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의 정교유착 행위는 소위 연합단체로 부르는 일부 몰지각한 집단들의 행태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명색이 연합단체이지 사실 한기총과 같은 단체들은 몇몇 목사들의 이익집단에 불과하다. 민주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대표권 구조가 이러한 필연을 낳고 있다. 당회-노회-총회-연합회의 계층을 따라 올라가면서 점점 더 노쇠하고 정치적인 남자 목사들의 주도권이 강화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의 연합단체들은 한국 개신교 교인들 중에서 가장 노쇠하고 보수적이고 정치적인 남자 목사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다.(본문 중)

백종국(경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선을 넘은 한기총

얼마 전 자유한국당의 대표가 당선 인사차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를 방문하였다. 여러 가지 덕담이 오가는 중에 한기총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보도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이 건국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 여러 언론과 학자가 이러다 대한민국이 해체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위기 가운데 같은 신앙을 가진 황교안 대표를 보내주어 자유한국당 대표로 세워 주었다. 이승만, 박정희 다음으로 세 번째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기대가 정말 크다. … 첫 고비가 내년 4월 총선이다. 자유한국당이 200석을 하면 이 나라를 바로 세우고 제2의 건국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200석 못하면 이 국가가 해체될지도 모른다. 자유한국당이 내년 4월 총선에서 200석을 얻을 수 있도록 축복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불과 이틀 전에 자유한국당의 득표를 저해할 것이 분명한 기독자유당을 지원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

 

(출처: CBSCROSS Youtube 캡쳐)

 

인류의 역사는 제도종교와 정치권력의 결탁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직 정치권력이 발달하기 전에는 오랫동안 신정체제가 지속되었다. 점차 세속 권력이 증대됨에 따라 제정일치제의 모습으로, 그 다음에는 국교제의 모습으로 진화되어 왔다. 보댕의 말처럼 지리환경적 요소에 따라 그 형식이 달랐을 뿐, 본질적으로 소수의 지배연합이 다수 대중의 삶과 공동체를 통제하고 권위를 지속하는 수단으로 종교와 정치는 상호보완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종교의 사제들은 언제나 권력자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대중을 자신들의 권력 아래 둘 수 있는지를 음모하고 있다.

합리적 지배가 정당성을 보장하는 현대 정치에 있어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대 민주국가는 종교의 자유에 기초를 둔 정교분리제를 채택하고 있다. 어느 종교를 믿든 자유이지만 국가 권력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몇몇 독재국가에서는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현대적 제정일치제를 추구하고 있다. 무신론을 주장하지만 사실상 특정한 정당이나 지도자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유사신정체제라고 볼 수 있다.

한기총의 정치행태는 이러한 기준으로 볼 때 전근대적 국교제에 가까운 정교유착 행위라 할 수 있다. 특정한 정당의 특정한 지도자를 지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정당의 의석수가 가지는 의미까지도 논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교유착은 두 가지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첫째는 개신교 내부의 반발이다. 한기총에 가입되어있는 교단 내에서도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교인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의 의사에 반하여 이들을 대표하는 연합단체가 특정 정당 지지를 천명하는 것은 그들 모두를 기만하고 모욕하는 행위이다. 둘째는 공직선거법이 금지하는 사전선거운동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물론 공직선거법은 정당들의 의례적 활동과 종교단체들의 일반적인 정치 견해 표출을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특정한 정당에의 지지를 표명하고 구체적인 가이드라인까지 언급하는 것은 사전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의 정교유착 행위는 소위 연합단체로 부르는 일부 몰지각한 집단들의 행태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명색이 연합단체이지 사실 한기총과 같은 단체들은 몇몇 목사들의 이익집단에 불과하다. 민주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대표권 구조가 이러한 필연을 낳고 있다. 당회-노회-총회-연합회의 계층을 따라 올라가면서 점점 더 노쇠하고 정치적인 남자 목사들의 주도권이 강화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의 연합단체들은 한국 개신교 교인들 중에서 가장 노쇠하고 보수적이고 정치적인 남자 목사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다. 교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그리고 교회의 활력을 담당하는 청년들의 대표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 이러다 보니 한기총의 빗나간 행태에 대해 소속 교단이나 교회가 제동을 걸거나 질타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 연합단체들이 복음전파의 장애물로 나타나는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난 2월 25일, 한기총과 한교연이 통합 추진을 위해 회의를 진행했다.(출처: CBSCROSS Youtube 캡쳐)

 

