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커리어는 무엇을 지향했는가? (중략) 그가 지향했던 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살아가면서 고통을 덜 겪게 하는 것이었고, 권력 있고 금력 있는 자들이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부당하게 챙길 때 그에 저항하는 것이었으며, 그런 힘이 막강한 자들 때문에 일자리를 잃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들이 싸울 때 함께 서 주는 일이었다. (본문 중)

김선욱(숭실대학교 철학과 교수, 정치철학)

 

한 정치인이 죽었다. 그것도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그는 불법 정치자금으로 4천만 원을 수수한 혐의로 곧 특검의 조사를 받을 예정이기도 했다. 이 부분만 보면, 우리는 부패한 정치인이 막다른 골목에서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다지 마음에 담아둘 일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그 정치인이 노회찬이었다. 그의 죽음에 수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빈소를 방문하였고, 피를 토할 것 같은 심경의 토로가 연일 SNS를 메우고 있다. 이것은 그냥 한 정치인의 죽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크고 중대한,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상실이다.

 

 

그의 빈소를 찾은 사람들은 시민들, 학생들, 남자들, 여자들, 잘 닦여진 구두를 신은 사람들, 낡고 헤어진 구두나 신발을 신은 사람들, 장애인단체, 여성단체, 성소수자단체, 그가 고통을 나눈 집단해고자들, KTX 해고 노동자들 그리고 환경미화원들이었다. 물론 내로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모두 한 줄로 줄서서 조문을 했다. 시인 김응교는 “우는 사람 없는 첫날밤 상가는 영 어색하다. 울지 않는 사람들이 줄 서 있다.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되었거나, 눈시울이 약간 흔들리는 이도 있다만 대개 서운한 표정이다.”라고 썼다. 사람들은 슬픔의 울음을 터트리지 않고 억누르며 다진 마음의 결의가 있다.

 

올해 62세인 노회찬은 고교 평준화가 실행되기 전에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간 능력자였다. 그가 고등학생이 된 해는 1972년이었다. 그는 당시의 고등학교 교과서를 기준으로 보아도 불법인 일들(유신독재, 국회해산)이 정치 현실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고 학내 시위를 주동했고,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치고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다. 대학 4학년 때 용접 기술을 익혀 인천의 한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현장에서 만난 노동운동가 김지선 씨와 결혼 후 1년 만에 구속 되어 3년간 수감 생활을 했고, 1992년에 운동에서 정치로 방향을 전환하여 진보정당에서 활동하였다.

 

48세였던 2004년에 비례대표로 민주노동당의 의원이 되었고, 2005년 8월에 ‘삼성 X파일’에 나온 떡값 받은 검사 명단을 국회에서 공개했다. 삼성에 맞서 용기 있게 싸운 이는 극히 드물다. 2013년에는 ‘X파일’ 발언으로 기소되었던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왔는데 의원직 상실 조건에 해당하는 형이었다. 이후 2016년 4월 총선에서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의 커리어는 무엇을 지향했는가? 어떤 이는 사람이 평생 추구하는 것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라고 했다. 그는 달랐다. 그가 지향했던 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살아가면서 고통을 덜 겪게 하는 것이었고, 권력 있고 금력 있는 자들이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부당하게 챙길 때 그에 저항하는 것이었으며, 그런 힘이 막강한 자들 때문에 일자리를 잃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들이 싸울 때 함께 서 주는 일이었다. 작은 자들의 친구였다. 이는 예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인용하여 복음의 내용으로 가르치셨던 것이 아니었던가(사 61:1-2). 노회찬의 방법은 기만과 술수, 그리고 당한 악보다 더 큰 악을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말과 몸,다시 말해 자신의 전 실존을 바치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희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이런 일에 다 쏟았다. 자신의 자리가 위태해도 할 일은 했다.

 

어떤 분석가들은 그의 자살을 이런 희생의 연장으로 보았다. 자신이 살아서 불법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면 본인에게 말할 수 없는 음해와 거짓 폄훼가 올 것은 물론이고, 자신과 함께 신고를 겪으며 정의를 추구해 왔던 동지들뿐 아니라 진보운동 자체가 심각한 훼방을 받아, 결국 힘없는 약자들이 피해를 볼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짜뉴스 급의 언론보도와 칼럼들이 이미 시작된 상황이었다. 그의 아내가 자가용 전용 기사를 고용했다고도 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사태가 그렇게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극단적 선택 자체가 불러올 오명도 감수하려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그의 삶을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는 것 같다. 그를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나도 그런 해석에 공감할 수 있다. 그의 죽음을 이렇게 이해한 사람들은 내놓고 울 수도 없어서 울음을 삼키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걸어간 그의 결기 찬 삶의 행보를 뒤이어 가려고 하는 것 같다. 그것이 희생이었다는 진심어린 공감이 없다면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없다.

 

그의 불법자금수수 혐의도 사람들은 다른 맥락을 읽는 듯하다. 그의 개인적인 가난과 고통을, 현직 의원이 아닌 이에게 불리한 선거자금법의 부당성을 연결하여 읽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액수 4천만 원은 당혹스럽다. 해서 안 될 말이지만, 그 정도 거물이라면 목숨 값은 수십억 원은 거뜬히 넘지 않겠는가. 이제 그의 죽음이 획정한 선인 4천만 원은 시민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준이 되어 정치가를 보는 시각에 오랫동안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교회에 거리를 두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인 비신앙인들은 그 선을 기준으로 교회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첫날 저녁 SNS에 “그냥 얼굴에 침을 덮어쓰고 몇 날이라도 견디시지. 정치도 다 함께 살고자 하는 일이 아닌가.”라고 썼다. 난 그가 억울함을 덮어 쓰고라도 견디었기를 지금도 바란다. 물론 그는 그것을 이기적인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의 정치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죽음의 정치의 기운을 염려한다. 오랫 동안 정치는 적대자를 죽여서 자신이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제 정치는 의견이 다른 자들이 함께 토론하고 말로 싸우며 진행되는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 촛불시민혁명은 죽음의 정치에서 토론과 상생의 정치로 패러다임을 바꾸어버렸다. 하지만 적폐는 여전히 살아남아 섬뜩한 죽음의 기운을 흘린다. 죽음의 정치(혹은 죽임의 정치)의 기운은 반드시 우리 문화에서 뿌리 뽑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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