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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평생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한 기가 막힌 상황과 고통을 주인공과 함께 겪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무가치하지도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마음속의 느낌과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직면하는 만큼 그 인생의 가치도 결정되는 것 같다. 그것이 이 문장이 말하는 “인간다움의 감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본문 중)
김용(완주이서교회 목사)
이정일 |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
샘솟는기쁨 | 2024년 2월 23일 | 256쪽 | 18,500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다. 요즘처럼 동네에 작은 도서관은 없던 때라 어머니가 헌책방에서 구해다 주신 전래 동화책 한 질을 읽으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접했다. 책에서 읽은 가볍고 익살스러운 이야기에 내 본연의 허풍을 살짝 가미하고, 그럴듯한 내용을 상상으로 덧붙여서 주변 아이들에게 풀어내곤 했다. 그러면서 어디에서 말을 멈추고 어디에서 힘을 더 줘야 하는지 감각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말솜씨도 자라났다. 중학교 연합고사를 마치고 방학 동안에 나와 동명이인인 김용 작가의 홍콩 무협 소설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고난을 겪던 주인공들이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당대의 기인들을 만나고 각종 비기(祕器)들을 획득하면서 절대 고수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들은, 성장기 청소년이었던 나의 밤잠을 다 빼앗아 가고 말았다. 그때 홍콩 김용의 무협지들을 조금만 덜 읽고 잠을 좀 더 잤더라면 지금 한국 김용의 키는 족히 5cm는 더 자랐을 것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 덕분에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중국 남송 시대, 청나라 시대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고, 이후 재미 삼아 중국의 역사 연대표까지 외우게 되면서 역사 과목을 좋아하게 되었고, 대학에 진학해서 역사학도가 되려는 꿈을 꾸었다.
그렇게나 이야기와 역사를 좋아하던 내가 고3 수험생이 되고, 갑자기 어려워진 가정 형편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결국 이야기에 대한 흥분과 감정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기 시작했다. 나 자신의 미래뿐 아니라 동생들까지 살펴야 한다는 소년 가장 같은 책임감을 느끼며, 간절히 꿈꾸었던 역사학도가 아니라 당장 현실에 도움이 되는, 장학생으로 법대에 진학하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 후로는 막연한 내 마음의 감정보다는 당장의 의무와 책임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좋게 말하면 어른스러워지고, 나쁘게 말하면 감각이 무뎌지게 되었다. 이후 고시 공부를 하고, 법학 공부를 하면서 이야기가 주는 떨림과 느낌을 음미하는 삶보다는, 논리의 맥락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개념과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항상 조급해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임한 목회로의 부르심과 급격한 진로 변화를 경험했다. 역시나 그때도 내 안의 느낌과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절대적 우선순위로 놓고 항상 나를 더 재촉하고 남들을 더 밀어붙이며 사는 데만 급급했다.
그러다가 다시 이야기를 만나게 되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를 만날 수밖에 없는 환경 변화를 먼저 겪게 되었다. ‘논리와 의미’만으로는 결코 해석이 되지 않고, ‘신앙과 사명’만으로는 결코 버틸 수 없는 큰 고통의 사건을 연달아 경험하면서, 그동안 죽어 있던 내 안의 어떤 감각과 느낌들이 반강제적으로 다시 소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장모님이 새벽 기도회를 가시다가 무보험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셨고, 이후 하반신 마비로 고생하시며 소천하실 때까지 7년간의 간병 생활이 이어졌다. 같은 기간에 아버지가 간암 말기 시한부 선고를 받으셨고, 암 투병을 하시다가 결국 3개월 만에 소천하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치료를 받으시던 장모님에게 의료 사고가 발생했고, 대학병원 측과 지난한 의료 소송을 진행하다가 어쩔 수 없이 소송을 멈추고 합의할 수밖에 없게 되는 세상의 불공정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깨진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와 인생의 답 없는 현실들이 내 속에 죽어있던 감각과 느낌을 다시 각성하게 만든 것이다. 그 후로 고난 가운데 고통을 겪는 성도들에 대한 나의 인식과 태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동안 목회자로서 했던 섣부른 조언들에 대한 죄송함과 무안함이 걷잡을 수 없이 올라왔다. 정답보다는 말없이 함께 울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을 읽으면서 다시 각성하게 되고 소환되었던 내 안의 느낌과 감정들을 돌아보며 조금 두서없이 적어 보았다. 이 책에서 발견한 다음 문장은 평생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다.
