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업하자마자 많은 매출을 내 주던 식당들도 직격탄을 맞았다. 월 매출은 한창 잘될 때의 십분의 일로 감소했고, 심할 땐 하루에 손님이 한 명도 없을 때도 있었다. 특히 내가 운영하던 곳처럼 야식 메뉴를 중심으로 저녁부터 시작해 새벽 장사를 하는 곳은 야간 시간제한이 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본문 중)

진승(가명, 자영업자)

 

2018년 5월, 사진관을 개업하며 자영업을 시작했다. 요즘 말로 ‘힙한’ 거리에서 젊은 층을 대상으로 복고풍 사진을 촬영해 주는 사업이었다. 광고 회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다양한 마케팅 방식을 활용할 수 있었고, 당시엔 거리에 사람도 많아 꽤 많은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사진관 운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다음엔 조금 여유가 생겨 사업을 확장해 나갔는데, 이후에 개업한 음식점도 장사가 잘돼 4개월 뒤 2호점까지 개업할 수 있었다. 여기에 친구들과 동업하여 잠깐 카페까지 운영했으니, 30대란 젊은 나이에 너무 일찍 성공한 것이 아닌지 감사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다가왔다. 2019년 말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그 시작이었다.

 

사실 코로나19 초기엔 대구와 수도권에서만 확산세가 심해지고 있었기에 타 지역에서 자영업을 하는 나에게는 별로 큰 타격이 오지 않았다. 이전의 사스나 신종 플루, 메르스 때처럼 어느 정도 유행하다 끝날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확산세는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정부는 방역 수칙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모든 자영업 업소에 영업시간 및 수용 인원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처음엔 어느 정도 버틸 만했다. 모두가 힘든 시기니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이라 생각하며, ‘이 시기만 잘 견디면 곧 이전처럼 장사할 수 있겠지’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자영업자들의 힘든 소식이 알려지자 일부러 찾아와 주시던 단골들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단골들의 발길마저 끊기기 시작하며, 희망은 점차 사라졌고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나는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에 요식업에 더 집중해 볼 요량으로 사진관 운영에 관심을 보이던 지인에게 사진관을 매도했었는데, 그가 사진관을 인수한 얼마 후에 방역 수칙이 시행돼 사진관 매출이 절반 이하로 급감해버렸다. 사진관은 기본적으로 유동 인구가 많아야 하는데,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 자체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내가 의도적으로 피해를 회피하려 매도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도 내 탓이 아니라 말해 주었지만,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친 것 같아 너무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개업하자마자 많은 매출을 내 주던 식당들도 직격탄을 맞았다. 월 매출은 한창 잘될 때의 십분의 일로 감소했고, 심할 땐 하루에 손님이 한 명도 없을 때도 있었다. 특히 내가 운영하던 곳처럼 야식 메뉴를 중심으로 저녁부터 시작해 새벽 장사를 하는 곳은 야간 시간제한이 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오후 5시에 문을 열어 9시에 종료하면 하루 3-4시간밖에 영업을 할 수 없는데, 업장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업장을 똑같이 제한하는 것이 정말 합리적인 방법인지 답답하기만 했다. 결국, 전면 비대면 수업 시즌이 되면서 대학가에 있던 1호점부터 문을 닫아야만 했고, 2호점도 폐업을 앞두고 있다.

 

해당 글과 관련없는 이미지 입니다.

 

그래도 1호점 폐업 이후, 지난해부터 동업 경험이 있는 지인들과 음식 품목을 바꾸어 재기를 노려보기도 했다. 이전에 장사가 잘된 경험도 있고, 코로나 시국에도 여전히 살아남는 업장들도 있었으므로, 우리도 이 시국을 돌파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새로운 가게를 또 개업했다. 그러나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코로나 이후 이미 사람들은 음식을 대부분 배달시켜 먹고 있었고, 배달이 가능한 품목으로 전환해 승부를 보지 않는 이상 이전의 노하우는 전혀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너도 배달 판매를 시작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묻곤 했지만, 직접 식당을 운영해본 사람이라면 그것 역시 간단치 않음을 금방 공감할 것이다. 예를 들어, 삼겹살을 판매하더라도 두꺼운 생삽겹살을 판매하는지, 얇은 냉동 삼겹살이나 대패 삼겹살을 판매하는지에 따라 배달 가능 여부가 달라진다. 후자의 경우, 배달 시간 동안 기름이 많이 생겨서 배달 판매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듯, 요식업에 종사하는 모든 자영업자들이 손쉽게 배달로 판매로 전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배달 판매를 한다고 하더라도 만만치 않은 배달 플랫폼 광고비에 또 한 번 절망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업장도 폐업을 앞둔 상황에서,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인 사진관을 개업해 운영하고 있다. 코로나 시국에 운영하거나 개업했던 식당 세 곳이 모두 실패했으니, 다시 음식 관련 사업에 손댈 엄두가 나지 않았고, 인건비라도 줄이려면 무인 사업장밖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나마 나는 잠깐이라도 사업이 잘된 경험이 있어 아직 버티고 있지만,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아 힘겨워하는 자영업자들도 적지 않다. 처음 사진관을 개업했던 거리 골목에 약 30여 개의 사업장이 있었고, 사장님들과 대부분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지금은 가게들 대부분이 폐업하거나 업종을 변경하였다. 가끔 그 거리를 지날 때 안부 차 방문하면, 많은 분들이 한숨만 쉬거나 때로는 소리 내어 우시기도 했다. 내 핸드폰에는 광고 회사 근무 시절부터 알고 지낸 2천 명이 넘는 자영업자들의 연락처가 저장돼 있는데, 이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듣고 있다.

 

정부의 지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방역 지원 명목으로 적게는 100만 원에서 많게는 300만 원까지 지원금이 여러 번 나와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금액으로 한 달 월세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업장도 있다. 수도권이 아니라도 장사가 잘되는 번화가라면 한 달 월세가 천만 원이 쉽게 넘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모두가 그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지만, 자영업자들에게 부과되는 고통이 더 막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착한 건물주’의 시혜를 바라는 것은 코로나 초기의 몇 달뿐이었다.

 

이제 코로나 상황이 3년을 지나 오미크론이 주된 바이러스가 되면서 방역 수칙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대선은 끝났지만, 대선 기간에 후보들이 자영업자 지원 공약을 남발하는 모습들을 보며, 진작 저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면 이전엔 왜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코로나라는 국가적 재난 속에서 국가가 빚을 지는 것을 두려워하니, 그 피해가 고스란히 개인에게 돌아온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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