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에 성조기를 흔드는 일부 노인들의 심리상태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나타나고 있다. (중략) 생애사적 경험에 따른 박탈감, 자기부정의 감정이입, 박정희 숭배문화, 유교적 가치체계, 탄핵반대시위가 주는 카타르시스, 노인 소외의 분출, 패배의 기억으로 인한 공포감, 박탈감 극복을 위한 인정투쟁, 분노 치유 공간의 부재 등이다. (중략) 그러나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어떠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이것이 노인혐오라는 사회적 병증으로 악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본문 중)
백종국(경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지난 삼일절, 뉴스를 시청하다가 성조기 흔드는 시위대를 보게 되었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쳐야 할 삼일절 행사에서 남의 나라 국기인 성조기를 흔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장렬히 옥중에서 산화했던 순국선열들에게 참으로 죄송스러운 일이다. 시위대에는 젊은이들도 간혹 보였지만 화면에 나온 성조기 든 사람들은 거의 모두 노인들이었다. 엊그제 직장에서 은퇴하고 국가가 인정하는 공식 노인 그룹에 진입한 초보 노인으로서 진입 인사 겸하여 이 노인 선배님들께 한 말씀 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점을 상기하고 싶다. 기미독립선언서는 대한민국이 독립국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음을 선언하였고,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도 이러한 역사의 승계를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누구든지 집회, 결사, 언론, 거주이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물론 법치주의의 틀 안에서 그러하다. 대한민국의 독립선언을 축하하는 삼일절에 나서서 성조기를 흔드는 사람을 법으로 제재할 수는 없다. 성조기를 흔드는 시위대가 미리 신고한 경로를 따라 진행한다면 아무도 이를 막아서는 안 된다. 독립선언을 축하하기 위해 벌거벗고 춤을 춘다 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면 위력으로 금지할 수 없다.
문제는 법에 저촉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삼일절에 성조기를 흔드는 화면을 본 그날 내내 불쾌했다. 미국이 아무리 우리의 핵심 우방국이라 할지라도 민족의 독립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행사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무분별함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삼일절에 성조기를 흔들었겠지만 이는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고 지키고자 하는 민족 독립의 대의를 모욕하는 행위이다. 마치 편견과 차별로부터의 자유라는 대의를 내세워 거의 벌거벗은 채로 대로를 행진하는 퍼레이드를 보는 기분이다. 현행 법률로 따지자면 성기나 엉덩이를 노출하지 않는 한 형법 혹은 경범죄처벌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광경을 보고 싶지 아니한 사람까지 보기를 강요한다면 도덕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이런 짓은 자기들끼리 공설운동장을 빌려서 하거나 자신들만의 모임에서 하면 좋겠다.
얼마 전부터 이 노인들은 아예 태극기와 성조기를 한 천에 하나로 프린트한 태극성조기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한국을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시키자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그러한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이 노인들이 태극성조기를 휘두르면서 외치는 바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은 국회의원 2/3 이상의 찬성을 거쳐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전원일치 판정으로 이루어졌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지만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이는 청천벽력이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을 것이다. 이후부터 탄핵을 부정하고 그녀의 석방을 주장하는 친박 집회가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종합해보면 이 노인들의 태극성조기는 아마도 미국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 혹은 무죄를 위해 압력을 넣었으면 하는 바람의 상징이 아닐까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재판 그리고 수감 생활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맏딸로 태어난 운명으로 인해 온갖 역사적 파란을 그대로 다 겪었던 비운의 여인이다. 22살에 어머니가 괴한의 총탄에 쓰러지고 나서 퍼스트레이디의 부담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었다. 5년 뒤에는 아버지도 심복 부하가 쏜 총탄에 서거했다. 27살의 나이에 가장이 되어 어린 동생들을 거느리고 온갖 풍상과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녀를 이용하려는 자와 그녀를 증오하는 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가정을 이루는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어느 쪽이든 그녀에게는 혐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혐오로 인한 자기소외의 경향이 강해졌다. 