거룩함을 추구해도 인간다움의 감각은 잊지 말아야 한다. 연약함을 드러낼수록 자유로워지고 신실해진다. 소설은 그런 감각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실행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세상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대단한 삶을 살고, 입술로 거룩함을 추구하며 살아도, 가식과 위선으로 울분을 토하게 만드는 인물들이 있고, 반대로 큰 고통 가운데서도 자기의 진실한 감정을 용기 있게 직면하며 마음에 시원함을 가져다주는 인물들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대조되는 그 두 부류를 통해,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상황과 환경을 얼마나 더 좋게 만드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얼마나 더 솔직하고 인간답게 드러내느냐에 따라 자유함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평생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한 기가 막힌 상황과 고통을 주인공과 함께 겪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무가치하지도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마음속의 느낌과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직면하는 만큼 그 인생의 가치도 결정되는 것 같다. 그것이 이 문장이 말하는 “인간다움의 감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가 거룩한 신념을 갖고 고민할 것 같지만 그런 일은 드물다. 대개는 저급한 욕망과 싸울 때가 많다. 이걸 인생도 보여 주고 소설도 보여 준다. 소설 속 인물은 모두 치기 어린 욕망과 싸운다.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는데 다 읽고 나면 소설 속에도 구원의 요소가 들어 있는 게 보인다.
좋은 말이 난무하는 시대, 그렇기 때문에 진실한 말이 너무나 필요한 시대다. 시골 교회 목사로서 일주일에 십여 편의 설교를 하며 좋은 말들을 끊임없이 쏟아 내면서도, 그런 말들이 정작 내 마음에 박혀 내 행동을 바꾸지 못하고, 백여 명의 성도들은커녕 함께 사는 식구들조차 편안하게 하지 못한다고 느끼며 절망감이 늘어만 가고 있었다. 시대적으로도 이제는 더 이상 당위적인 접근이 불가능해지는 것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를 경험하면서, 말의 효능감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 자체에 대한 회의감만 커가는 시점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광고를 보고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 『소설 읽는 그리스도인』 책의 저자인 이정일 작가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 모임을 가지면서 ‘목회자들의 목회자’라고 불렸던 유진 피터슨이 왜 일주일에 한 번씩 꼭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읽기’ 모임을 가지려고 애썼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만의 정원은 나의 감정이란 퇴비를 먹으며 자란다. 이것을 연습하지 않으면 남의 시선에 휘둘린다. 우리가 곁눈질하는 것은 불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정원을 가꿔 가면 자기 생각을 신뢰하게 되고 남의 시선이나 평가를 덜 두려워하게 된다. 지금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면, 자신만의 정원을 가꿔야 한다. 뒤늦게 시작해도 괜찮다. 때가 되면 나의 정원에도 꽃이 핀다는 걸 시간이 확인시켜 준다.
이제 나도 나만의 정원을 가꾸는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 가족과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들만의 정원을 가꿀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더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앙과 사명’, ‘의무와 책임’이라는 미명하에 얼마나 쫓기듯이 나 자신을 몰아붙이고, 주변 가족들과 성도들을 밀어붙이며 살아왔던가! 지역 주민들에게도 그들만의 정원을 가꿀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주기 위해 우리 교회의 적당한 공간을 마을 도서관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자기만의 마음의 정원을 가꾸고 싶어 하는 소원과 기도가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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