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을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맞는 말이지만 실천적 의미가 약하다. 일상의 언어로 다시 말하자면, ‘세상의 고통에 응답하는 존재’일 것이다. (중략) 내가 서 있는 자리, 삶의 영역에서 소중한 것들을 지키지 못한 실패의 경험도 하나의 고통이다. 그런 경험은 대개 고통과 좌절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실패 속에서도 부르심에 응답하는 존재로 세워진다. 그 부르심에 대답하는 위치로 나가는 순간, 들끓음이 시작된다. 나에게는 그 순간을 경험한 것이 1992년이었다. 학교 내에서 불법 문제와 싸우다가 좌절했고, 신앙도, 교사로서의 자존감도 바닥을 칠 때였다. 그런데 그 실패 속에서 부르심을 받고 응답했고 기윤실교사모임을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온 것 같다.(본문 중)
대담: 송인수(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박제민(기윤실 사무처)
어떤 분이 SNS에 공직을 맡게 되었다는 인사를 올렸다. 여러 축하 인사 속에 낯익은 이름이 있었다. 송인수 대표의 다음과 같은 댓글이 있었다.
사람 속에 들끓는 것을 가지고 일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가진 것을 폭발시키지 못합니다. 폭발시킬 곳을 찾은 것 잘하신 것입니다. … 공직에 들어가실 때 반드시 ‘이것을 가지고 들어가겠다, 이 목표를 넘어서면 멈춘다’는 ‘인생의 내규’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그게 없으면, 보이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안목도 사라지고 자칫하면 길을 잃게 됩니다.
이런 조언은 아무나 할 수 있은 것은 아닐 것 같았다. 사무실이 서로 가까운 곳에 있어 골목에서 종종 마주치곤 했지만, 진득하게 앉아서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찾아갔다. 들끓음에 대해, 인생의 내규에 대해 듣고 싶었다.
박제민(이하, 박): 댓글이 인상적이었다. 직접 만나서 “들끓는 것”에 대해 묻고 싶었다.
송인수(이하, 송): 공직에 간다는 소식에 대해 축하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막상 공직 사회에 들어가서는 주변의 흐름에 휩싸여 존재감을 잃는 사람을 많이 봤다. 공직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면, 들어가기 전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가슴속에 그 목표의 명확한 좌표를 품고 들어가야 현실의 유혹들 속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다. 그게 정리가 안 된 채로 들어가면 수많은 이해관계에 포섭되어 결국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최근에 공직을 맡게 된 후배에게도 목표를 몇 가지로 정리하고 들어가서 늘 되뇌라고 했다. 그래야 길을 잃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꼭 공직만이 아니다. 우리 생이 그렇다. 생을 통해 이룰 것이 무엇인지, 내게 부여된 뜻이 무엇인지 그 좌표를 가슴속에 품지 않는 인생은 도중에 길을 잃기 쉽다.
박: 송 대표님의 들끓음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송: 들끓는다는 것을 어떻게 이야기 할까? (잠시 생각한 후 말을 이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냐’라는 질문과 연결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을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맞는 말이지만 실천적 의미가 약하다. 일상의 언어로 다시 말하자면, ‘세상의 고통에 응답하는 존재’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한계가 있어 모든 고통에 응답할 수는 없다. 따라서 어떤 고통에 응답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내가 서 있는 자리, 삶의 영역에서 소중한 것들을 지키지 못한 실패의 경험도 하나의 고통이다. 그런 경험은 대개 고통과 좌절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실패 속에서도 부르심에 응답하는 존재로 세워진다. 그 부르심에 대답하는 위치로 나가는 순간, 들끓음이 시작된다. 나에게는 그 순간을 경험한 것이 1992년이었다. 학교 내에서 불법 문제와 싸우다가 좌절했고, 신앙도, 교사로서의 자존감도 바닥을 칠 때였다. 그런데 그 실패 속에서 부르심을 받고 응답했고 기윤실교사모임을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박: 지금은 많은 시간이 지나 담담하게 말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고민이 굉장히 컸을 것 같다. 어떻게 확신에 이르게 되었나?
송: 학교 내의 비윤리적 관행을 바로잡고 수업 준비를 열심히 했다.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교실 바깥 학교와 교육계 전체를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교육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했고, 그런 자리로 가야만 했다.