그런데 묘하게도 자기소외가 증가할수록 그녀의 권위 또한 강화되었다. 2012년 마침내 한국 최초로 여성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최고 권력자가 되자 혐오와 권위의 모순은 더욱 심해졌고 그럴수록 고독과 소외 또한 깊어졌다. 결국 한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을 당하는 비극의 대통령이 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개인으로 볼 때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이상 비극이 진행되지 않고 그녀에게도 곧 평화와 안정이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삶이 애잔하고 그의 탄핵이 당혹스럽더라도 삼일절에 성조기를 휘두르는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역사를 보면 외세의 힘을 끌어들여 내부의 권력투쟁에 활용하는 사례들이 꽤 많이 있었다. 특히 사대주의를 표방했던 조선 왕조에서는 외세 의존의 권력투쟁들이 자주 발생했다. 그 결과 나라는 황폐해지고 마침내 국권까지 침탈당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일부 무분별한 노인들이 이와 유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신참 노인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미국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핵심 우방국으로 삼기에 적합한 나라이다. 원교근공의 외교 원칙으로 살펴볼 때 그러하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들 사이에서는 영토분쟁이 발생하기 쉽다. 대표적으로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의 국가들과 영토적 이해를 다툴 수 있고 다투어온 나라들이다.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보다 전략적인 이해관계가 중요하다.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의 역사 과정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반면에 일본의 조선 침략이나 남북분단, 전두환 정권의 성립 과정에서는 부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앞으로 미국이 어떤 우방으로 존재할 것인가는 우리하기에 달려 있다.
우방외교에서 주의할 점은 적대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방국이라 할지라도 국가이익이 핵심 이라는 사실이다. 국가는 개인과 다른 차원의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 도덕성과 상관없이 국가는 국가이익을 지켜야 할 이유와 정당성이 있다. 예컨대 내가 사람 죽이는 일이 싫어 적군에게 총을 쏘지 않으면 나의 가족이 적군의 노예가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나의 도덕적 행동이 내 가족의 파멸을 초래하는 부도덕한 행동이 된다. 한국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어야 미국의 우방이고, 미국이 한국의 이익에 부합되어야 한국의 우방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한국의 일부 노인들이 박근혜의 석방에 미국의 관여를 열망해도 그 일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으면 미국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한국 내정 관여는 한국에서의 미국 이익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크다.
삼일절에 성조기를 흔드는 일부 노인들의 심리상태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행동에 대해 연구자들은 다양한 원인을 제시하였다. 생애사적 경험에 따른 박탈감, 자기부정의 감정이입, 박정희 숭배문화, 유교적 가치체계, 탄핵반대시위가 주는 카타르시스, 노인 소외의 분출, 패배의 기억으로 인한 공포감, 박탈감 극복을 위한 인정투쟁, 분노 치유 공간의 부재 등이다.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어떠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이것이 노인혐오라는 사회적 병증으로 악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당연한 말이다. 예컨대 우리사회 어떤 계층이 혐오스러운 일을 저지르더라도 우리는 이를 그 계층 전체에 대한 혐오로 몰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모두 함께 치유하고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하나의 공동체로 살아가려면 먼저 피차에 공유하는 상식을 증대시키는 게 지혜로운 일이다. 예들 들면, 독립이 종속보다 바람직하다든지 평화가 전쟁보다 바람직하다는 상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될수록 우리 사회는 더 좋은 사회가 된다. 