교회와 정치 사이

정종훈은 신앙의 담지자인 교회와 정치의 담지자인 국가 사이의 역사적 관계 유형을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는 “교회가 국가에 적대적”인 경우로서 초창기 로마교회와 히틀러 치하의 고백교회, 남미의 기초공동체 교회를 들 수 있다. 둘째는 “국가가 교회에 적대적”인 경우로 프랑스 혁명기, 마르크스스주의 체제 하, 저항적 민족주의의 제3세계 국가를 들 수 있다. 셋째는 “교회와 국가가 호의적 동반자”인 경우이며 로마교회와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 이후의 독일교회가 그 예이다. 넷째는 “교회가 국가가 각각의 고유 영역 속에서 서로 무관”한 경우로서 초대 교회 시대의 로마와 현대 민주주의 체제이다. 다섯째는 “교회가 국가에 대해 자신의 긍정적 책임을 인식”하는 경우로서 WCC 이후의 에큐메니칼 진영이 대표적이다. 개신교파들은 대개 넷째와 다섯째를 선택하고 있다.

개신교파들 사이에서도 정치적 태도는 매우 다양하다. 신원하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적 태도를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는 온건 보수파이다. 이들은 기독교신앙의 사사화(私事化)를 비판하지만 정부의 영향력 증대에는 반대하고 전통적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는 자유파들로서 사회개혁의 불가피성과 세계적 정의구현 및 공공적 조정기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셋째는 급진파로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로 인해 사회개혁은 불가능하며 평화주의 이외의 삶은 비성경적이라는 입장이다. 넷째는 근본주의적 뉴라이트들로서 미국은 선택된 나라이고 반공을 위해 군비확장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한국 개신교의 정치적 태도도 미국과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제17대 총선 사례를 보면 세 가지 형태로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 첫째는 법적인 틀 안에서 선거과정의 공정성을 유지하려는 공명선거운동이었다. 미국의 온건보수파 및 자유파와 유사하다. 둘째는 현행법과 충돌하더라도 보다 적극적인 시민적 참여를 주장하는 낙선낙천운동이었다. 미국의 급진파와 유사하다. 셋째는 개신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출범한 기독교 명망가 정당 운동이었다. 내용적으로 미국의 근본주의적 뉴라이트와 유사하다. 이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기독교 명망가 정당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기독교정당과 보수정당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도리어 보수정당의 득표를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기윤실은 창립초기부터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교회의 불법 정치개입을 막는 ‘공명선거운동’을 진행하였다. 위 사진은 2004년 제17대 총선을 앞두고 진행한 ‘Wise Vote’캠페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기독교 명망가 정당의 출현 요인은 다음 세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는 정치 체제의 민주화와 1인2표제의 채택이다. 1인2표제는 소선거구제 하에서는 가망이 없었던 군소정당의 원내진출 꿈을 정당투표라는 방법을 통해 이룰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둘째는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권력 자원에 대한 목사들의 각성이다. 대형교회 목사들은 그들의 리더십에 무조건 복종하는 수십만의 신도들과 자의적으로 사용 가능한 수백억 원의 자금을 확보하고 있었다. 셋째는 진보 세력의 등장에 대한 공포이다. 이들은 극우적 세력이 조성한 반공 히스테리에 휩쓸리고 있었다. 그들이 나서서 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이들은 더욱 극우적인 사회 위해세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처음에는 개혁적인 정부가 개신교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교인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 매개의 변증법으로 인해 점차 강성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고 온건파가 떨어져 나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들은 이제 복음이라는 명분조차 벗어던지고 과거에 이단으로 치부되었던 세력들과 동맹하여 더욱 과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단순히 60대 이상의 보수적 정치목사들이라는 집단성을 뛰어넘어 새로 등장한 민주정부를 흔들고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세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극우 기독교와 태극기 부대가 공동 개최한 ‘문재인 대통령 퇴진 총궐기’집회. (출처: 뉴스앤조이)

 

질 나쁜 종교적 개그

이들이 사회의 위해세력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이들의 행태가 알고 보면 질 나쁜 종교적 개그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만일 17대 총선윤ㅅ이 그들의 주장처럼 한국의 공산화를 결정하는 분수령이었다면 한국 사회는 이미 공산화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공산화는 고사하고 국제적으로 민주주의 지수에서 한국은 미국과 일본을 능가하는 평가를 받는 민주국가가 되어 있다. 이들은 이단종교들이 하듯이 말세론을 동원하여 기독교 유권자들을 협박했다. 이단종교들보다 이들의 질이 더 나쁜 이유는 전자는 그런 수단을 통해 교주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그치지만, 이들은 범사회적 차원에서 계층적 이익을 구조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태가 질 나쁜 종교적 개그인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이 가짜뉴스로 선량한 개신교인들을 현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슬람포비아를 활용하기 위해 SNS에 퍼트리고 있는 가짜뉴스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일본소녀들의 특이한 유행을 이슬람권 기독소녀에 대한 잔인한 처벌이라 속인다든지, 쿠란 암송대회에서 울고 있는 소녀를 달래는 사진을 IS 성노예 사진이라고 속인다든지, 가자 지구 결혼식 들러리 사진을 쿠란에 따른 6세 소녀 신부들의 사진이라고 속인다든지 하는 속임수 등이다. 셀 수 없는 가짜뉴스를 마치 말세의 징표처럼 엉터리 해설을 첨부하여 SNS에 퍼 나르고 있다.

