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해에 두 사람은 초가집을 사서 14파운드의 자금으로 ‘불우 아동의 집’(Garden for Lonely Children)을 설립하고 몇 명의 소녀를 돌보았다. (중략) 이후 이들은 후원에 관하여 기도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믿음 선교 방식으로 사역을 했는데, 초가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회를 열고, 소년들을 위한 고아원도 개원했다. 당시 페리와 패쉬의 기도 제목은 “벽돌집을 주세요”였다.(본문 중)

옥성득(UCLA 교수, 한국기독교학)

 

부산에서 미오라 고아원을 설립하다

영국에서 출생한 진 페리(Jean Perry, 1863~1935) 양은 1882년 부모를 따라 호주 퀸즈랜드(Queensland)로 이민을 갔고 언니가 운영하는 학교 일을 도왔다. 28세 되던 1891년 말 빅토리아 주 장로회 여전도회연합회의 파송을 받고 매케이(J. H. Mackey) 부부, 멘지스(B. Menzies), 포세트(M. Fawcett) 양과 함께 부산에 왔다. 도착 3개월 만에 매케이 부인 선교사가 사망하고, 매케이 선교사마저 병이 들어 멜버른으로 돌아가게 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매케이는 이듬해 무어 양과 함께 부산으로 돌아왔으며 이후 포세트 양과 결혼했다.

 

페리(오른쪽), 부산에서, 1893, 사진제공: 옥성득

 

그들은 부산진에 가옥을 매입하고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페리는 멘지스와 함께 길에 버려진 소년들을 데려와 초가집에서 ‘미오라 고아원’을 시작했다.

1894년에 영국인 여행가 비숍 여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페리 선교사는 그의 부산 여행을 안내했다. 비숍은 페리가 거주하는 초가집과 그 주위의 “역겨운 환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부부 선교사나 남자 선교사들과 달리 이들 여자 선교사들은 초가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불결한 마을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다시 부산을 방문한 비숍 여사는 여전히 같은 상황에서 그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1895년에 고아원 아이들이 13명으로 늘어나자 학교가 필요해졌고, 1895년 10월 15일 여선교사들의 선교관에서 3년 과정의 소학교인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개교했다. 그러나 페리는 얼마 후 “신앙적 견해의 차이”라는 명목으로 사표를 제출하고 호주장로교회와 인연을 끊었다. 아마도 교육 기관의 일은 다른 이들이 할 수 있다고 보고, 자신은 계속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서 일하기로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부산을 떠나서 일본을 거쳐 호주로 가서 선교 사역을 위한 모금 활동을 하였다.

일본에서 페리는 엘렌 패쉬(Ellen Pash)라는 여선교사를 만났다. 패쉬는 영국 캠브리지 길턴 대학을 졸업한 구세군 교회의 선교사로서, 영국, 프랑스, 인도에서 7년간 일하다가 건강 악화로 1895년에는 일본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두 선교사는 함께 호주의 친척 집을 방문하며 서로 친해졌고 한국에서 동역하기로 약속했다. 그들은 호주의 여러 도시를 돌며 모금 활동을 벌였다. 페리와 패쉬는 한복이나 인도 복장을 하고 교회들을 방문하여 한국어나 인도어로 찬양하며 열심히 모금 활동을 벌였다.

 

서울에서 영국전도선교회 고아원을 운영하다

두 사람은 호주와 영국 친구들의 협조를 얻어 영국전도선교회(British Evangelistic Mission)를 조직하였고, 서울에서 고아들을 위한 초교파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선교회라고는 했지만 회원은 두 사람뿐이었다.

첫해에 두 사람은 초가집을 사서 14파운드의 자금으로 ‘불우 아동의 집’(Garden for Lonely Children)을 설립하고 몇 명의 소녀를 돌보았다. 당시 서울에서 유명했던 브라운(John McLeavy Brown)경으로부터 10파운드를 받은 것이 첫 기부금이었다. 이후 이들은 후원에 관하여 기도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믿음 선교 방식으로 사역을 했는데, 초가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회를 열고, 소년들을 위한 고아원도 개원했다. 그러나 페리는 2년 동안 장티푸스에 두 차례나 감염되는 등 무리한 사역으로 건강이 악화되기도 했다. 당시 페리와 패쉬의 기도 제목은 “벽돌집을 주세요”였다.

 

페리와 패쉬의 고아원, 1904, 사진제공: 옥성득

 

열린 주일 예배: 남녀 좌석 구분 없이 드린 첫 예배 처소

고아원 구내에서 드리던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아이들과 여성이 늘어났고, 부인들이 남편과 남동생을 데리고 와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어떤 이들은 남녀가 함께 앉아 예배들 드리면 안 된다고 지적했는데, 페리는 그때까지 그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장로회 선교회의 연례 모임에서도 거론되었으나, 1910년대 초까지 장감 교회에서는 남녀 석 중간에 천막을 치거나 분리대를 놓거나, 기역자형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여자 선교사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어느 날 한 남성이 죽어가는 병상에서 신앙을 고백하자 페리는 서슴없이 세례를 주기도 했다.

