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주의’는 가족 구성원의 성공과 출세를 가족 전체 혹은 집안의 명예와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인데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관념이다. 한국사회에서 한 사람이 어떤 대학에 진학하고 어떤 직장에 취업하고 어떤 사람과 결혼하느냐 하는 것은 그 개인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부모와 집안의 명예가 걸린 문제다. 그러기에 <SKY 캐슬>에서 윤 여사는 아들 강준상은 물론이고 손녀 예서까지 서울대 의대에 보내기 위해 집착한다.(본문 중)
<SKY 캐슬>과 한국교육②
우리 교육이 낳는 고통, 그 뿌리는 무엇인가?
정병오(기윤실 공동대표, 오디세이학교 교사)
“교육으로 인해 불행한 나라”, 우리 교육과 사회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이다. 교육으로 인한 불행은 공부를 못해 경쟁에서 낙오하는 아이나 여력이 없어 교육을 시키기 힘든 부모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입시 경쟁에서 승리하여 모두가 부러워하는 아이들도 교육 때문에 행복하지 않고, 온갖 교육을 마음껏 제공할 수 있는 상류층 가정들도 교육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지난 주 종영된 드라마 <SKY 캐슬>은 소위 상류층 가정이 교육으로 인해 어떻게 붕괴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드라마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자녀 교육을 위해 가족이 떨어져 살아가는 ‘기러기 가족’ 현상도 교육 때문에 기형화하는 중상류층 가족의 한 모습이다.
야구장에서 사람들이 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사람이 경기를 더 잘 보려고 일어섰다. 그러자 그 뒷사람도 일어서기 시작했다. 얼마 후 모두가 일어서서 경기를 보게 되었다. 결국 모두가 경기를 제대로 보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이 자기 아이라도 경기를 더 잘 보게 하려고 어깨 위에 아이를 올려놓았다. 얼마 후 다른 아빠들은 자기 어깨 위에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자녀를 앉혔다. 그러다가 어떤 아이가 아빠의 어깨에서 떨어져 다쳤다. 아이와 의자 무게 때문에 아빠가 다치기도 했다. 이 어리석은 상황이 위험하고 잘못된 것일 줄 알면서도 그들은 야구 경기를 계속 그렇게 관람하고 있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 우리 교육에서 일어나는 경쟁 때문에 패자는 물론이고 승자까지도 불행하다면, 이것을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를 고치기 위한 노력은 왜 전체 구성원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또 이를 개혁하고자 도입하는 제도들은 번번이 왜곡되고 마는가? 그것은 단지 제도 수준에서 설명할 수 없는, 훨씬 더 뿌리 깊은, 우리의 핏속에 흐르는 문화와 의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SKY 캐슬>이 전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도 바로 이를 극대화하여 보여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족주의’다. 가족주의는 가족 구성원의 성공과 출세를 가족 전체 혹은 집안의 명예와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인데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관념이다. 한국사회에서 한 사람이 어떤 대학에 진학하고 어떤 직장에 취업하고 어떤 사람과 결혼하느냐 하는 것은 그 개인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부모와 집안의 명예가 걸린 문제다. 그러기에 <SKY 캐슬>에서 윤 여사는 아들 강준상은 물론이고 손녀 예서까지 서울대 의대에 보내기 위해 집착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족주의가 이전에는 주로 자녀의 부담으로 작용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부모의 부담으로 더 크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잣집이나 학벌 좋은 집안의 며느리는 자녀를 잘 관리해서 명문 대학에 보냄으로써 그 집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서진이 그런 경우다. 한서진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서를 서울대 의대에 보냄으로써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는 자신의 과거를 덮고 남편과 시부모에게 인정을 받고자 한다.
또 하나, 우리는 1,000년의 과거 제도 전통을 가지고 있다. 과거 제도는 교육을 ‘선발과 배제’의 틀로 보게 만들었다. 즉,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을 통과하면 그에게 갖가지 혜택을 몰아주고,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해도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런 전통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유교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다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 때문에 근대 교육이 들어왔을 때에도 서구 근대 교육의 기본 정신인 ‘전인적인 인간을 키우는 국민 교양교육’의 성격은 사라지고, 오직 상급학교 진학과 신분 상승, 안정적인 직업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교육게 되었다. 학교도 배움 자체를 중요시하지 않고, 배운 내용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통해 등수를 부여해서 공정한 선발과 배제의 장치를 만들어 왔다.
그러기에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명제는 우리 교육을 실제로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그 학년에서 배워야 할 내용을 잘 소화해서 100점을 받았다 해도, 100점을 받은 아이가 여러 명이면 큰 의미가 없다. 그러기에 우선 내가 100점을 받아야 하지만 그와 더불어 다른 아이가 100점을 받지 않아야만 한다. 나는 한 개라도 실수하면 안 되고, 다른 친구들은 실수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고통이겠는가? 한 개라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 무한 반복을 함으로써 배움에 대한 흥미를 잃을 뿐 아니라, 친구가 실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우정을 잃는다. 그리고 <SKY 캐슬>에 나오는 것처럼 시험지 유출과 같은 극단적인 일이 실제로 발생하기도 하고, 어른이 아이에게 성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도덕적이고 비교육적인 태도를 교육의 이름으로 제시하고 강요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문제는, 이러한 수백 년 역사 가운데서 형성된 우리 사회의 의식이 점점 더 승자독식으로 향하는 흐름과 맞물리면서 증폭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는 1960년대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을 시작할 때부터 대기업에게 특혜를 줌으로 재벌 중심의 경제 체제를 형성했고, 부동산 투기를 통해 중산층이 형성되며 급속히 계급화하고 있다. 거기다가 경제 성장이 한계에 달하고 세계화의 흐름과 기계가 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현상이 겹치면서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국민들의 불안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있어 정치의 역할은 지극히 미약하다. 그리고 새롭게 중상류층을 형성한 이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 의식이 거의 없고 오히려 기득권을 지키는 것에만 급급하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자신의 계급을 굳히는 수단으로 사교육에 과도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그리고 가난한 계층도 박탈감과 불안감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교육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기에 <SKY 캐슬>에 나타난 우리 교육의 문제는 학교 교육을 적당히 바꾸거나 입시 제도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의 교육을 배태한 우리 사회 전체를 보아야 하고 우리의 오랜 전통과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의식의 깊은 부분까지 성찰해야 한다. 물론 이는 어렵고 큰 문제다. 하지만 우리가 잘살고 행복하자고 그토록 열심히 쌓아온 것들이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불행하게 하고 있다면, 또 우리 가정과 우리 사회를 이렇게 파괴하고 있다면, 정신을 차리고 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아픔과 손해가 있더라도 무너뜨릴 것은 무너뜨리고 기초부터 다시 세워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방향을 돌이켜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드라마 <SKY 캐슬>은 강준상 가족이 SKY 캐슬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하지만 강준상 가족이 떠난 그곳에 SKY를 꿈꾸는 또 다른 가족이 이사를 해 옴으로 <SKY 캐슬>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 입시 경쟁 구조는 여전히 건재함이 암시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SKY 캐슬>로 상징되는 이 입시 경쟁 구조 자체를 변화시킬 방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다음 글에서는 그 방안을 모색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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