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사회는 많은 면에서 급진적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 흐름 속에서 결혼과 가정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과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과 선택에는 시대의 풍조를 따르는 것도 있고, 그리고 앞세대보다 세상을 위해 더 유익한 길을 선택하려는 것도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이웃과 세상을 향해 열린 선택을 하느냐 여부입니다. 이웃과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삶을 추구한다면, 결혼, 비혼, 아이 없는 결혼, 모두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자기 가족에게만 갇혀 있는 삶의 방식은, 어떤 모습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본문 중)
이시종(목사, 더불어숲평화교회)
지난달에 교회 안에서 교제하던 두 교우가 결혼을 했는데 우리 부부는 결혼식에서 공동 주례를 담당하였습니다. 주례에 앞서 새로이 가정을 꾸리게 된 두 사람과 교제하면서 어떤 가정을 만들어 가려고 하는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우리 부부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가진 생각과 태도는 우리 세대의 것보다 훨씬 더 평등하고 서로를 더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결혼을 더 기대하고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주례사를 준비하면서 아내와 저는 우리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지난 24년 결혼 생활을 통해 우리가 인간으로서 많이 성장하였음을 서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과정에서 수많은 파열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마치 성 삼위 하나님이 각각의 위격으로 존재하시지만 사랑으로 서로에게 침투해 계셔서 온전한 하나 됨을 누리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서로의 인격에 침투하여 서로가 성장하도록 도우며 공존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결혼 관계에는, 하나 됨을 누리지만 각자의 고유성이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 고유한 존재가 되어 가는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네 명의 자녀를 통해 얻었던 인생의 희로애락은 우리의 인생을 총천연색으로 채워주었습니다. 물론 그 색들 안에는 어두운색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혼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가운데 걸어온 길이었음을 서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은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선택이며, 하나님의 축복의 장으로의 부름입니다. 그래서 저는 더 많은 이들이 이 놀라운 세계로 들어가도록 격려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 양식은 아닙니다. 질감은 다르지만, 형제자매가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도 하나 됨을 누리고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현재에서 선취하고 있다고 고백하는데,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 모두가 부모이고, 형제요 자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3:33-35).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확장된 가정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우리는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부르는데, 그것은 우리가 가족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결혼을 강조하고 가족 됨을 축복할 때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혈연주의입니다. 혈연을 바탕으로 가족을 강조하는 것은 가인에게서 나온 삶의 방식입니다. “이 거친 세상에서 믿을 것은 가족밖에 없어”라는 사고는 가인이 에덴의 동쪽 롯 땅에서 유리하는 자로 살면서 불신과 두려움 가운데 자신의 안전을 도모했던 두 가지 선택 중 하나였습니다. 가인은 도시를 건설했고, 가족을 만들었습니다(창 4:16-17). 이것은 타인을 경계하면서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보장하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불신앙의 실천입니다. 그런 면에서 자기 가족만을 위하는 결혼과 가정생활은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결혼 생활이 아니라, 가인의 가정을 닮은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이웃을 향해 문을 개방하고 나그네를 환대하는 가족이 아닌, 이웃을 향해 높은 담을 쌓는 가족은 세상을 위한 복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웃에게 고통을 안겨 줍니다. 그런 면에서 혈연관계를 넘어서 이웃을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고 자매와 형제라고 부르는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비전을 선취하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이 비전에 강하게 사로잡혔던 초기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고아도 과부도 안전했습니다. 교회가 가족의 안전망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독신을 선택한 사람들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가족 됨을 누렸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비혼을 선택하는 이들도 교회 안에서 가족 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비혼의 선택은 단순히 책임지기 싫어하는 개인주의 풍조를 따른 것만은 아닙니다. 또한 비혼의 삶은 주님 나라를 위하고 타인을 향해 열린 삶을 살기 위한 선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20세기에 “복음주의자들의 교황”이라 불릴 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존 스토트 목사님은 독신으로 평생을 사셨는데, 그의 삶은 가정에 매이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 데 온전히 드려졌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스스로 독신을 택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존중받았던 삶의 방식입니다.
결혼을 하지만 아이를 낳지 않고자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것을 부담으로 여기고 둘만의 삶을 즐기기 위해서 그런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동기는 스스로 신중하게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지구 환경을 생각하여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이미 지구는 인간으로 과포화 상태이기에 자신들은 아이를 낳지 않고 지구 환경을 가꾸고, 이미 세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말합니다. 그런 이들의 생각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많은 면에서 급진적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 흐름 속에서 결혼과 가정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과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과 선택에는 시대의 풍조를 따르는 것도 있고, 그리고 앞세대보다 세상을 위해 더 유익한 길을 선택하려는 것도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이웃과 세상을 향해 열린 선택을 하느냐 여부입니다. 이웃과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삶을 추구한다면, 결혼, 비혼, 아이 없는 결혼, 모두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자기 가족에게만 갇혀 있는 삶의 방식은, 어떤 모습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늘 5월을 가정의 달로 지킵니다. 더 많은 가족들이 이웃을 환대하는 가족이 되기를 바라고, 더 많은 인생이 이웃과 세상을 향해 열린 인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웃 환대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안에서 가족으로 바라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실천입니다. 이 비전 가운데 이뤄지는 결혼과 비혼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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