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가위 기술은 특정한 단백질과 이를 염색체 상의 특정 위치로 이끄는 gRNA를투여하여 세포 내 DNA의 특정 부분이 절단되게 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의 핵심은 절단해야 할 부분을 특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절단이 발생하면 DNA가 스스로 그 부분을 수선하기 위해 변이를 일으키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유전자를 치환해 넣을 수도 있다.(본문 중)
손화철(한동대학교 글로벌리더십학부 교수, 기술철학)
생물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세포 핵 안에는 DNA가 있다. DNA의 일부는 유전자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개체의 형질을 발현하고 그 형질을 자손에게 이어가게 한다. 어떤 돼지는 근육이 발달해 있고, 어떤 토마토는 크기가 작으며, 어떤 인간은 심각한 질환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은데, 이것이 모두 유전자의 다양성 때문이다. 어떤 유전자가 어떤 형질을 발현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는 규명되어 있고, 수많은 가능성의 조합들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유전자 가위 기술은 특정한 단백질과 이를 염색체 상의 특정 위치로 이끄는 gRNA를투여하여 세포 내 DNA의 특정 부분이 절단되게 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의 핵심은 절단해야 할 부분을 특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절단이 발생하면 DNA가 스스로 그 부분을 수선하기 위해 변이를 일으키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유전자를 치환해 넣을 수도 있다. 이 기술의 세계적인 권위자 중 한 사람이 서울대학교의 김진수 교수이다.
얼핏 생각하면, 유전질환을 일으키는 DNA의 특정 부분을 유전자 가위 기술로 잘라내어 그 가능성을 제거하거나, 치료용 유전자로 치환해서 고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세포에 DNA가 있으며 그 세포 하나하나를 다 치료할 수는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유전자 가위 기술을 통한 세포치료는 조혈세포를 이용할 수 있는 혈액과 관련된 유전질환의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 기술을 유전병 치료에 사용하는 적극적인 방법이 있으니, 바로 수정 초기에 급속하게 분화하고 있는 배아에 이 기술을 적용하는 것이다. 유전질환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수정란에 유전자 가위를 주입하여 유전자의 특정 부위를 절단하고 치료한다면, 치료된 세포가 분화하여 자란 사람은 유전질환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이미 이 실험은 동물에게 적용되어 일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인간 배아에 대한 실험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김진수 교수는 이러한 실험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배아를 대상으로 한 실험을 할 때 그 검증 과정에 일부 참여하여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유전자 가위를 통한 배아의 유전자 치료를 임상에 적용하지 않는 대신 연구 목적의 실험은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연구 목적의 실험을 한다는 것은 시험관 아기 시술을 하고 남은 난자나 배아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고 결과를 확인한 즉시 폐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서 많은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인간 배아 혹은 수정란의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난자나 배아를 실험용으로 쓰고 폐기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고, 치료 목적이라 하더라도 인간 유전자에 손을 대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물론 착상이 이루어지기 전의 배아는 아직 동일성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착상 전 분화되어 쌍둥이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 배아를 하나의 개체로 볼 수 없다) 한 인격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다소 완화된 입장도 없지 않지만, 여전히 인간으로 자라날 수 있는 배아에 대한 실험과 폐기는 부담스럽다.
그러나 이 기술이 가지고 있는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오래된 생명윤리의 문제인 “언제부터 인간인가?”라는 물음에 가려져서는 안 된다. 인간 유전자 치료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유전자 가위 기술은 엄청난 함의를 가진다. 사실상 모든 생물들의 유전자 변이를 마음대로 유도할 수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 기술은 저렴하고 운용하기 쉬워서 이미 수많은 실험과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한 모임에서 김진수 교수는 이 기술이 생물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졌던 DNA를 조종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이 생명의 주관자(master)가 되게 하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물론 인위적으로 DNA의 구조를 바꾸는 육종의 노력이 늘 있어왔다. 좀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DNA 변이를 추구하는 것이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디자인에 따라 곡식이나 동물의 DNA를 바꾸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그 함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독교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이 고민은 인간 배아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 반대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생명과학이 4차 산업혁명의 핵심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유전자 가위 기술에 대한 고찰은 기독교회가 미래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의 문제와 직결된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기술을 마냥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그 기술의 발전을 어떻게 재갈 먹이고 적절한 방향으로 인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오늘날 김진수 교수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온 국민이 10여 년 전 황우석 배아 줄기세포 사기 사건의 트라우마 때문에 이 논란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우석 사태 이후 우리나라의 생명윤리 관련 지침들은 매우 엄격해졌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개신교의 기여는 거의 없었다. 황우석 사건 당시에도 개신교회는 제대로 된 입장문 하나를 제출하지 못했다. 황우석의 프로젝트에 대한 강력한 반대 입장을 밝힌 가톨릭 교회나 연구에 찬성한 불교와 크게 대비되었다.
이번에는 그 때보다 상황이 더 낫다. 기독교생명윤리학회를 중심으로 나름대로의 활동과 입장 표명이 없지 않다. 그러나 개신교회 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도 유전자 가위 기술 문제와 관련해서는 좀 전에 말한 인간 배아의 문제에만 몰두하는 듯하다. 유전자 가위 기술은 전방위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기술이므로 이 기술 자체에 대한 기독교계의 심도 있는 논의와 고민이 필요하다. 이 기술의 적용 방법과 범위를 정교하고 정밀하게 규정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