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후 예수님이 처음 하신 일 중 하나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평강을 두 번 비시고, 파송하시고,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 부활 후의 세상에서 제자들에게는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 평화, 파송, 성령. 이 세상에 파송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평화를 만드는 자가 예수쟁이들이다. (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부활 후 예수님이 처음 하신 일 중 하나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평강을 두 번 비시고, 파송하시고,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 부활 후의 세상에서 제자들에게는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 평화, 파송, 성령. 이 세상에 파송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평화를 만드는 자가 예수쟁이들이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19-22, 개역)

 

그런데 『신약전서 구역』(1906, 1911)에서는 마지막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저희를 향하사 기운을 불며 가라사대, “성신을 받으라.”

 

“숨을 내쉬며”보다 “기운(氣運)을 불며”가 좀 더 생생한 그림 언어로 느껴진다. 왜 100년 전에는 ‘숨’ 대신 ‘기운’을, ‘성령’ 대신 ‘성신’을 사용했을까? 숨을 내쉰 것일까? 기(氣)를 불어 넣은 것일까?

 

중국에서는 상제-성신, 일본에서는 신-성령

 

중국에서 영국 선교사들은 God을 ‘상제’(上帝)로 번역했고 그 짝은 ‘성신’(聖神)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God을 ‘신’(神)으로, Holy Spirit은 ‘성령’(聖靈)으로 번역해서 사용했다. 중국에서는 전자가 95% 이상, 후자는 일본에서 99% 이상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 아래 성경을 번역하면서 신(神, 가미)과 성령을 사용했다.

중국에서 용어 논쟁을 할 때, 상제/신과 더불어 성신/성령을 토론했는데, 당연히 루아흐(히브리어), 프뉴마(헬라어), Spirit, 성령에 대한 용어로 영(靈), 신(神), 혼(魂)과 함께 기(氣)와 풍(風)도 논의했다. 일부에서는 성풍(聖風)을 선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氣)나 기운(氣運)은 일찍 배제되었다.

​다만 이 구절(요 20:22)은 숨(호흡, 기운, 바람)을 내쉬며 부는 모습이므로 일찍 한문 성경 대표자역본(문리본)에서 “噓氣 曰 受聖神”이라 번역했고, 따라서 구역에서는 ‘기운을 불다’(噓: 불 허)와 ‘성신을 받으라’로 번역했다. 한문 문리본의 영향이다.

​그러나 로스역『『예수셩교젼셔』(1887)는 “기를 불어” 대신 “숨을 불어”로 수정했다. 로스는 기(氣)를 불었다고 하면 한국인이 성령을 기(氣)로 오해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로스는 상제의 대응어인 ‘하나님’을 쓰면서 성령에 대한 용어는 ‘성령’을 채택했다. 그의 독특한 결정이었다.

 

『예수셩교젼셔』(1887) ⓒ옥성득

 

서울의 언더우드 등이 번역하고 1906년 공인본으로 완성 출판한 구역(舊譯) 신약전서에서는 아래에서 보듯이 상제의 대응어인 ‘하ᄂᆞ님’과 그 짝인 ‘성신’을 채택했다. 그러나 한문 문리본의 영향으로 “기운을 불며”로 번역했다.

 

새 맞춤법으로 고친 『신약전서 구역』(1969년 판) (옥성득 소장) ⓒ옥성득

 

『셩경 개역』(1939) (옥성득 소장) ⓒ옥성득

 

그런데 1939년 개역에서는 다시 로스역을 따라 ‘숨’을 채택하되 ‘불며’ 대신 ‘내쉬며’로 하고, 일본어 성서의 영향으로 ‘성령’을 사용했다. 참고로 일본어 대정(大正) 개역 신약성서(1917)는 “息いきを吹ふきかけ言いひたまふ『聖せい靈れいをうけよ”로 번역했다. “숨을 불며”에 가깝고 “거룩한 영”을 사용했다.

 

이 말삼을 하시고 뎌희를 향하샤 숨을 내쉬며 갈아사대 셩령을 밧으라.

 

결론

 

“숨을 내쉬며”로 번역하거나 “기운을 불어넣으며”로 번역하거나, 부활의 평화를 맛보는 것이 중요하다. 성신을 받거나 성령을 받거나, 받고 그 힘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부활 후의 삶의 양식은 파송받은 자(선교사)로 사는 것이며, 그의 목적은 평화를 주는 것이며, 그 수단은 성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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