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심판권을 가진 사람들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는 유형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중략) 셋째는, 사법 권력으로 지상의 심판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당당한 사법권 행사를 하지 않고 정치적 권력, 경제적 권력, 언론 권력의 눈치를 보는 간신 노릇을 하면서 가해자를 숨겨주고 피해자를 농락하는 ‘심판권의 왜곡(歪曲)’입니다. 이것은 최근 장자연, 버닝썬, 김학의 사태에서 나타나는 ‘유권무죄(有權無罪), 무권유죄’의 양상입니다.(본문 중)

이병주(변호사, 기독법률가회)

 

“We all lie.”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SKY 캐슬>의 주제가입니다. We all lie.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합니다. 세상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기가 살면서 한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 자체’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짓말은 나쁩니다. 그러나 ‘모든 거짓말’이 다 나쁜 것일까요? 저는 5공화국 시절 대학교 1학년 때, 종로에 데모를 하러 갔다가 현장에서 전경에 붙잡혀 경찰서에서 이틀을 자고 나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같은 유치장에 있었던, 강직하기로 유명한 어느 대학의 2학년 학생 한 사람이, ‘나는 비겁하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는 생각으로 데모하러 나왔다는 것을 당당하게 인정했다가 바로 그 자리에서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요? 저는 비겁하게 “종로서적에 친구랑 책 사러 나왔다가 억울하게 붙잡혔다”라고 거짓말을 했고, 경찰들이 그 말을 잘 믿어주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틀 후 제 발로 걸어 나왔습니다. 거짓말은 나쁜 것이지만, 거짓말이 항상 나쁜 것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자기에 대하여 거짓말을 할 권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 헌법 제12조 제2항은 ‘모든 국민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진실)을 강요당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한 자가 사실대로 고백하지 않고 그 죄를 뻔뻔하게 부인하는 권리를 헌법이 보장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같은 헌법 조항의 앞부분에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한 고문금지의 원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극 드라마를 보면 권력을 가진 간신들이 끌려온 충신들에게 “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하고는 인두로 사람의 살을 막 지지지요? 그러면 죄가 없는 사람들도 고통을 못 이겨서 역모를 저질렀다고 거짓 자백을 하고는, 처벌받아 죽습니다. 이런 식으로 스페인 종교재판소를 비롯해서 수천 년 간 모든 문명의 ‘자백주의’ 형사제도는 진실의 이름으로 수많은 고문과 폭력을 양산했습니다. 그래서 근대 민주주의는 ‘증거주의’ 형사제도를 채택하면서 자백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도록 하고, 사람에게 자기의 죄에 대해서 부인하고 거짓말을 할 권리를 보장한 것입니다. ‘거짓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 사법적 불의를 낳고, 거짓말을 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사법적 불의를 억제한다’는 대단한 역설입니다. 그러나 이 원칙에는 세상의 심판권자들, 사법권을 가지고 있는 세상의 권력자들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 고통과 피눈물의 역사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12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 루치오 3세가 이단으로 단죄한 카타리파를 처벌했고, 성 도미니코가 그의 책을 불태우고 있다. Pedro Berruguete 작. (출처: wikipedia)

 

