 된 심사나 재판 절차도 거치지 못한 채 사형을 선고받거나 육지의 형무소로 보내졌습니다. 해방이 곧 제주 사람들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한 장소에 시대를 달리한 폭력의 흔적이 겹쳐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현장에서는 『작별하지 않는다』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주정공장에 수용된 외삼촌을 찾아간 어머니와 이모는 그를 잠시 만날 수 있었지만, 데리고 나올 수는 없었습니다. 다음 주 다시 찾아갔을 때는 사람들이 이미 배를 타고 떠난 뒤였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외삼촌의 행방을 찾아 형무소까지 찾아가지만, 끝내 그를 만나지 못합니다. 가족이 어디로 이송되었는지, 다시 만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은 얼마나 막막했을까요. 소설 속 어머니가 오랫동안 외삼촌의 행방을 찾고, 마지막까지 그를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국가폭력은 희생자의 삶뿐 아니라 남겨진 가족들의 삶에도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3의 역사를 살펴보며 가해와 피해가 겹겹이 쌓이는 과정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반공이라는 명분 아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이들이 있었고, 폭력은 또 다른 보복과 증오를 낳으며 민간인의 희생을 키워갔습니다. 폭력이 확대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과 가해를 정당화하는 것은 다릅니다. 어떤 명분으로도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책임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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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을동에서는 4·3이 마을에 남긴 흔적을 살펴보았습니다. 1949년 1월 토벌대에 의해 가옥이 불타면서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고, 지금은 집터와 올레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현장에서 품은 의문은 왜 해안마을인 곤을동이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곤을동의 비극을 다시 살펴보며, 4·3은 무장봉기와 진압이라는 사건의 전개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라진 것은 건물만이 아니라 주민들이 살아가던 일상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은 제주4·3평화공원과 기념관에서는 사건의 배경과 전개, 희생의 규모, 진상규명의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4·3을 배우고 기억할 수 있기까지 유족과 시민사회의 오랜 노력과 수많은 증언이 있었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러 나라에서 벌어진 국가폭력과 집단학살을 다룬 부분을 보며 답답하고 막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학살은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면서도 반복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첫째 날의 여정은 세 장소를 통해 4·3을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수용소에서는 국가폭력 앞에 놓인 사람들의 무력감을, 곤을동에서는 삶의 터전이 파괴된 흔적을, 평화공원에서는 사건의 역사와 진상규명의 노력을 마주했습니다. 왜 이런 비극이 반복되는지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사라진 마을의 자리와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는 일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 작별하지 않겠습니다
— 둘째 날 오전, 가시마을 4·3길을 걸으며(샤인)
제주의 가을 하늘은 눈부시게 찬란했고, 짙푸른 바다와 낮은 현무암 돌담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더없이 평화로웠습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제주는 헤아릴 수 없는 눈물과 절규, 빼앗긴 삶과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둘째 날 오전, 우리는 가시초등학교와 고야동산, 마두릿동산을 지나 잃어버린마을 새가름과 4·3위령탑에 이르기까지 가시마을 4·3길을 걸었습니다. 불에 타 폐허가 되어 버린 삶의 터전, 영문도 모른 채 생명을 빼앗긴 사람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평범한 일상을 잃은 사람들, 학살의 기억과 그리움을 품은 채 남겨진 생을 살아 내야 했던 사람들. 그 아픔을 조금이나마 함께 품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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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도서 4:1) 일제강점기의 폭압과 수탈을 견디고 맞이한 해방이었지만, 자유를 갈망했던 사람들은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생명과 존엄을 빼앗겼습니다. 이후 한국전쟁과 군사정권을 거치면서도 국가폭력은 반복되었습니다. 시대와 명분은 달라졌지만, 권세 있는 자들의 손에는 힘이, 학대받는 자들에게는 눈물이 남았습니다.