이들의 행태를 보면 마치 준비 운동 없이 수영장에 뛰어드는 어린이처럼 위태하기 짝이 없다. 예컨대 한기총은 1989년 2월 한국기독교연합회(이하 NCCK)의 “군사독재 비판”에 반대하고 “복음전파”에 전념할 것을 주장하면서 설립되었다. 이들은 NCCK의 인권탄압 반대와 한반도 평화 추구 운동조차도 정치적 행동이라고 비난하면서 “정교분리”를 부르짖었다. 그러더니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갑자기 정치투쟁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2003년과 2007년 사이 언론에 언급된 한기총 활동을 보면 1,095회인데 그중 73.5%가 정치사회 활동이었다. 특히 정치 분야 590건 중 대정부 비판이 69.8%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었다.

한기총이 이러한 오류를 범하면서도 얼마 전까지 한국 개신교의 대표기관을 자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 개신교의 신앙관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종국의 1994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인들의 정치의식은 “이원론에 입각한 표피적 신앙관”으로 요약된다. 이원론이란 우리의 삶을 성과 속으로 나누고 기독인은 성스러운 일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태도이다. 정통파 복음주의에서는 오류로 간주되는 신앙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신앙의 질이 고르지 못한 한국 개신교에서 오랫동안 강단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물론 성속의 기준은 목사 집단의 판단이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정부 비판이라도 NCCK가 하면 세속에 참여한 것이고 한기총이 하면 성스러운 일에 참여한 것이 되고 있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개그가 아닐 수 없다.

표피적 신앙관이란 동일한 내용일지라도 신앙적 표현을 활용하면 교인들의 지지를 받는 현상을 말한다. 한국 개신교인들의 신앙이 내용보다 형식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표피적 신앙관은 양날 달린 칼과 같다. 잘못된 정치의식을 소유한 몇몇 카리스마적 교회 지도자들이 신앙적 수사를 동원하여 다수 교회 대중을 오도할 위험이 있다. 반면에 강단을 장악하고 있는 다수 목회자들의 정치의식이 바르게 교정된다면 한국 개신교인의 정치의식이 신속히 교정될 여지도 있다.

백종국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인들의 모순과 표피성은 한국교회의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는 지도층 특히 장로계층에서 가장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나이와 직업을 떠나 존경할만한 자를 존경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맹목적이고 계급적인 권위주의는 자격 없는 지도자에게도 순응하는 경향을 낳고 있다. 한국 개신교가 새로운 정치의식을 갖추어서 한국의 민주화와 정의구현에 앞장서려면 한국교회의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는 장로계층을 위한 의식교육을 체계적으로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원론적 신앙에 입각한 “표피적 신앙관”은 필연적으로 한국 개신교의 게토화를 초래하고 있다. 표피적 신앙관이 교회 지도자의 윤리부재와 극우적 정치의식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목회세습, 성폭행, 금권선거, 공금횡령 등 일반사회에서도 비윤리적으로 간주하는 행위를 신앙적 수사로 합리화하면 당연히 일반 사회인들은 한국 개신교를 비상식적이고 특이한 집단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한기총과 같은 단체들이 주도하는 극우적 정치활동은 다수의 젊은이들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다. 표피적 신앙관에 의한 개신교의 게토화는 필연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복음의 문을 닫고 복음화율을 떨어뜨리는 악순환을 초래할 것이다.

 

201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실시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서 ‘한국교회의 신뢰도 제고를 위한 사회적 활동’으로 응답자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것은 ‘윤리와 도덕 실천운동(45.3%)’이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하나님 나라의 정치는 가능한가?