죄와 벌, 타인을 심판하는 자들의 거짓말

법정에서 선서하고 거짓 증언을 한 사람들은 위증죄로 처벌받습니다. 세상에서 거짓말로 이웃(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사람들은 명예훼손죄나 모욕죄로 처벌을 받습니다. 이 사람들을 처벌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심판권을 가진 자, 경찰과 검찰과 법관과 정부의 권력자들입니다. 로마서 13장 1-2절에서 바울 사도는 세상의 심판 권세를 ‘하나님이 세상에 주신 칼’이라고 말하며 그 권력의 칼에 복종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은 기독교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을 넘어 ‘권력자의 바이블’로 칭송을 받습니다. 성경의 기름부음을 받은 지상의 심판권자들은 아주 뿌듯합니다. 하늘의 심판권을 위임받은 지상의 심판권자, 하나님의 심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의 심판은 눈에 보이고, 하나님은 어느 죄나 우리가 예배 때 눈만 감으면 쉽게 용서하시지만 세상의 권력자들은 결코 우리의 죄를 눈감고 용서해 주는 일이 없으니, 눈에 보이는 지상의 심판권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심판권자보다 더 힘이 센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상의 심판권을 가진 사람들이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는 유형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절대적인 권력의 힘에 취하여 그 권력을 휘둘러 죄 없는 자의 죄를 만들어내고 죄 있는 자의 죄를 사하여 주는 ‘심판권의 남용(濫用)’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세력의 국정농단에서 보았습니다. 지상의 인간이 ‘우주의 기운을 모아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처럼 착각한 사례입니다. 둘째는, 당파적이고 집단적인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과 집단의 정당한 자유와 권리를 공격하고 왜곡하고 제거하려는 ‘심판권의 오용(誤用)’입니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 진보와 보수, 다수자와 소수자의 건강한 공존을 부정하고 상대 세력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제거를 추구하는 정치적 극단주의와 그 극단주의에 편승하거나 주도하는 일부 기독교 세력의 생각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셋째는, 사법 권력으로 지상의 심판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당당한 사법권 행사를 하지 않고 정치적 권력, 경제적 권력, 언론 권력의 눈치를 보는 간신 노릇을 하면서 가해자를 숨겨주고 피해자를 농락하는 ‘심판권의 왜곡(歪曲)’입니다. 이것은 최근 장자연, 버닝썬, 김학의 사태에서 나타나는 ‘유권무죄(有權無罪), 무권유죄’의 양상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 마음대로 지상의 심판자가 되어 전당포 여주인을 살해했다가, 스스로 그 죄책감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지상에서 ‘심판을 받는’ 평민들은 죄를 지으면 벌 받는 것을 무서워하고 벌벌 떱니다. 그러나 지상에서 권력을 위임받아 ‘심판을 하는’ 권력자들은 죄를 지어도 벌 받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뻔뻔해 집니다. 자기 자신이 지상의 심판권자이니, 지상에서는 자기를 심판할 자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버닝썬 사태, 장자연 사태나 김학의 사태 등에서 권력이나 언론의 힘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경찰이나 검찰의 사법 권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비굴한 간신 노릇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상의 심판권자들의 거짓말에 대한, 지상에서 심판받는 자들의 분노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인간의 본성상 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헌법은 거짓말할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경찰과 검찰과 법원과 언론의 거짓말에 대해서도 이것을 원용하여 ‘우리도 본성상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으니, 좀 봐 달라’고 핑계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의 헌법과 법률은 사람이 ‘자기에 대하여’ 거짓말(거짓 증거)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성경의 십계명과 법 제도의 원칙은 사람이 ‘이웃에 대하여’ 거짓말(거짓 증거)하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일반인들도 세상에서 처리되지 않는 벌에 대해서는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절규를 하지요. 기독교인들은 사람에 의한 지상의 심판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하늘의 심판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어리광을 피우는 데에만 너무 익숙해서, 우리가 무슨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다 묻지 않고 그냥 무조건 용서만 해주시는 분이라는, 하나님은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의 법정은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는, 세상의 재판은 무섭지만 하나님의 재판에는 이미 면죄부를 받아놓았으니 전혀 두렵지 않다는 잘못된 확신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사실상 무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지상의 법정에서나 하나님의 법정에서나 유효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이나 형사사법제도의 취지 때문에 어느 정도 허용되지만,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거하는 것’, 무고한 이웃을 처벌받게 하거나 피해자의 억울함을 가중시키는 일은 하나님의 법으로나 세상의 법으로나 허용되지 않습니다. 지상의 권력자들은 세상의 법정에서 심판석에 앉아 심판대에 선 피고인과 피해자들의 선과 악, 죄와 벌을 판단하는 일에서 하나님 같은 힘을 행사합니다. 이 사람들은 쉽게, 남은 심판하면서 자신은 심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죄는 알면서 자기 자신의 죄는 돌아보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은 벌하면서 자기는 벌 받지 않으려는, 죄와 권력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세상의 법정’을 다스리는 지상의 심판권자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죄와 벌에 대해서 증언하는 ‘하나님 법정의 증인’들에 불과합니다. 세상의 권력자가 무고한 자를 벌 받게 하는 거짓심판도 하나님의 법정에서 이웃에 대한 거짓증언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요, 세상의 권력자가 피해자의 피눈물을 외면한 거짓심판도 하나님의 법정에서 이웃에 대한 거짓증언으로 그 책임을 추궁당하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탄핵 등 최근의 역사에서 위의 첫째 유형, 즉, 최고 권력을 가진 지상의 심판권자들이 행한 ‘심판권의 남용’에 대해서, 시민의 힘과 민주주의 법제도를 다 동원하여 심판을 내린 놀라운 경험이 있습니다. 지상의 법정에서는 정의가 이루어질 수 없고 하늘의 법정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절망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우리들 인생의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자로서는, ‘아, 하나님이 지상의 신원(伸寃)을 내세로 미루지 않고 현세에서 풀어주시는 때도 있구나’하는 위안을 주며 믿음을 더 강하게 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사법 권력의 최고봉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과 재판 또한 지상의 심판권자가 지상에서 심판받을 수도 있다는,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2017년 3월 10일,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대통령 박근혜 탄핵사건 선고문을 낭독하고 있다.(출처: MBN)

 

세상의 법과 권력은 모두 악이라는 비난은 지나치게 절망적이고 일방적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법과 권력을 무조건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적 죄를 눈감고 세상의 악을 조장하는 일입니다. 힘없는 사람의 죄보다 힘 있는 사람의 죄가 더 큰 이유는, 힘없는 사람은 자기를 해칠 뿐이지만, 힘이 큰 사람은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거하고 거짓 심판하여 이웃을 해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We all lie. 연약한 우리는 자기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웃에 대하여 거짓으로 증거하고 거짓으로 심판하지 않아야 할 거룩한 의무가 있습니다. 무고한 자를 해치는 거짓 증거와 억울한 피해자를 외면하는 거짓 심판들은 모두 하나님의 법정에 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됩니다. 지상에서 힘을 가진 사람들, 타인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권세가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만만한 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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