가난보다 번영, 분열보다 통일, 무질서보다 질서, 독재보다 민주, 억압보다 자유, 불공정보다 공정, 불평등보다 평등이 더 좋다는 게 상식으로 정착되어야 좋은 사회다. 놀라운 것은 사회가 발달할수록 이러한 상식의 보편성도 커진다는 점이다. 이는 동물 중에서도 인간만이 신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를 보면 이러한 상식의 정착을 거부하려는 시도들이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있었다. 부와 권력을 장악한 일부 계층이 자신들의 지위가 위태롭다고 여겨질 때 이런 시도가 나타난다. 다양한 형태의 전략들이 시도되지만 동원하는 수단은 뻔하다. 가짜뉴스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상식을 무너뜨리는 게 첫째 단계이다. 노골적인 폭력을 동원하는 게 둘째 단계이다. 가짜뉴스로는 이성적 설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폭력 의존이 필수적이다. 흥미롭게도 친박 시위는 순서가 바뀌어서 나타났다. 시위 초기에 군복을 입고 행진하며 군부의 개입을 공공연히 촉구하던 노인들이 있었다. 다행히도 이러한 행동들은 이제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가짜뉴스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이로 인해 이성적으로는 설득이 불가한 지경에 이르렀다. 사회적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도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아주 절실하게, 이 나라를 살리려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이 있다. “너희들 편하게 잘살게 하려고, 늙으신 어른들이 자식들 손주들에게 잘사는 나라를 물려주려고 매주말마다 아픔을 마다하지 않고 노구를 이끌고 눈물을 머금으며 집회에 나간다”는 어느 노인의 간곡한 호소가 카톡방을 떠돌고 있다. 그러한 분들의 충정을 폄하할 의도도 없고 또 폄하해서도 안 된다.
단지 신입 노인으로서 한 말씀 올린다면, 가두시위는 노인들이 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 좀 쉬고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어보자는 조언을 드리고 싶다. 프랑스군이 베를린을 점령하였을 때 피히테는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독일민족에게 고함』이라는 강의를 진행했다. 강의의 말미에서 그는 독일 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보통의 노인들에게 이 강연은 간청한다. 이번만은 도와 줄 수 없더라도 방해하지는 말아 달라. 여러분의 지혜와 수천 가지 생각을 갖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방해하지는 말라. … 만일 여러분의 지혜로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여러분은 이미 오래 전에 우리를 구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충고를 한 사람들은 여러분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용서한 일이고 더 이상 여러분을 문책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여러분 자신을 알고 침묵을 지켜 달라.(『독일민족에게 고함』중)
실제로 한국사회를 위해 한국의 노인들이 공헌해야 할 중대한 영역이 있다. 시민단체에서의 자원봉사라는 영역이다. 아스팔트 위에서 구호를 외치면서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시위가 아니라, 우리사회가 경제적 양극화로 인해 파국을 맞지 않도록 사회적 균형을 잡는 일을 해야 한다. 전자는 심리적 고통과 육체적 과로를 불러일으키지만 후자는 각자의 지적・육체적 능력에 따라 쾌적하게 수행할 수 있다. 전자는 몰두할수록 내 자신이 황폐해지지만 후자는 열심히 할수록 피차가 더욱 행복해진다.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정치단체나 관변단체는 피하시는 게 영육간에 건강해지는 비결이다.
우리나라는 재벌이라는 국가대표 선수가 이끄는 수출대체산업화전략을 선택했고 보기 좋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극심한 경제적 양극화라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의 시장개입을 증대시키면 사회주의 체제에서 보았던 다른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사회와 경제사회 사이에서 시민사회가 균형을 잡는 방안이 현실적으로 가장 바람직하다. 국가와 재벌 사이에서 민주와 정의와 평등을 실천하는 시민단체가 균형자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공선협이나 경실련, 참여연대, 환경연합 그리고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이 그러한 사례에 속한다. 이들이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만큼 시민들의 자원봉사가 있어야만 활발히 움직이게 될 것이다.
결론은 자명하다. 한국의 노인들께서는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시민단체의 자원봉사에 본격적으로 참여해주시기를 바란다. 단순히 사회적 존경을 받는 윤리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나라의 운명을 살린 역사적 쾌거로 기록되리라 믿는다. 신참이지만 여러 선배 노인분들에게 삼가 간곡히 호소하고 싶은 말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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