 

케즈윅(Keswick) 영성으로 사회사업을 하다

오랜 초가집 생활로 건강이 악화된 두 사람은 1905년 런던을 방문했다. 페리는 1882년 이후 처음 런던에 왔기 때문에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다. 영국 경건주의 운동인 케스윅(Keswick) 영성에 오래 영향을 받았던 페리는 집회에 참석하여 영적 부흥을 경험했다. 페리는 1903-04년 하디의 원산 부흥을 경험한 후 영국에 왔는데, 이때는 웰쉬 부흥의 파도가 케스윅을 휩쓸 때였다. 페리는 케스윅 대회에서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는 연설을 할 기회를 얻었고 이때 한국에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소명을 느꼈다. 연설을 들은 모르간(R. C. Morgan) 부부 등의 후원을 받아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벽돌집’을 지을 기금이 마련되어 있었다.

러일전쟁 후의 한국은 일본의 통치를 받았고, 청년들을 지배한 주제는 ‘문명’과 ‘교육’이었다. 페리와 패쉬는 가장 비천하고 소외된 맹인과 맹아들을 위한 사역에 집중했다. 기도와 성경공부와 영성으로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두 사람의 선교론이었다.

 

진 페리가 자신이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조선인 사감(Matron) 마리아와 함께, 1903년

[출처: Chilgoopie the Glad, 1906]

 

1907년 회개의 대부흥이 한국교회를 휩쓸 때 페리는 이것을 현장에서 경험하는 복을 누렸다. 페리는 1911년까지 어린 맹아들을 돌보아 맹아 학교에 보내는 사역을 했다. 미션 홀에서 주일 예배를 드렸고, 연동교회 게일 목사가 와서 세례를 주었다. 1909-1910년 백만명구령운동이 진행되던 기간에는 10년간 가르친 맹인 청년 두 명이 전도인으로 활동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과 두 명의 전도부인과 10여 명 정도의 자원봉사 전도자들이 1910년 10월 대전도 기간에 <마가복음>을 반포하면서 전도했다. 글을 몰라 ‘답답하오’를 외치던 여성들을 가르쳐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복음을 믿어 자유인이 되게 했다.

페리는 48세 되던 1911년 영국에서 모금 활동을 한 후 서울에 와서 1915년까지 일하고 52세에 은퇴했다. 미션 홀에서는 매 주일과 매일 전도집회를 가지고 예배를 드렸다. 소녀원(Home for Destitute Girls)과 맹인소년원(Blind Boys’ Home)을 운영하면서 서울 주변의 시골 전도 사역(village work)을 진행했다. 영국에서 그녀를 지원한 이들은 매년 소녀 1인당 한 해 6파운드, 맹인 소년 1인당 6파운드, 맹인 전도사 10파운드, 전도부인 8파운드, 선교사 70파운드를 보냈다. 1년에 140달러에 해당하는 생활비였는데 이는 장로회 선교사의 1/8 수준이었다. 남장로회의 쉐핑(서서평)선교사가 가난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페리는 그보다 1/8이나 1/5 수준의 월급으로 살았던 것이다.

1911년 말부터 1912년 초까지 서울의 여학교들에서는 1906년과 같은 부흥이 일어났다. 이를 가장 기뻐한 교사 중 한 명이 페리였다. 페리는 25년 동안의 한국 사역을 마감하고 1915년 한국에서 은퇴할 때 고아원과 모든 구호 시설들을 구세군에 넘겨주었다.

 

은퇴 후의 결혼과 저술 활동

은퇴 후 영국으로 간 페리를 하나님은 전과는 다른 삶으로 인도하시고 위로하셨다. 두 번 아내를 잃은 한 홀아비의 청혼을 받아 수락했는데,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재산을 모은 25세 연상의 부자 뉴베리(Mr. Newberry)였다. 그는 페쉬 선교사와 구세군을 후원해 온 교인이었고, 페쉬 양은 그들의 결혼식 증인이 되었다.

페리는 한국 선교 활동 기간 중에 후원금 모금을 위해 다음 5권의 책을 출판했다.

 

True Stories by a British Missionary Woman. [London, n.d.]

Chilgoopie the Glad, A Story of Korean and Her Children. London, 1906.

The Man in Grey, or More about Korea. London: Patridge & Co., 1906.

Uncle Mac the Missionary. London: Patridge, 1908.

Twenty Years a Korea Missionary. London: Patridge. 1911.

 

런던의 한 작은 출판사가 이를 모두 출간해 주었는데, 수익은 한국의 고아와 맹아들을 위해 사용했다. 진 페리는 적은 돈으로 검소한 삶을 살며 작은 자들을 섬긴 가난한 선교사였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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