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권’까지 논하기 이전에, 말의 죽음에 연민을 느끼는 사람은 돼지의 죽음과 닭의 아픔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 채식주의자가 되지는 않더라도, 육류의 대량 소비가 공장식 동물 사육을 부추기거나 동물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원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늘어나는 고기의 소비는 환경 오염의 주요 원인이기도 하고, 곡물을 심어야 할 땅에 사료용 작물을 키워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더하는 요인이 된다. 내 아이에 대한 사랑이 다른 아이의 복지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이어지는 것처럼, 내 눈에 보이는 동물에 대한 우리의 연민이 다른 동물에게도 향할 때 좀 더 살 만한 세상이 펼쳐진다. (본문 중)

손화철(한동대 글로벌리더십학부 교수, 기술철학)

 

인기 드라마에서 낙마 장면을 연출하다 말(馬)이 죽었다. 다리에 줄을 묶어 강제로 넘어뜨리는 바람에 말이 심한 부상을 당해서 결국 죽은 것이다. 이 소식에 시청자들이 분노하면서 주연 배우에 대한 하차 요구까지 빗발쳤고, 결국 드라마는 결방에 이어 조기 종영까지 고려하는 모양이다.

 

동물의 죽음에 이런 강렬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한국 사회에 일고 있는 중요한 변화를 대변한다. 개와 고양이를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견, 반려묘’로 부르며 동물들의 간식뿐 아니라 심리적 건강까지 챙기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전체 가구의 15%가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고 반려동물 관련 방송 프로그램도 인기를 끌고 있다. 대권 후보들도 북한 핵 문제보다 개 고양이 관련 공약을 더 중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정도다. 사회 전체에 동물과 감정적으로 소통하는 경험이 쌓여서 동물의 고통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된 셈이다. 혹자는 이를 ‘동물권’의 옹호로 설명하기도 한다.

 

교회 안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개와 고양이를 자식처럼 여기며 키우다 보니 병이 나면 안수 기도도 요청하고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인지 고민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동물도 만드셨고, 사람을 청지기로 두셨을 때 동물도 그 보호 아래 두셨으니 깊이 생각할 가치가 있는 이슈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신학적 주제에 그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우리 사회가 새로 맞이하는 물음인 만큼, 말의 죽음에 대한 반응이나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에 대해 옳고 그름을 바로 논하는 것은 섣부르다. 그러나 이런 사건은 동물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을 면밀하게 살펴보는 좋은 계기가 된다. 몇 가지 물음이면 충분하다. 왜 우리는 말의 죽음에 슬퍼하면서 같은 날 죽은 소, 닭, 돼지에 대해서는 슬퍼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반려견의 부상과 반려묘의 감염병에 대해 걱정하면서 우리가 먹는 동물들이 어떻게 사육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가?

 

 

2022년 1월 4일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연평균 육류 소비량은 1980년 11.3kg에서 2018년 53.9kg으로 40여 년 동안 5배 가까이 증가했다. 2018년 우리나라 사람들은 1인당 닭 14.2kg, 돼지 27kg, 소고기 12.7kg을 먹었다. 계란은 268개, 우유는 80.1kg을 소비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작년 문재인 대통령은 개고기 식용 금지를 검토하자고 제안했다. 미국 심리학자 멜라니 조이의 책 제목으로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왜 우리는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모멘토, 2011).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개, 고양이는 같이 살고 교감하지만, 돼지는 본래의 형체를 알 수 없는 고기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말의 다리를 묶어 강제로 넘어뜨리는 모습은 영상으로 보지만, 소를 도축하여 가죽을 벗기는 장면은 열심히 인터넷을 뒤져도 잘 나오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의 입과 배는 점점 늘어나는 고기 소비에, 우리의 마음은 고기 중심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축구를 볼 때는 프라이드치킨을 먹어야 하고, 중요한 손님에게는 한우를 대접하며, 수련회 때에는 돼지고기를 굽는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이해를 위한 정황의 나열일 뿐, 비일관성에 대한 정당화가 될 수는 없다. 내가 만나지 않는다고 해서 돼지가 개만큼 교감의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동물권’까지 논하기 이전에, 말의 죽음에 연민을 느끼는 사람은 돼지의 죽음과 닭의 아픔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 채식주의자가 되지는 않더라도, 육류의 대량 소비가 공장식 동물 사육을 부추기거나 동물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원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늘어나는 고기의 소비는 환경 오염의 주요 원인이기도 하고, 곡물을 심어야 할 땅에 사료용 작물을 키워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더하는 요인이 된다. 내 아이에 대한 사랑이 다른 아이의 복지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이어지는 것처럼, 내 눈에 보이는 동물에 대한 우리의 연민이 다른 동물에게도 향할 때 좀 더 살 만한 세상이 펼쳐진다.

 

학생들이 “하나님이 고기 먹는 것을 금하셨냐” 물을 때가 있다. “아마 이런 식으로 먹으라고 하진 않으셨을 것 같다”라고 답한다. 천국 잔치에 고기반찬이 혹 나온다 해도, 그 고기반찬을 만들기 위해 우리 안에서 한 발자국도 밖에 나가 보지 못한 돼지나 시멘트 바닥에서 자란 닭을 잡지는 않을 것이다. ‘동물권’이나 동물의 영혼에 대한 복잡한 논의로 나아가기 전에, 그다지 합리적이지도 일관적이지도 않은 선택적 연민을 극복하고,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창조의 질서를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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