그 수많은 억울한 죽음과 눈물은 어디에서 위로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세기 4:10) 아벨은 죽어 침묵하게 되었지만, 그가 흘린 피는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은 진실을 은폐할 수 있지만, 억울하게 흘린 피는 하나님 앞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주 4·3 희생자들의 피와 남겨진 이들의 눈물도 하나님께서 보고 들으셨고, 여전히 기억하시며, 회복되지 않은 억울함까지 마침내 신원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성도이자 법률가인 제게 위로이자 책임으로 다가옵니다. 법과 권력이 생명과 존엄을 짓밟는 데 이용되었다는 사실이 참담합니다. 법은 권세 있는 자들의 힘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그곳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누구의 편에 서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 나는 과연 누구의 곁에 서 있는가.
이번 기행을 앞두고 함께 읽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정심은 학살로 가족을 잃은 뒤에도 사라진 이들의 흔적을 찾고 기억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 기억은 인선과 경하를 거쳐 우리에게까지 전해집니다. 한강은 작가의 말에서 고백합니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름과 고통을 기억하고, 진실을 찾고, 끝내 증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억이 사랑이 되고, 사랑이 책임이 되며, 책임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제주 4·3의 희생자들을 기리며, 오랫동안 마음을 두고 기도해 온 북한 주민들과 북한이탈주민들을 떠올렸습니다. 역사적 맥락은 다르지만, 국가권력과 이념 앞에서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는 비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굶주림과 박해, 강제북송의 두려움, 가족과 고향을 잃고 인신매매와 강제노동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며, 자유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일. 그것이 제게 주어진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별하지 않는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그 길이 언제나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의를 구하고 평화를 기다려도 현실은 더디게 변하고, 때로는 무력감과 좌절을 마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송강호의 『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에서 읽었던 문장처럼, 거듭 패배하더라도 끝내 사랑과 정의를 포기하지 않는 삶이기를 원합니다. 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오래도록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더딘 현실 앞에서도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간절하지만 쉽게 흔들리지 않는 소망으로 단단해지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니까요. 그 모든 눈물과 절규를 보고 들으셨으며, 마침내 억울함을 신원하실 테니까요. 죄 없이 죽임당한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이시니까요. 저 역시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성도로서, 잊혀서는 안 될 사람들을 기억하고, 외면해서는 안 될 절규에 귀 기울이며,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고 지켜야 할 사람들의 곁에 서겠습니다.
비록 비틀거리더라도 정의를 향해, 비록 패배하더라도 평화를 향해, 끝내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겠습니다. 분노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정죄만이 아니라 긍휼로, 절망이 아니라 소망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그렇게 지극한 사랑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씨를 뿌리다
— 둘째 날 오후, 표선면 일대 유적지를 돌아보며(써니)
두 번째 날 오후에는 『작별하지 않는다』의 배경이 되었을 법한 장소들을 걸었습니다. 당시 주민들이 살던 표선면 일대와 제주도의 대표 관광지인 정방폭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걸으면서 그 마을에 살았을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1948년,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가득했을 그해에도 아마 제주도의 햇살은 이렇게 따사롭고, 하늘은 높고, 산은 푸르고, 바람은 시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의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태어나고 자란 집에서 눈을 떠 어제와 같은 일상을 시작했을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재앙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집을 포함한 온 마을이 불에 타거나, 가족이 어딘가로 끌려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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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제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제 고향과 집이 더 이상 평안을 주는 곳이 아니라 일상의 행복을 앗아간 상처의 현장이 된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저는 그곳을 떠나 멀리멀리 갔을 것 같습니다. 저를 아프게 하는 모든 것과 작별하는 편이 저를 살아가게 할 거라고 여겼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이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을 재건하고 삶을 이어가셨으며, 연좌제로 인한 차별과 핍박도 오랜 세월 견디셨다고 합니다. 책의 제목처럼 작별하지 않고, 그 땅에 다시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기까지 정성을 다해 돌보기를 멈추지 않으신 것입니다.