하나님 나라의 정치는 가능한가? 당연히 어느 정도 가능하다. 문제는 복음주의적 정치에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의 표피적 신앙관이다. 대표적으로 주일성수, 십일조, 동성애 등의 이슈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독교 공동체의 제도적 이익에 관련된 것을 신앙적인 말로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사립학교법, 목사들의 소득세, 인권조례 등을 민감하게 다루면서 종교탄압을 빙자하여 정부를 압박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복음에는 어떤 정치 강령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좌든지 우든지 복음에서 직접적으로 어떤 실천적 정치 강령을 끌어내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우리는 단지 복음에 근거하여 어떤 특정한 사회적 정치적 현상을 지지하거나 비판할 수 있을 뿐이다. 메시아적 비전은 정치적 강령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결코 특정한 주장이나 단체와 동일시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인의 정치적 부르심은 항상 ‘열려 있다’.

부르심이 ‘열려 있다’는 말은 실천의 폭이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민주주의라고 부르든, 기독교 사회주의라고 부르든, 민주당이든, 자유한국당이든, 어떤 정당이나 정치 단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추구할 만한 가치를 추구한다면, 즉,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고, 불의한 폭력에 저항하고,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고, 정당한 임금의 지급을 지지하고, 부정부패를 반대하고, 제반 재화의 공평한 분배를 실천할 뿐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를 추진하고, 정직한 사람이 더 잘 사는 체제를 만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부응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치는 하나님의 성품인 인애와 공평과 정직의 실천을 추구하는 다양한 방법 안에 있다.

모든 부르심은 또한 역사적이다.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 살아계시고 운동하시기 때문이다. 모세와 다윗과 예레미야와 바울에 대한 부르심이 각각 다른 역사적 형태를 가지고 있듯이 21세기의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부르심도 특별하다. 물론 남녀노소들에 대한 부르심도 각기 다를 수 있지만, 하나의 국가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한 역사적 구조는 대체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와 정치의 관계란 영원한 숙제이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해답”은 찾아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하나님의 정치는 가능한가? 가능하다. 군사독재시절 이후 한국의 정치는 사실상 기독교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2012년의 사례를 들면 대통령은 두말한 나위가 없고 전현직 장관 56명 중 32명(58%), 국회의원 296명 중 194명(66%)이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인구가 신구교를 합쳐도 전체 인구의 29.2%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독교인이 정치적으로 매우 활발함을 알 수 있다. 만일 이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정치를 원한다면 그리할 수 있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왜 부르셨는지를 바로 알고 있지 못했다는 데 있다.

 

한국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 짐이 될 것이냐 향도가 될 것이냐 하는 결단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현재 상황은 가능성이 반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인들은 한국 사회의 정의와 인애, 한반도의 평화를 열망하는 시민단체들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단체들의 조직과 예산 중 상당 부분은 한국 개신교가 담당하고 있다. 반면에 일부 무리들이 복음 보다는 극우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목사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고 가짜뉴스로 교인들을 오도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 개신교가 이제 이 오래되고 혼란스러운 정치참여의 문제를 보다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때가 왔다.

첫째,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기독시민의 정치교육“이 주어져야 한다. 깊은 신앙심을 가지기만하면, 혹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기만 하면 민주적 정치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도리어 신앙심이 깊을수록 이원적이고 표피적인 정치의식을 가지게 되어 있다. 지금부터서라도 한국 개신교는, 특히 한국의 목사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며 교회는 이 모든 것에서 완벽하다는 비성경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올바른 ‘기독시민’의 의식이 무엇인지를 관련 전문가를 통해 배우고 토론하고 익혀야 할 것이다.

둘째, 올바른 정치교육의 통로로서 “목회자의 순기능”은 여전히 중요하다. 개신교의 정치사회화 통로에 대한 조사 결과들을 보면 효율적인 사회화 통로는 목회자 설교-교회 활동-기독교 사회운동-기독교 정당 순이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 목회자 개인에 대하여 더 깊은 신뢰를 보이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정치의식을 최대한 빠르게 교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목회자들의 설교 내용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이러한 일을 돕기 위해 “기독교 사회운동의 활성화와 기독시민교육을 위한 전문기관의 설치”가 필요하다. 극소수의 신학교를 제외하면 현재의 신학교에서 기독시민의 정치 교육을 추진하기는 어렵다. 이미 조사에서 나타난 바처럼 낙후된 사고방식의 정치 목사들이 교단과 연합단체의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어서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의 당파적 이익에 종사하는 가룟 유다들이 온갖 감언이설로 교회와 신학교를 오염시키며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도리어 대다수의 평신도들이 온건한 기독교 사회운동들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러한 온건한 기독교 사회운동들을 통하여 목회자들의 정치의식을 재교육하고 이들의 설교를 통하여 일반 교인들이 하나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저기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있다. 그러나 학습과 희생이 없기 때문에 이미 와 있지만 아직 구현되지 못할 뿐이다. 아직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기회를 주셨을 때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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