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신자가 비장애인 신자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이 얼마나 약한가를 잘 드러낸다. (중략) 비록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교회에서 자신들이 장애인이란 사실을 구태여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농아인 교회, 맹인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은 편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장애인들이 비장애인과 신앙생활을 같이 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외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애인 교회가 한국에만 따로 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본문 중)

손봉호(기윤실 자문위원장, 고신대 석좌교수)

 

ⓒ국민권익위원회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UN이 1981년을 세계 장애인의 해로 정했고 우리 정부는 1991년에 4월 20일을 법정기념일로 정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현재 세계 인구의 약 15%가 장애인이라고 추산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10% 정도라 했는데 그동안 수명 연장, 만성질환 확대, 검진 기술 발달 등으로 장애인의 수가 늘어났다 한다. 한국에는 등록된 장애인 인구가 전체의 5%를 조금 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교통사고 등 각종 사고가 많은데도 장애인이 그렇게 적다는 것은 등록절차가 까다롭고 장애 인정의 범위를 좁혀 놓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하루 1불 40전 이하로 생활하는 절대 빈곤층이 전체 인구의 약 10%인데 장애인의 수보다 적다. 물론 장애인 상당수는 절대 빈곤층에 속하고, 또 가난하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범주로 구분하면 장애인에 속하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보다 더 많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장애인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1970-80년대 한국에서 일어난 진보적인 사회운동도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권익만 외쳤지 장애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장애인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무시되고 있다. 장애를 불효로 보는 유교문화 때문이 아닌가 한다. 효경(孝經)에는 “몸과 털과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이를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이란 구절이 있다. 장애인이 되는 것은 효도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어 가문의 수치로 여겨졌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가족이 숨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1996년 주민들의 극렬한 반대운동을 법원 판결로 겨우 극복하고 밀알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이제까지 주민들에게 실제로 아무 피해도 없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서울 강서구에서 특수학교 설립 반대운동이 다시 벌어진 것을 보면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알 수 있다. 문화는 사람이 만들고 사람에 의하여 전수되고 유지된다. 이런 잘못된 문화가 지금도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강남구, 강서구 주민만이 아니라 한국인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한국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한국 최대의 종교라고 자랑하는 한국 기독교가 더 큰 책임과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2017년 9월 5일, 서울 강서구 탑산초등학교에서 열린 ‘강서지역 공립 특수학교 신설 주민토론회’에서 장애인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지역 주민들에게 장애인 학교 설립을 호소하고 있다.(출처: 미디어몽구 Youtube 캡쳐)

 

한국 교회는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문화를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따르고 있다. 인구의 약 20%가 기독교인인데 비해 장애인은 고작 9%만이 기독교인이라 한다. 장애인은 하나님의 위로가 더 필요하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더 클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사 35:5-6, 미 4:6-7). 그런데도 장애인 신자가 비장애인 신자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이 얼마나 약한가를 잘 드러낸다. 헌금도 많이 할 수 없고 봉사도 잘 못하며, 보기에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초청하고 전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비록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장애인들이 교회에서 자신들이 장애인이란 사실을 구태여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농아인 교회, 맹인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은 편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장애인들이 비장애인과 신앙생활을 같이 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외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애인 교회가 한국에만 따로 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최근에는 남서울은혜교회, 다니엘새시대교회, 서울영동교회 등 몇 교회에서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으나 장애인 참여율은 매우 낮다.

한국 교회는 초기부터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주로 고아들과 걸인들에 치중했고 장애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맹인학교가 일본 총독부의 훈령에 의하여 설립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한국 조정(朝廷)도 한국 교회도 장애인 복지에는 소홀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에 장애인 선교, 장애인 복지,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서 젊은 그리스도인들 몇이 밀알선교단을 창립하고 활동을 시작한 것은 중요한 변화였다. 그 다음 해에 정부가 장애인의 날을 제정한 것도 밀알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장애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레위기 21장에서 장애인이 성전에서 섬길 수 없도록 한 규정이 성경이 장애를 부정적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종종 오해되었다(21:17-23). 이 규정은 일반 장애인이 아닌 제사장 중 장애인이 된 경우를 언급하는 것인데, 그런 장애인 제사장일지라도 하나님의 음식을 먹는 제사장의 특권은 유지된다(레 21:21).[1] 성경은 장애인을 무시하거나 천대하지 말고 오히려 더 특별한 관심으로 돌보라고 명령한다(레 19:14; 신 27:18; 눅 14:13-14).

 

“편견을 접어버리세요”. 박한샘. 2017년 장애인고용 인식개선 공모전 그래픽 디자인 최우수상. (출처: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아무도 아프거나 굶주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장애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장애는 부정적이다. 질병, 가난, 노동의 고통이 모두 죄의 결과인 것처럼 장애의 고통도 죄의 결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질병이 환자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고, 노동의 고통이 노동자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닌 것처럼, 장애도 장애인 자신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밝히셨다(요 9:2-3).

죄의 결과이지만 당사자의 죄 때문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인류 전체의 죄 때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의 93%가 후천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라 한다. 즉 자연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의 잘못 때문이란 것이다. 물론 자신의 잘못 때문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른 사람과 사회의 잘못 때문이다. 교통사고를 비롯한 각종 사고, 약물 부작용, 출생 때나 치료 과정에서 의사가 간호사가 저지른 실수, 영양실조, 질병 부작용 등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원인에 의하여 장애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애인들은 모두 피해자들이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장애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그들의 복지를 보장하는 것은 불쌍하니까 돌봐줘야 한다는 시혜가 아니라 장애를 갖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의무다.

장애인 날을 맞으면서 한국 교회는 약한 사람들을 특별히 돌보는 것이 정의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이제까지의 무관심에서 벗어나 장애인 선교와 복지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1] 고자가 총회에 참석할 수 없다는 규정(신 23:1)은 당시의 이스라엘 총회에서 가족의 대표자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여성이나 어린이처럼). 고자라도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인정된 것은 분명하다(사 5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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