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에서 이성이 가진 인식 능력의 한계를 깨달은 것도 근대의 몰락을 부추겼습니다. 우주의 비밀을 다 밝히기는커녕 인간의 앎 자체에 이미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자연주의’가 퇴조하면서 지금까지 이성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많은 영역에서 적지 않은 동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본문 중)

권수경(고려신학대학원 초빙교수)

 

근대에는 인간 이성의 능력으로 진리를 발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이성을 불신하게 되면서 진리 발견의 가능성뿐 아니라 진리 자체의 존재마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모더니티의 특징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던-이즘’ 곧 ‘근대 이후 사상’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근대 이후에 왔으며 사상적으로는 근대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인 만큼 모더니티의 여러 요소를 극복하거나 배격하려는 노력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양 역사에서는 중세 천 년이 르네상스로 막을 내리고 대략 16세기부터 근대가 시작됩니다. 왕이나 교황이 다스리던 나라 대신 시민 중심의 국가가 등장하였고 길드 중심의 경제가 자본 중심의 경쟁 경제로 변모하는 등 정치·경제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사상이었습니다. 삼백 년 가까이 문예 부흥을 경험하면서 인간 이성의 능력을 발견하고 그 이성을 모든 생각과 판단의 기준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성경 계시만이 진리라고 말한 교회의 가르침과 멀어지면서 지금껏 죄 때문에 제구실을 못한다고 하였던 인간의 사고력이 이제 계시보다 더 큰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바깥에 저 혼자 있던 진리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가진 인간이 바깥의 자료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갈무리하여 지식을 만든다는 것을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명확하게 밝혀 당대 및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마누엘 칸트(1724~1804)

 

칸트가 활동하던 18세기는 프랑스의 볼테르와 루소, 영국의 스미스와 벤담 등도 활동하여 이성의 빛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계몽 시대’였습니다. 경제가 좋아져 배도 부르고 자유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도 만끽하는 가운데 과학과 기술도 눈부시게 발전하였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이성의 능력을 전폭으로 신뢰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연과 사람을 포함해 온 우주의 비밀까지도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을 잘 교육하면 사회가 모든 면에서 더욱 나아질 것이고 나중에는 지상 낙원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교회도 합리성이라는 사상적 배경 가운데서 활동했습니다. 강단에서도 기독교 복음이 합리적이요 이성적임을 강조하였고 세상을 향해서도 기독교 복음의 합리성을 변증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도를 지나쳐 기적 같은 초자연적 요소를 복음에서 제거하거나 십자가의 도 같은 신비를 이성에 맞게 왜곡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비평이나 비신화화 등 합리성을 기준으로 성경을 풀어내는 기획을 발전시켜 근대를 대표하는 신학이 되었는데 합리성의 요구 자체는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근대에서 근대 후로

 

찰리 채플린, 영화 모던 타임스(1936) 중.

 

모더니티가 가졌던 자신감은 20세기에 들어와 급격히 약해졌습니다. 몇 가지 요인이 겹쳤습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대량 살상을 경험하면서 이성의 열매인 과학과 기술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찰리 채플린(1889~1977)의 영화 「모던 타임스」가 보여 주듯이 자본주의와 기술의 결합이 낳은 부작용도 더 깊이 다가왔습니다. 모든 것을 계량화, 수치화하는 기계 중심의 문화에 대한 피로감도 커졌습니다. 번영과 발전의 결과 과소비와 빈부격차의 문제가 커졌고 지구의 환경 또한 심각하게 파괴되어 밝은 앞날을 꿈꾸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지난 세기에는 또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 등 전체주의 사상이 차례로 세계를 뒤흔들어 ‘전체적인 것’ 자체에 대한 반감을 온 세계에 심어주었습니다.

쓴 열매를 맛본 사람들은 비난의 화살을 곧장 나무로 돌렸습니다. 20세기가 경험한 각종 변화와 재난은 그런 열매를 낳은 이성 자체에 대한 회의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결국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물음까지 다시 던지게 만들었습니다. 인간 중심의 가치관, 이성 위주의 사고, 잘 될 거라는 지나친 기대가 자연과 사회를 망쳤고 결국 인간성의 황폐화를 낳았다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19세기의 낭만주의 운동이 이성 일변도의 사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났다면, 철학에서는 19세기의 니체와 20세기의 하이데거 등이 이성의 한계에 대한 성찰을 철학의 언어로 표현하였습니다.

과학계에서 이성이 가진 인식 능력의 한계를 깨달은 것도 근대의 몰락을 부추겼습니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한 이후에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은 인간의 지각의 한계를 명확히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우주의 비밀을 다 밝히기는커녕 인간의 앎 자체에 이미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자연주의’가 퇴조하면서 지금까지 이성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많은 영역에서 적지 않은 동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정신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보다 먼저 이성의 절대성을 거부합니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 물으면서, 지금껏 이성에 눌려왔던 감정의 영역에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반이성의 길을 가기도 합니다. 이론 일변도의 탐구를 벗어나 구체적인 삶의 경험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객관적인 것 대신 주관적인 것, 주체의 경험 및 환경에 더 큰 비중을 둡니다. 그리고 우리 삶이 복잡한 상황으로 뒤엉켜 있으며 그 중심에 선 우리의 자아 역시 끊임없이 변한다고 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성을 거부하고 상대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이성으로 진리를 발견하고자 한 시도가 실패로 드러나면서 이성의 능력뿐 아니라 진리 자체의 존재마저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앎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참과 거짓 사이의 구분이 희미해졌습니다.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진리는 없고 그저 각자의 주관적 경험과 판단에 맞으면 다 진리로 수용됩니다. 이런 상대주의는 진리를 영원히 알 수 없다는 회의론의 모양을 가지기도 합니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반감은 소외되었던 존재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근대에 유행하던 성차별, 인종차별, 종교차별, 빈부차별 등을 강하게 거부합니다. 대신 비주류를 중심으로 끌어들입니다. 나그네를 향한 관심 등 뜻깊은 것들도 많지만 특별한 기준은 없어 보입니다. 오랜 세월 숨어 있던 성소수자도 이제 주류로 올라섰고 동물을 비롯한 사람 이외의 피조물도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높이로 격상되었습니다.

전체적인 것과 객관적 진리에 대한 거부는 당연히 근대 서양을 주도한 교회에 대한 거부를 포함합니다. 하지만 그 거부가 시대정신을 기독교의 원수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모더니티도 이성을 앞세워 교회를 공격했지만 교회는 그들에게 꾸준히 복음을 전했고 그런 노력 가운데 교회도 유익을 많이 얻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우리의 과제는 오늘의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복음을 바로 지키고 또 세상 정신의 지배 아래 놓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잘 전하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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