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百)의 그림자』(민음사, 2010)라는 소설이 있다. 2005년 등단하여 이제는 우리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된 황정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장편이라고는 하지만 생각보다 얇고, 얇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이 소설은, 철거 예정인 전자상가를 배경으로 ‘무재’와 ‘은교’ 두 사람의 순진무구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상적인 대목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 두 개의 장면을 소개해 본다. (본문 중)

정영훈(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백(百)의 그림자』(민음사, 2010)라는 소설이 있다. 2005년 등단하여 이제는 우리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된 황정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장편이라고는 하지만 생각보다 얇고, 얇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이 소설은, 철거 예정인 전자상가를 배경으로 ‘무재’와 ‘은교’ 두 사람의 순진무구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상적인 대목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 두 개의 장면을 소개해 본다.

 

하나. 무재는 7남매를 둔 아버지가 빚을 지게 된 과정과 그 빚을 떠안게 된 자기 처지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런 것[빚:인용자]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腹]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처음에 은교는 “빚”을 돈 이야기로 이해했다. 식구가 많으면 으레 사는 게 힘들기 마련이니까. 부식비며 교육비며 자식들을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이 좀 많겠나. 가난한 처지의 무재이고 보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터. 그렇지만 듣고 보니 그게 아니다. 무재의 이야기인즉슨,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빚을 지게 된다는 것이다. 태어나고 자라고 무엇인가를 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되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니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빚을 지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아버지가 남긴 빚을 대신 갚으며 살아가는 것이 일종의 숙명이라면, 그리고 그 빚이 단순히 돈만 의미하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우리 몸을 혹사해야 이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지고 갚아야 할 빚만도 산더미 같을 텐데 말이다. 무재는, 그리고 이 말에 공감하는 은교는, 빚을 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요청으로 바꾸어 놓는다. 두 사람이 악해질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이 이웃에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빚을 지고 있으므로 갚아야 할 의무가 있고, 그러니 도와달라는 이웃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빚진 채 살아간다는 의식은 윤리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둘. 전자상가를 이루는 다섯 개 동 가운데 하나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공원이 들어선다. 그런데 네 사람이 앉을 만한 길이의 의자 중간쯤에 가로 막대가 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은교가 묻는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나눠 놓았을까요.” 무재의 대답이다. “눕지 말라는 의미죠.” 공원을 가꾸어 놓은 사람들에게는 부랑자들이 의자를 침대 삼아 발 뻗고 누워 있는 모습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가로 막대를 만들어 놓은 건 이런 일을 미연에 막겠다는 뜻이었을 테고. 의자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이런 식의 발상이 깃들 자리가 조금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의자를 만들라고 명령한 누군가는 자신이 평생 빚(무재가 말한 의미의)이라고는 져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빚을 진 적이 없으니 갚을 것도 없고, 손에 쥔 것이 온전히 자기 힘으로 얻은 것이니 그것이 누군가가 헐벗고 굶주린 대가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 그 누군가가 그렇게 된 데 대해 자기가 책임질 일은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고, 그러므로 자기 소유의 일부를 나누어 이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을 여지도 없는 사람……

 

문득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떨어진 이삭을 애써 주우려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을 떠올리게 된다. 이 명령 속에는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은 늘 우리 곁에 있을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는 당부가 담겨 있다. 선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도 행할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하지 않음’을 통해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푸는 이 일을 끝내 허락하지 않는다. 조금 게으르게 놓아두고 약간만 무관심하고 그저 내버려둘 수도 있었을 그것을 굳이 ‘하게’ 만들어,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선을 행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삶이 있고, 사는 것 자체가 빚을 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삶이 있다. 아무 공로 없이 거저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느 쪽에 속할 것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빚진 자라는 인식은 도달점이기도 하지만 출발점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이 우리 앞에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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