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신세 면해보고 자식 놈들 공부시킨다고 뼈 빠지게 일했지만, 노후대책은 세우지 않아 노령연금으로 세금을 갉아먹고, 쓸데없이 차를 몰고 다니다가 교통사고나 내지 않는가. (중략) “너 늙어 봤어!”라고 항의해 봤자, “누가 늙으래?”라는 메아리만 돌아온다.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이 세계 최고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대우받고 존경받으려 바동거리지 말고 곱게 늙으려고 애쓰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래도 자존심은 살리고 품위 있게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본문 중)
손봉호(기윤실 자문위원장, 고신대 석좌교수)
5월 5일은 어린이날이다. 방정환 선생은 당시에 어린이들이 너무 천대받는 것을 보고 어린이날 제정을 추진하였다. 5월 8일은 어버이날이다. 그런데 과거의 어린이들보다 오늘날 노부모들이 더 천대를 받으므로 이제는 어린이날보다 오히려 어버이날을 공휴일로 정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생산성, 효율성이 절대적 가치로 등장한 오늘날 노인들을 천대할 핑계는 무수하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면서 징그럽게 오래 살아 밥만 죽이고, 병은 지지리도 많아서 막대한 건강보험금을 축내지 않는가. 거지 신세 면해보고 자식 놈들 공부시킨다고 뼈 빠지게 일했지만, 노후대책은 세우지 않아 노령연금으로 세금을 갉아먹고, 쓸데없이 차를 몰고 다니다가 교통사고나 내지 않는가. 효도 제대로 한 마지막 세대인데 효도 못 받는 첫 세대, 어른을 존중한 마지막 세대인데 존중 못 받는 첫 세대라고 푸념하면서 “너 늙어 봤어!”라고 항의해 봤자, “누가 늙으래?”라는 메아리만 돌아온다.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이 세계 최고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대우받고 존경받으려 바동거리지 말고 곱게 늙으려고 애쓰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래도 자존심은 살리고 품위 있게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 (All’s well that ends well). 평생 배우고 터득한 지혜로 그나마 가진 것, 할 수 있는 것 총동원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게 쓰고 가야한다. 같은 돈이라도 어디에, 언제,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진다. 굶고 병든 고아에겐 준 만원은 10만 원이 되지만, 잘 사는 자식에게 준 만원은 10원 가치도 없다.
돈을 모아 자손에게 넘겨준다 하더라도 자손이 반드시 다 지킬 수 없고, 책을 모아 자손에게 넘긴다 하더라도 자손이 반드시 다 읽을 수 없다. 남모르는 가운데 덕을 쌓아서 자손의 계좌에 넣는 것만 못하다”(積金以遺子孫, 未必子孫 能盡守. 積書以遺子孫, 未必子孫 能盡讀. 不如積陰德於冥冥之中 以爲子孫之計也).
명심보감 제1편(계선편) 중
명심보감(明心寶鑑)에 인용된 사마온공(司馬溫公)의 명언이다. 성경말씀은 아니지만 세상을 달관한 지혜다. 새겨들을 가치가 있다.
자손에게 재산을 남기고 자식들 교육시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 굶고 무식한 사람이 우글거리면, 부자도 식자도 행복할 수 없다. 남보다 더 잘 살고 더 많이 알아서 우쭐거리는 것은 잠시의 행복일 뿐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많은 재산을 남기기보다는 자손들의 존경, 신임, 감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자녀 사랑이며, 남모르게 덕을 쌓아서 결과적으로 자손이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유산이다.
1984년에 한경직 목사님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고 본인(손봉호 집사)의 성경강의를 들은 기독실업인 몇 분이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을 시작했다. 적어도 유산의 2/3 이상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것과 매년 유언장을 쓴다는 것을 약속하면 회원이 될 수 있다. 다만 자녀가 다른 사람이나 사회의 짐이 된다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도록 했다. 조직도 없고 회원 명단도 공개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천여 명이 가입했고 작고한 회원들은 거의 다 그 약속을 지킨 것으로 알려지거나 추측된다. 그동안 자녀가 무능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경우나 유산의 기부 때문에 자녀가 문제를 일으킨 경우는 없다.
유산 기부의 장점은 여러 가지다. 우선 자녀들이 부모의 유산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주성과 책임감이 강해진다. 유산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자녀가 유산을 받을 필요가 없도록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도움 없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삶을 영위한다는 사실에 자존심과 자긍심을 갖게 된다. 부모의 과보호는 “마마보이”들을 양산하며 부모의 많은 재산 때문에 형제자매가 서로 다투는 추한 모습이 속출한다. 그리고 돌아보면 부모의 유산을 많이 받은 자녀보다 자수성가한 자녀들이 부모를 더 존중하고 받드는 것 같다. 유산을 남기지 않으므로 오히려 효도를 받게 되는 것이다.
자녀의 소득과 성취는 부모의 도움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이뤄졌을 때 떳떳하고 정의롭다. 인생의 출발점이 유리하면 승리해도 부끄럽다. 불리하게 출발한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도 받을 수 없다. 큰 재물의 상속은 정의를 파괴하므로 다른 사람들의 질투와 불만을 야기하여 사회 평화와 협력을 방해한다. 그런 사회에서 특혜를 누리는 것은 본인에게도 불안하고 위험하다. 그러므로 유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됨은 말할 것도 없고, 자녀들이 안전하고 조화로운 세상에 살도록 돕는 길이 된다.
과거에는 사람의 삶이 주로 자연에 의하여 결정되었으나 지금은 다른 사람과 사회에 의하여 주로 결정된다. 나의 능력과 재산도 내가 홀로 만든 것이 아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설립되고 운영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국가가 만든 도로와 제도와 환경을 이용하여 생산하고 성취한 것이다. 따라서 나의 모든 성취에는 다른 사람, 사회 전체의 공헌이 듬뿍 들어 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란 고백은 모든 사람에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성취의 상당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안 해도 되는(gratuitous) 시혜가 아니라 일종의 의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에 환원한 재산은 자손에게 물려준 유산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한다. 배부른 손녀에게 맛있는 과자를 사 줄 돈으로 굶는 고아에게 음식을 대접하면 그 효용가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우리의 재산은 노동의 대가요, 노동은 삶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재산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우리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자손을 굶게 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굶는 고아를 옆에 두고 배부른 자녀에게 사치를 제공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어리석음이 된다.
어버이날에는 어른들이 존경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이 날을 존경 받을 자격을 갖추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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