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해, 예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삶의 통제권 상실이나 변화에 대한 부적응은 우리에게 실존이 위협받는 두려움을 일으킨다. 갑자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음을 발견하며 무능감이나 무기력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드러낸다. 또한, 위기 속에서 두려움을 경험하며 우리가 내린 선택은, 우리를 더 깊은 고통으로 이끌 수도 있고 성장의 기회로 이끌 수도 있다.(본문 중)

곽은진(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상담학 교수, 기윤실청년상담센터WITH 공동소장)

 

위기는 잊고 지내던 ‘나’의 실체를 직면하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선물이다. 위기가 오면, 익숙하던 것들이 낯설어지고 편안했던 것들이 불편해지고 함께했던 관계들이 단절되어, 우리가 갖고 있던 삶의 통제권이 무력하게 된다. 익숙하던 삶의 영역들이 유지되지 않는 현실 안에서, 변화된 상황에 부적응 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의외의 낯선 나를 만나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지난해 갑자기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와 일상의 모든 것을 바꿔버린 코로나19로 인해, 예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삶의 통제권 상실이나 변화에 대한 부적응은 우리에게 실존이 위협받는 두려움을 일으킨다. 갑자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음을 발견하며 무능감이나 무기력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드러낸다. 또한, 위기 속에서 두려움을 경험하며 우리가 내린 선택은, 우리를 더 깊은 고통으로 이끌 수도 있고 성장의 기회로 이끌 수도 있다.

살면서 어려움은 늘 만나게 된다. 그럼에도 여느 위기들과 이 코로나19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무엇일까? 답하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고 싶다. 가족이 지금처럼 한 공간에서 이처럼 오랫동안 지내본 적이 있었는가? 가족이 이렇게 자주 함께 집밥을 먹어본 적이 있었는가? 지금처럼 한 공간에서 서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가까이 보게 된 경우가 있었는가? 이렇게 많은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 실제로는 뭔가를 하고 있겠지만 – 소소한 일들로 보낸 적이 있었는가? 지금만큼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었는가? 코로나19가 가져온 위기가 다른 위기들과 다른 점은 외부와의 관계를 단절시켜 어쩔 수 없이 내부를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내부와 접촉하는데 서툴고 어색하여 불편과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 istockphoto.

 

기독교는 모이기를 힘쓰고 모임 자체가 신앙의 본질과 닿아 있는 종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모이지 못한다는 것이 기독교인 개인의 삶과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코로나19 이후 상담을 받는 많은 신자들이 우울, 불안, 분노 조절의 어려움을 보이고 있으며, 그 결과로 관계의 갈등, 개인적 무기력감과 무가치감,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을 경험하는 것 같다. 문제를 초래한 원인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설명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모든 대면 활동이 중단되었을 때 나타난 양상들은, 내적 문제인 ‘자기 부재’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 부재의 사람들은, 첫째로, 기능 수행을 중심으로 살아가며 수동적 삶에 익숙하다. 기독교인들은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려는 간절함을 늘 지니고 있다. 이런 마음은 교회 내의 수많은 훈련 프로그램들, 교회 사역과 관련된 모임, 직분에 따른 사역, 정기적인 기도회와 특별 기도회 등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때로는 평신도의 교회 활동 참여 시간이 전임 사역자 못지않은 경우도 있다. 어떤 이는 교회 일정 시간표대로 생활 시간표를 구성하여 교회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한 본분으로 여긴다.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갑자기 교회의 일정이 멈추고 참여할 프로그램도 전부 없어지자,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다가 무력감에 빠진다. 빈 시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모르는 자신과 직면한 것이다.

자율적으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과 공유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제시한 시간표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다 보니, 홀로 남은 시간에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기 어려워 공허감과 무능감, 할 일이 없다고 느껴지는 무기력과 무가치감이 찾아든다. 오롯이 홀로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이 어렵다. 교회 일을 못 하니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무기력한 종으로 느껴진다. 누군가가 교회 프로그램 참여나 교회 사역만이 하나님 앞에서 존재 가치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어도, 교회 내 역할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해온 사람에게는 이런 말이 오히려 공허감과 엄청난 무기력감을 줄 수도 있다. 주도적, 능동적으로 하나님과 대면하지 못하고, 홀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어색하고,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무능감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신앙생활과 개인의 삶이 수동적으로 되어 있다는 의미다. 잠잠히 하나님 앞에 진정한 나로 머무는 것은 교회 내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만 가능하다고 느낀다.

둘째로, 자기 부재의 사람은 자신을 기능 수행자로 인식하므로, 자신의 존재 가치가 자기에게 부여된 직분이나 역할에 의해 결정된다고 느낀다. 이럴 경우 대면 관계의 단절은 존재를 위협하는 고통이 될 수 있다. 주변 교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이들을 괴롭힌다. 일과 역할은 존재와는 다른 것이므로 건강한 사람은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교회 안에서 역할이 없어지고 일을 평가해 주던 대상과도 단절되면서 자신을 확인받을 기회를 잃었다고 느낀다. 자신의 존재감, 즉, 내가 누구인지, 잘하고 있는지를 외부의 인정으로부터 확인받았던 이들은, 이 기반이 흔들리면서 자신에 대해 혼란과 불안을 느끼며 무기력을 동반한 우울감에 빠진다.

‘나’의 부재는 그 자리를 대신할 누구나 무엇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 자리를 하나님의 일이나 하나님과 관련된 다른 사람이 대신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그 자리에 있기를 원하신다. 또한, 지금까지 우리의 헌신과 사역의 중심이 하나님이었는지 하나님의 일이었는지를 분별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중심이었다면, 잠시 하나님의 일이 멈춘다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불안이나 우울감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일이 멈춘 것이지 하나님이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도 여전히 나로서 존재한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으며, 나의 존재를 상실하게 만드는 외부적 요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부재의 사람에게는 외부의 무엇이 그의 존재를 결정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삶에서 2020년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나의 모습을 일깨워주고, 일상의 소소한 일들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주변 사람들이 사라진 일상에서 잠시 우울함이나 외로움을 경험할 수는 있겠지만, 대신에 홀로 보내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만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해 주었다. 하나님과의 이런 만남을 통해 우리는 구원을 누리며 생명력을 회복하게 된다. 이것은 곧 영성의 회복이다.

지금은 수많은 기능을 수행하도록 훈련된 ‘나’가 아닌, 주님의 온전한 창조물인 ‘나’로서 하나님 앞에 설 때이다. 기능의 수행, 일 중심의 신앙생활은 우리의 성화를 약속하지 않는다. 또, 현장 예배의 멈춤이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으며, 교회 생활의 멈춤이 우리의 존재를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는다. 잠시 멈추고 하나님과 잠잠히 시간을 보내며,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과연 무가치한 일일까?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는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하나님은 코로나19를 통해 우리의 ‘자기 부재’ 상태를 돌아보게 하신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닌, 수동적으로 교회 활동들에 초점을 두고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 하신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이나 다른 누구가 아닌, ‘나’와 만나길 원하신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외부의 영향에 휘둘려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상태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래가 아닌 반석 위에 지은 집처럼 굳건한 내면의 힘을 가진 ‘나’로 서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현재의 고립과 단절, 외로움, 통제권 상실의 무기력감을, 하나님과 오롯이 대면하기 위한 좋은 기회로,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통로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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