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대속론의 관점만으로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려고 하면, 십자가의 의미를 ‘대리 형벌을 통한 죄책의 제거’로 너무 좁게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새로운 출애굽으로 제시하는 예수님의 성만찬 제정 말씀은 구약성경의 출애굽 사건에 비추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하게 합니다. 출애굽 사건은 사탄과 죄로부터 해방된 하나님 백성의 탄생이라는 의미를 지닌 총체적 구원 사건입니다.(본문 중)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가복음 14:22-24)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하나님 나라 복음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20세기 개신교 복음주의 교회가 전한 복음의 주된 내용은 ‘형벌대속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셨으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형벌을 면제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내용을 예화를 들어가며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이 교리에 근거해 예수님을 믿도록 설득하는 것이 복음주의 교회의 전형적인 복음 전도의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복음의 핵심을 형벌대속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성경에 정당하게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신 21:22-23; 27:26; 사 53장).[1] 그런데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과 이러한 형벌대속론의 복음은 어떻게 관련이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주로 구약성경과 복음서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았고, 그 복음이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소위 ‘하나님 나라 복음’에는 왜 ‘십자가의 보혈’이 빠져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 글에서는 우리가 살펴보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상의 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한 가지 방식을 제시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 나라 복음이 어떻게 오늘날 교회에게 익숙한 ‘십자가 복음’을 좀 더 심오하게 조명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성경(특히 이사야 53장과 스가랴 13:7)에 이미 예언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막 8:31; 9:12, 31; 10:33-34, 45; 14:27-28).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가와 부활이 예언된 메시아로서 당신이 이루셔야 할 중요한 사명임을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둘째로, 복음서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들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과 함께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떠올리며 제자들이 먼저 기억해야 할 중대한 교훈은 참된 제자도에 대한 교훈입니다. 즉, (1)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처럼 고난받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며(막 8:34-9:1), (2)제자들 사이의 관계는 큰 자가 작은 자의 종이 되는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막 9:33-37; 10:35-45).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이면서 동시에 참된 제자를 분별하는 제자도의 분별 기준이 됩니다. 자기희생과 섬김의 모습을 띠지 않는 영성이나 신앙생활은 가짜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가 아닙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의 성격을 규정해 주는 두 가지 중요한 행위를 하셨는데, 그것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건(막 1:1-11)과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지며 성찬식을 제정하신 일(막 14:22-25)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의 맨 처음에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건이 있습니다. 이 세례는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연합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나오시자, 세례 요한은 ‘당신은 제게 세례를 받으실 분이 아니라 제게 세례를 주셔야 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3:14-15).

 

세례받는 예수. ⓒ Son of God 공식 트위터.

 

당시 유대교 배경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와 있다”(마 3:2)라는 선포와 함께 주어진 요한의 세례는 독특한 것입니다. 구약성경 시대에는 이와 유사한 의식은 없었으며, 당시 유대교에도 동일한 의식이 없었습니다. 1세기에 존재한 유대교의 한 분파인 쿰란 공동체에서 물로 정화하는 의식이 있었고, 1세기 말에는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는 경우가 있었지만, 요한의 세례는 전자와 달리 반복되지 않는 일회적인 의식이며, 후자와 달리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주어졌습니다.[2] 그러나 구약성경 예언 중에서 요한의 세례 사역의 의미를 조명해주는 말씀으로서 이사야 40:1-11과 에스겔 36:21-27이 있습니다. 전자는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선구자로서 요한이 먼저 왔음을 말해주며, 후자는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의 백성이 더럽힌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거룩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정화하는 씻음의 사역임을 암시합니다. 이 에스겔의 예언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물로 씻음에 이어서 성령이 부어질 것이라는 약속이 나오는 점인데, 이것은 세례 요한이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메시아가 오시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언급한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막 1:8).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야 할 필요가 없으시므로 요한이 주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위 구약성경 예언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회개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따라 작정하신 의로운 계획을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세례를 받으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예수님은 장차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죽으실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만찬 제정과 십자가 죽음은 유월절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즉, 예수님은 유월절 기간에 당신이 죽임당할 것을 예견하시고 성만찬을 제정하시면서(눅 22:19)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새로운 출애굽’ 사건으로 이해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끌어내시고(출 12장) 언약을 맺으심으로써(출 24장)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하신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첫 번째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은 사탄의 억압을 상징하는 이집트 제국의 외적 억압과, 죄를 상징하는 내면의 부패(원망, 불신, 우상숭배 등)를 극복하도록(출 15: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율법을 부여받으며, 번제와 화목제 황소의 “언약의 피”(출 24:5, 8; 비교, 막 14:24)로써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새로운 출애굽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 백성의 대표자로서 유월절 양과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흘리시는 ‘언약의 피’(막 14:24)를 통해 사람들을 사탄의 억압과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하여 하나님 백성으로 창조하는 새 언약의 사건입니다. 여기서 요점은, 첫 번째 출애굽과 새로운 출애굽이 모두 사탄과 죄의 억압으로부터의 구속(헬, 아페시스: 속량, 해방, 사함)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탄생시키는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최후의 만찬. ⓒPinterest.

