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교회와 신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이 명백하게 보여주는 반기독교적 측면을 강조하며 경계합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 호의적인 신학자 제임스 스미스는 양극단의 입장을 배제할 것을 권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마귀도 구세주도 아니며 모두에게 모호한 카멜레온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교회에 유익한 점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본문 중)

권수경(고려신학대학원 초빙교수)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의를 내리는 행위 자체가 포스트모더니즘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흐름 내지 경향 정도로 규정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한 설명으로는 지난 세기 막바지에 미국의 공영방송 서비스 (PBS)가 소개한 설명이 무난할 것 같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반적이고 광범위한 용어로서 문학, 예술, 철학, 소설, 그리고 문화 및 문학 비평 등등에 적용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주로 실재(reality)를 설명하려는 과학적 또는 객관적 노력에 전제되는 확실성에 대한 반작용이다. 본질상 포스트모더니즘의 출발점은 실재는 그 실재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단순히 거울처럼 반사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자신의 독특하고 인격적인 실재를 이해하려 하는 가운데 형성된다는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집단, 문화, 전통, 또는 인종에 다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설명에 대해 극도로 회의적이며 대신 각 개인의 상대적인 진리들에 초점을 맞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에서는 해석이 모든 것이다. 실재는 세상이 우리 각자에게 갖는 의미를 우리가 해석함으로써만 생겨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추상적 원리 대신 구체적 경험에 의존하며, 개인의 경험의 결과는 확실하거나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오류가 있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언제나 잊지 않는다.”

두드러지는 경향은 불확실성, 상대성, 구체성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와 신학자들이 그 흐름이 명백하게 보여주는 반기독교적 측면을 강조하며 경계합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 호의적인 신학자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1]는 양극단의 입장을 배제할 것을 권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마귀도 구세주도 아니며 모두에게 모호한 카멜레온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교회에 유익한 점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주도한 사상가의 대표로 보통 리오타르 (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2004),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를 꼽습니다. 세 사람 모두 프랑스 사람이면서 동시에 무신론자들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늘 모호성의 안개에 싸여 있는 만큼 이들을 무신론자로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세 사람은 각각 담론, 텍스트, 권력 등의 개념을 이용해 포스트모더니즘의 골격을 세워 놓았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이 세 인물을 ‘파리에서 온 마귀’라 부르는 반면 제임스 스미스[1]는 이들이 근대성에 물든 교회를 건져 초대교회의 원형을 회복하게 돕는다고 보고 이들을 세속의 삼위일체라 부릅니다. 이 세 사람의 사상을 양쪽 입장을 고려하면서 살펴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골격을 상당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좌측부터) 리오타르, 데리다, 푸코

 

리오타르, 데리다, 푸코

리오타르는 예술 분야에서만 사용되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다른 여러 영역에 확산시킨 사람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대담론 (Meta-narrative)’에 대한 불신으로 규정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담론은 단순한 이야기라기보다 특정한 관점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근대성을 지닌 논리 일변도의 관점이 아닌 감정과 의지와 경험 등 삶의 다양한 측면을 포괄하는 그런 관점입니다. 개인이나 집단이 가진 자기만의 이야기를 지역적 담론이라 부른다면, 거대담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이야기로서 보통 사용하는 세계관 개념과 통합니다. PBS의 규정에 나오는 “모든 집단, 문화, 전통, 또는 인종에 다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설명”입니다. 그런 거대담론을 불신한다는 것은 곧 온 우주의 모든 것을 하나로 꿸 수 있는 통일된 원리 같은 것은 없다는 주장이 됩니다.

그래서 다수의 그리스도인 학자는 리오타르의 입장이 온 우주를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로 보는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킨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스미스는 리오타르가 말하는 거대담론은 근대의 이상인 보편이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에 대한 불신은 근대성에 대한 불신이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공격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리오타르의 주장이 우리 기독교 신앙이 개념들의 종합이 아닌 담론적인 것임을 드러내 주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것을 여러 담론이 공존하는 시대에 우리의 고백을 통해 우리의 담론을 전해야 할 사명에 연결시킵니다.

데리다는 해체 (deconstruction) 또는 해체주의라는 개념을 확립한 사상가입니다. 해체란 텍스트와 그 텍스트의 의미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규정으로서 특정 본문이 가리키는 의미 또는 그 본문이 가진 구조적 통일성과 반대되는 것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불안정한 것인지 밝혀내고자 합니다. 데리다의 사상은 종종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많은 기독 학자들이 이 구절을 진정한 실재는 텍스트뿐이라는 뜻으로 보고 데리다가 외부 물질의 존재마저 부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입장은 우리의 세계 경험도 전부 우리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하이데거의 주장과 연결되어 PBS의 문구처럼 “해석이 모든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 결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등 성경 텍스트 너머에 있는 역사적 사건의 객관성에 대한 의심 또는 무관심을 낳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데리다의 이런 입장에 대해 스미스는 해석되지 않은 실재 그 자체에 접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어 성경의 중심성을 강조하고, 우리가 다 언어를 통해 이미 해석된 실재를 접하게 됨을 밝혀 해석의 중심지인 공동체의 역할을 일깨워 교회에 큰 유익을 준다고 봅니다. 데리다의 주장은 텍스트 너머에 있는 소위 객관적 의미에 집착하기보다 그 텍스트를 통한 성령의 내적 역사에 치중해야 한다는 교훈으로도 적용됩니다. PBS의 정의에 담긴 경험의 중요성입니다.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밀접한 관계를 분석합니다. 핵심 주장은 ‘힘이 곧 지식’이라는 것인데 이는 아는 것이 힘이라 하였던 베이컨을 뒤집은 것이면서 또 권력에의 의지를 부르짖은 니체와 통합니다. 푸코는 객관적 진리라는 근대적 이상을 비판하면서 진리라는 개념 이면에 숨은 권력의 역할을 다양한 실례를 통해 폭로합니다. 푸코의 이런 분석을 많은 그리스도인 학자들이 호의적으로 수용합니다. 그런 역학의 존재를 인식하면 그것을 극복할 대안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 특징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압축과 생략이 많아졌습니다. 다음 글부터는 리오타르, 데리다, 푸코를 한 사람씩 조금 더 자세하게 살피면서 이들의 사상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 갖는 뜻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기독교 철학자로 오순절 전통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개혁주의 전통 및 현대 프랑스 철학을 연구했다. 캐나다 기독교학문연구소에서 제임스 올타이스의 지도 아래 철학적 신학을 공부하고, 빌라노바 대학교에서 존 카푸토의 지도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로욜라 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현재 캘빈 칼리지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근대성의 세속화 문제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현대적으로 수용하는 ‘급진정통주의’를 주장하면서 현대 사회 및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문화 비평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저작으로『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IVP),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살림출판사), 『급진정통주의 신학』(기독교문서선교회), 『칼빈주의와 사랑에 빠진 젊은이에게 보내는 편지』(새물결플러스), 『해석의 타락』(대장간) 등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IVP) 저자 소개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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