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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부가 추진하는 배드뱅크 정책의 핵심은 7년 이상 장기 연체된 5천만 원 이하 소액 부실채권 약 16조 원어치를 배드뱅크를 통해 채권액의 5% 이하로 매입한 후, 상환 능력에 따라 채무를 소각하거나 감면 후 잔액을 10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도록 유도하는 구조이다. (본문 중)
양혁승(장기소액연체자지원재단 이사장)
“부채 탕감이라니, 빚은 안 갚고 버티면 탕감받는 겁니까? 그러면 성실하게 빚을 갚은 사람은 뭐가 됩니까?” 최근 정부가 발표한 ‘배드뱅크형 장기소액연체자 채무조정 프로그램’을 두고 가장 많이 듣는 목소리다. 시장경제 질서와 책임 윤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문제 제기에 더 귀를 기울일 것이며,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에 깊이 몸 담그고 살아온 우리에게 어쩌면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차적 반응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정책의 본질을 규정할 수 있을까? 이 정책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문제의식은 단지 개인의 책임감이나 빚 상환 태도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사회와 시장경제 질서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제도권 밖으로 밀어냈고, 그들의 삶을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해왔는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대로 가도 우리나라의 시장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요청하는 이슈이다.
이번 정부가 추진하는 배드뱅크 정책의 핵심은 7년 이상 장기 연체된 5천만 원 이하 소액 부실채권 약 16조 원어치를 배드뱅크를 통해 채권액의 5% 이하로 매입한 후, 상환 능력에 따라 채무를 소각하거나 감면 후 잔액을 10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도록 유도하는 구조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약 4천억 원을 추경으로 투입하고, 예금 이자와 대출 이자 차액을 통해 이윤을 크게 남겨온 금융기관도 4천억 원 정도 기금 조성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책임을 일정 부분 분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제도의 수혜자들이 결코 의도적으로 빚을 ‘버텨온’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글로벌 경제 위기, 건강 악화, 실직, 폐업, 고금리 전환 등 갑작스럽고 비자발적인 사정으로 채무 상환 불능에 빠진 이들이 대다수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연체이자가 원금의 60% 이상을 넘은 빚더미에 짓눌려 실제로는 사회경제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셈이다. 통장도, 직장도, 휴대전화, 신용카드도 자신의 이름으로 가질 수 없이 살아가는 이들은 사실상 시장 바깥에서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박탈당한 채 투명 인간과 같은 삶을 살아왔다. 이 정책은 그들을 ‘시장 안으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사회경제적 복원 장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정책은 단지 경제 정책만이 아니다. 회복을 향한 공동체의 선언이며, 우리가 어떤 정의를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성경은 언제나 책임을 말하면서도, 책임을 넘어서는 은혜를 가르쳤다. 레위기 25장에 등장하는 희년 제도는 50년을 주기로 빚을 탕감하고, 종을 해방시키며,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제도였다. 단순한 탕감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 질서를 다시 회복하는 해방과 새출발의 시스템이었다. 하나님의 경제는 ‘쓰러진 자를 짓밟는’ 냉혹한 맹목적 경제가 아니라, ‘쓰러진 자를 다시 세우는’ 회복의 경제였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포도원 품꾼의 비유도 이와 같다.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과 오후 늦게 들어온 사람에게 동일한 품삯을 주는 포도원 주인의 행동은 ‘형평성’ 논리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거기서 하나님 나라 질서의 한 축을 설명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공정성’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회복시키는 ‘은혜’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시장 경제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시장 경제의 이론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 앞서 그것의 기초가 되는 『도덕 감정론』을 썼으며, 그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은 도덕적 감수성과 타인에 대한 동감(sympathy)이 시장의 저변에서 작동할 때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 효율의 근거를 인간의 이윤 추구 동기에서 찾았지만, 그것이 통제되지 않고 공동체적 연대감 없이 방치될 경우, 시장은 파괴적 질서로 전락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정의’라는 이름으로 ‘책임’만을 앞세우고 ‘회복’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형평성’을 말하면서, 지친 삶의 파편들을 포용하는 ‘은혜’를 외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복’을 통해 정의를 완성하셨고, 하나님은 다시 살게 하는 ‘은혜’로 질서를 재창조하셨다. 성경적 정의는 결코 ‘공정’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상한 것을 고치고, 배제된 자를 끌어안으며, 쓰러진 자에게 다시 걸을 길을 마련해주는 ‘회복적 정의’까지 나아간다.
물론 경제 취약자들을 위한 재기 정책이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도 악용의 가능성, 선의의 채무자들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 책임 윤리의 위축 등 우리가 고민해야 할 윤리적 지점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기 정책의 악용을 걸러낼 수 있도록 집행 기관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몇몇 위험 요소가 있다고 해서 수많은 서민의 경제적 재기 기회를 통째로 거부하는 것은 더 큰 ‘시스템 차원의 도덕적 해이’가 될 수 있다.
희년은 하늘에서 떨어진 이상향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시장도, 제도도, 정책도 완벽하진 않지만, 그것이 회복의 방향을 향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불완전함 속에서 은혜의 원리가 실천될 수 있도록 동참할 필요가 있다.
“버티면 탕감”이라는 말은 이 정책의 본질을 가린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제는 다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자.” 그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 나라의 경제요,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감당해야 할 공동선의 실천과 맥을 같이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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