무엇이 그분들을 다시 살아가게 했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잊으려 애쓰는 단념이 아니라, 억울하게 사라져 간 이들의 이름과 온기를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가겠다는 거룩한 고집이었을지 모릅니다. 통곡조차 죄가 되던 시절을 견뎌 내며 그분들은 끝내 작별하지 않기를 택했고, 지독한 아픔을 온 삶으로 끌어안고 그 땅을 지킨 것입니다.
그 사건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한강 작가는 마치 가슴속 깊은 한을 한 호흡에 토해 내기로 작정한 어느 소리꾼의 소리처럼 당시의 아픔을 이 책에 그려 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죽은 사람들의 억울함과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남겨진 이들의 허망함을, 그때의 고통과 작별하지 않기로 다짐한 작가가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것입니다. 그러니 저도 2박 3일의 기행에서 만난 과거의 아픔들과 영영 작별하지 말자고 다짐해 봅니다. 끝내 고통을 피하지 않고 그 위에 섰던 그들처럼, 제 삶에서 저만의 방법으로 그 아픔에 동참하기를 다짐합니다.
폭력이 남긴 흔적을 따라
— 셋째 날, 송악산·알뜨르비행장·섯알오름을 돌아보며(동치미)
기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해를 등지고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해안에 접해 솟은 송악산에 도착해 바다와의 경계에 뚫린 ‘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진지’를 목도했습니다. 동굴진지는 일본군이 연합군 함대를 방어하기 위해 제주 주민을 강제 동원해 구축한 곳으로, 연합군의 함대가 다가오면 진지에서 작은 배를 타고 나가 함선에 부딪혀 자살폭파 공격을 하던 곳입니다.
송악산 인근에 위치한 ‘알뜨르비행장’도 일제가 주민들을 모아 강제로 건축한 곳으로, 중국 침략의 교두보로 세운 전략기지입니다. 넓은 활주로와 격납고들이 넓고 푸르른 밭 사이에 흉물처럼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4.3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권력의 폭압으로 인해 힘없는 사람들이 억압받았던 폭력의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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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제주에 생긴 전쟁과 폭력의 상처 두 곳을 보며, 구럼비 바위를 폭파해 세운 해군기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주한 곳은 ‘섯알오름 양민학살터’와 ‘백조일손 역사관’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정부는 예비검속을 실시합니다. 예비검속은 범죄 우려가 있는 사람을 미리 체포하는 폭력적 제도입니다. 군경은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357명을 구금했고 이중 252명을 아무런 재판 없이 학살했습니다.
갇혀 있던 희생자들은 이른 새벽에 끌려나왔고, 총살터로 가는 길에 유족들이 자신의 유해를 찾을 수 있도록 고무신을 하나씩 트럭 밖으로 던져 이동경로를 표시했습니다. 학살 이후 가족들이 길에서 고무신을 알아보고 섯알오름 학살터를 발견했지만 군경은 시신을 되찾지 못하게 무력으로 막았고, 출입금지 구역으로 만들어 주변을 경계했습니다.
이후 유가족들의 끝없는 탄원과 노력으로 총 149위를 수습할 수 있었지만, 일부를 제외하고는 뼈가 하나로 엉겨 신분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가족들은 모두 한 자손이라는 의미로 ‘백조일손(百’祖一孫)‘이라 명하고 유해들을 한 곳에 안장했습니다.
학살지에는 역사와 현장을 설명하며 기리는 여러 비석이 있었습니다. 한 비석에는 “이제 긴- 여정이 끝입니다”라고, 다른 비석에는 “당시를 회상하며 영구불망(永久不忘)의 돌을 세운다”라고 새겨있습니다. 이념과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당한 희생자들의 한이 이제 끝나길, 더불어 역사의 아픔이 모두에게 불망의 교훈과 다짐이 되길 바라며 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