 

넷째로,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떻게’ 사람들을 죄와 사탄으로부터 구속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위에 언급한 내용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지만, 사도 바울이 로마서 6-8장에서 구체적으로 기술했으므로 그 내용을 따라 간략히 제시하겠습니다. 즉, 예수님이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과 자신을 연합하셨으므로 그분의 죽음은 하나님 백성의 죽음이 되고 그분의 부활은 하나님 백성의 부활이 됩니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믿는’, 또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통치를 실현하고 계심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됩니다(행 2:38). 그 세례는 그분 “안으로”(헬, 에이스) 들어가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시는 사건입니다(롬 6:3). 그리하여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육신의 죽음이 자기 육신의 죽음이 되며 그 죽음 때문에 죄로부터(즉, 죄의 형벌과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의 부활이 되므로 새로운 생명이며 부활의 보증이신 성령이 부어져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롬 8:1-17; 요 8:37-39). 바울은 로마서의 핵심이 되는 6-8장에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죄로부터의 해방(8:1-14)과 우리를 대적하고 고소하고 정죄하고 핍박하는 사탄으로부터의 구원(8:31-39)을 감동적으로 선언합니다.

이러한 십자가 이해는 형벌대속론이 제시하는 법률적 개념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좀 더 풍부하고 직접적인 성경적 근거를 가집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탐구해 온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상과 자연스럽게 호환되며, 바울의 십자가 복음과 연결됩니다. 형벌대속론의 관점만으로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려고 하면, 십자가의 의미를 ‘대리 형벌을 통한 죄책의 제거’로 너무 좁게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새로운 출애굽으로 제시하는 예수님의 성만찬 제정 말씀은 구약성경의 출애굽 사건에 비추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하게 합니다. 출애굽 사건은 사탄과 죄로부터 해방된 하나님 백성의 탄생이라는 의미를 지닌 총체적 구원 사건입니다.[3]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는 언제나 십자가와 부활은 각각 따로가 아닌 하나의 ‘새로운 출애굽’ 사건입니다(막 8:31; 9:31; 10:34-35). 십자가와 부활의 결과 신자들에게 성령이 부어져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탄생하여 새로운 출애굽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요점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와 부활의 목적이 단지 ‘개인의 구원’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전조인 ‘산상수훈 공동체의 출범’이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 세례를 통해 새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은, 예수의 말씀을 따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산상수훈적 제자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그들은 이사야가 예언한 ‘산 위의 도시’(사 2:2-4)가 되며, 세상을 위한 소금과 빛이 됩니다(마 5:13-16).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씨 뿌리는 사역’(마 13)을 이어받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어 나갑니다(마 28:18-20).

[1] 형벌대속론 교리는 1-5세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명료하게 정립되어 있지는 않았다. 성경에 나타나는 대표적 대리(representative substitution), 희생제사(sacrifice)의 개념은 초기부터 십자가를 설명하는 언어가 되었지만, 우리가 아는 현대적 의미의 대리적 형벌을 통한 형벌 면제라는 개념은 칼뱅에 와서야 명료한 언어로 제시된다. 이 교리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간략한 요약은 앤터니 티슬턴,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 박규태 옮김(IVP 2018: 원서 2015), 8장과 9장을 보라. 1-5세기 고대교회가 십자가에 대해 어떻게 가르쳐왔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J. N. D. 켈리, 『고대기독교교리사』(Early Christian Doctrines ), 박희석 옮김(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 원서 1968) 7장과 14장을 보라.

[2] 로버트 스타인, 『메시아 예수』(Jesus the Messiah ), 황영철 옮김 (IVP 2001; 원서 1996), 107.

[3] 하나님의 포괄적 구속 사건으로서 출애굽 사건의 여러 측면을 연구한 자료는,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Mission of God ), 정옥배 외 옮김(IVP, 2010: 원서 2006) 8장 “하나님의 구속 모델: 출애굽”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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