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윤리는 ‘행위자’의 선한 의지나 옳음이 아니라 행위의 영향을 받는 ‘이웃’에게 그 초점이 있다. 기독교 윤리는 ‘직접 혹은 간접으로 이웃에게 해가 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이 가르치는 것이고 예수님은 그것을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행위자의 ‘의’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정의’가 목적이다. 윤리는 근본적으로 타자중심적이다.(본문 중)
손봉호(기윤실 자문위원장, 고신대 석좌교수)
윤리를 강조하면 기독교인들은 흔히 ‘그것은 율법주의 아니냐’고 비판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以信稱義)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데 선한 행실을 강조하니 바리새인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이다. 이런 비판의 저변에는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기독교인에게 필수적이지는 않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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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꾸짖은 것은 그들이 오직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나타나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율법의 본래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살인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라는 명령을 주신 것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억울하게 속지 않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들을 살인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은 착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율법의 목적은 의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라는 말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를 오해해서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신’의 ‘의’에 관심을 두었다. 자신들의 의를 생각하니 교만해지고 의로운 사람으로 부각되기 원하니 쉽게 외식하게 되어 예수님의 호된 비판을 받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른 종교들의 윤리나 서양의 철학윤리도 별로 다르지 않다. 서양 윤리학의 태두라 할 수 있는 칸트도 “오직 선한 의지만 선하다”라고 주장했는데, 행위의 결과와 관계없이 동기만 옳으면 윤리적이라는 말이다. 행위자가 도덕적이 되는 것에 무게 중심이 놓여 있지 그 행위의 영향을 받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윤리도 그렇고 불교나 유교의 윤리도 마찬가지다. 모두 윤리적 혹은 종교적 원칙에 따라 행동 주체가 바르게 사는 것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성경의 윤리는 ‘행위자’의 선한 의지나 옳음이 아니라 행위의 영향을 받는 ‘이웃’에게 그 초점이 있다. 기독교 윤리는 ‘직접 혹은 간접으로 이웃에게 해가 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이 가르치는 것이고 예수님은 그것을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행위자의 ‘의’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정의’가 목적이다. 윤리는 근본적으로 타자중심적이다. 스웨덴 신학자 니그렌(A. Nygren)이 엄격한 의미에서 윤리는 기독교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도 그 때문이다.
스웨덴 신학자 Anders Nygren(1890~1978)
윤리는 사랑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최소한’의 사랑이다. 이웃을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윤리적 의무가 아니다. 윤리는 다만, 적어도 ‘해는 끼치지 마라’는 것이다. 그래서 십계명의 윤리적 계명은 모두 “~하지 말라”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물론 좋고 바람직하다. 예수님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셨다. 그러나 그렇게는 못할지라도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웃에게 고통은 주지는 않아야 하는 것이 윤리적 의무다.
모든 비윤리적 행동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이웃에게 해를 끼친다. 살인을 하면 누군가가 살해를 당하고, 거짓말하면 누군가가 속아서 손해를 보며, 교회를 세습하면 경쟁이 불공정하므로 더 능력이 있는 자격자가 목회할 기회를 잃고 교인들은 더 훌륭한 후임자를 모실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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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윤리는 어느 정도 사회적이다.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부정직한 것은 한국인 하나하나가 일본인 보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한국 문화가 거짓을 쉽게 용인하고 정직을 중요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는 그 사회 구성원들이 만들기 때문에 문화와 개인 간에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내가 거짓말하면 당장 속는 사람이 생겨날 뿐 아니라 거짓의 문화가 유지·강화되어 수많은 사람이 속게 된다. 교회를 세습하면 다른 목회자도 세습의 유혹을 받게 하고 온갖 종류의 부작용을 일으켜 수많은 교인들이 피해자가 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공동체의 비윤리적인 행위와 문화를 비판할 권리를 갖는다. 지금 당장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더라도 사회 문화를 비도덕적으로 만들어서 간접적으로 나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개연성을 키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도덕적 행위를 비판할 권리뿐만 아니라 비판할 의무도 갖는다. 비판하지 않는 것은 악을 방치하게 하여 다른 사람들이 해를 당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세습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그 세습에 동조하는 것이고 따라서 비도덕적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도덕적 행위는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만 특히 약자들에게 가장 큰 손해를 끼친다. 따라서 정의를 파괴할 뿐 아니라 약자의 팔을 비트는 비열한 짓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비판할 수 있고 마땅히 비판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는 율법을 오해한 잘못이 있지만 율법 지키는 것 그 자체는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율법을 지킨다면 적어도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