2002년 기독교사대회 준비를 위한 대표자들 모임에서 박상진 교수(장신대)가 설교를 했다. 그는 문득 “하나님은 달걀 프라이보다는 통닭 바베큐를 원하신다”는 말을 했다. 하나님은 이 운동을 위해 자기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드리는 사람을 원하신다는 말을 하면서 꺼낸 비유였다. 재밌는 말에 다들 웃는데, 나는 울고 말았다. 그걸 부르심으로 들은 것이다. (이 말을 하며 송 대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부르심의 기억을 잊을 수 없는 듯했다.) 저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내가 피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불안감이 사라졌다. 그전까지 나는 교직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불안감이 몰려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판단을 구하곤 했지만 그 불안을 해소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박 교수님의 말로 불안이 사라지고 안정감이 찾아온 것이다. 그후 더 이상 누군가를 찾아다니며 불안 해소용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 담담히 교직을 내려놓는 과정을 거칠 수 있었고 오히려 후배들과 이사들에게 내가 교직을 내려놓아야 할 이유를 설득할 수 있게 되었다.
박: 불안감이 사라지자, 조언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설득하게 됐다는 점이 인상 깊다.
송: 그렇게 전임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들끓음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솔직히 말하면 늘 뜨거울 수는 없다. 데이터와 싸우고 디테일을 챙기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학교를 떠났으니 지켜야 할 아이들은 멀리 있고, 아이들의 고통을 데이터를 통해 넘겨짚을 수밖에 없다.
교사일 때는 한 번도 아이들의 고통을 느끼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늘 옆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퇴직하고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일을 하다 보니 아이들의 고통이 직접 느껴지지 않아 힘들었다. 매일 아침 기도할 때마다 아이들의 고통이 느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를 하는 것이 너무 아팠다.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목소리도 살짝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상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메마른 시기를 넘어가는 거다. 때로는 들끓음이 있고, 때로는 들끓음을 덜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덜 들끓는다고 멈추거나 들끓는다고 해서 질주하는 것이 아니다. 일희일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박: 들끓는다는 것이 잠시 펄펄 끓는 냄비가 아니라 지글지글 오래 끓어가는 가마솥의 뜨거움 같다.
송: 몸도 많이 약해졌고 힘겨움도 많았다. 하지만 일관되게 나를 움직여온 정체성은 ‘기독 교사’다. 이제는 교사보다 시민운동가로 살아온 시간이 더 많아졌지만, 스스로는 늘 기독 교사, 예수를 따르는 선생, 아이들을 위해 학교 밖에서 싸우는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사람들은 성공보다는 행복을 원한다. 중요한 변화다. 그런데 나는 생각이 다르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 교사로 살 때가 내 인생의 절정기였다. 교사로 사는 것이 너무 행복했고 ‘행복감’의 기준으로 볼 때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실제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안 갈 거다. 그때 나는 행복했지만,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내 행복이 중요한가? 아이들의 고통이 중요한가? ‘세상의 고통에 응답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배웠는데 내 행복에 머무를 수 없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고통에 응답하는 삶을 살면 어려움도 생기지만, 그 삶도 말할 수 없이 빛나는 삶이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복이다.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삶이 주는 보람과 만족감도 풍요로운 복이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감정을 많이 누리면 좋겠다.
박: 지금까지 말한 내용이 송 대표님 인생의 내규 같다.
송: 딱히 정해 놓은 것은 아닌데, 그럴 수도 있겠다. 내 속의 들끓는 과제, 내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네가 해보라’는 응답이 주어질 수 있다. 그 순간 사람은 담대해진다. 과제와 내 한계의 간격은 그 과제로 나를 옮겨놓는 순간 성령께서 메워주신다. 큰 사랑이 필요한 자리에 나를 던져버리니 사랑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주시는 것이다. 그 부르심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고 관심을 분산시키는 것들과 자주 사소한 싸움을 한다. 30년 전엔 좋아하던 클래식 테이프를 다 버렸다. 퇴직할 땐 커피를 끊었다. 요즘은 설탕과 싸우고 있다. (웃음)
박: 갈수록 군더더기 없는 꽉 찬 삶을 사는 것 같다.
송: 스마트폰도 방해가 되더라. 2010년 무렵 1년 정도 썼는데 너무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그래서 2G폰으로 바꿨다. 그러니까 독서하고, 메모하고, 글 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출퇴근하는 2시간이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 되었다. 조금 불편하지만 기윤실 정신이 남아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것 같다.
박: 들끓는 것을 찾는 사람들에게 조언한다면?
송: 들끓음을 찾는 것 그 자체를 목표로 삼으면 공허하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자연히 그분의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도처에 주님이 아파하시는 것이 있는데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어떤 아픔에 응답하고 직면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실패해도 좋다. 실패를 경험하면 그 실패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기개가 생기기 때문이다. 예수 제자로서 세상의 고통에 직면하는 것이 들끓음의 시작이다.
<좋은나무>를 후원해주세요.
관련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