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항쟁의 주요 원인이 국가폭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군부는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규정하려 했습니다. 5․18항쟁에 대한 평가와 기억을 둘러싸고 국가권력과 저항세력 간에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오월의 광주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저항의 몸부림에 참여한 것입니다.(본문 중)

강성호(『저항하는 그리스도인』 저자)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이는『미국 민중사』로 유명한 역사학자인 하워드 진이 쓴 자전적 역사 에세이의 제목입니다.[1] 역사는 달리는 기차와 같습니다. 아주 빠르게 달리는 기차에서 우리는 몸을 맡길 것인지, 아니면 고삐를 채워 다른 방향으로 돌리거나 멈추게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때 중립을 선언하는 것은 달리는 기차의 방향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중립이라는 말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비유입니다. 하워드 진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이 1960년대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에 참여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시대의 불의에 맞서 ‘행동하는 양심’이 어떻게 싸워 왔는지를 들려주는 생생한 증언입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는 부당한 권력과 공생관계를 이룬 ‘흑역사’로 점철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양심에 따라 행동한 이들의 ‘저항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1919년 3․1운동은 한국 기독교가 저항의 주체로서 두각을 나타낸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한국 기독교는 신앙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개인의 주권을 빼앗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러한 저항의 기록은 1980년 오월의 광주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5․18항쟁 과정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상계엄 선포 다음날인 1980년 5월 18일,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 시민들이 결집했다.(출처: 5.18 기념재단)

 

5․18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분수령을 이룬 사건입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고 커다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어 억압의 체제에 저항한 대중 봉기였습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계엄군의 과잉 진압에 맞서 일어났고, 5월 27일 진압이 완료될 때까지 시민 자치를 훌륭하게 이루어 낸 공동체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날 도청을 사수하다 숨진 광주 시민들의 희생에 부끄러움을 느낀 많은 이들이 민주화를 위한 혁명에 헌신하여 1980년대를 뒤흔드는 일들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1980년 5․18항쟁은 불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시대정신을 유산으로 남긴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980년 5․18항쟁과 관련하여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참여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항쟁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의 참여는 크게 ‘수습’과 ‘구호’로 이루어졌고, 항쟁 이후에는 ‘진실 알리기’의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여기서 ‘수습’이란 5․18항쟁의 주요 논쟁점이라 할 수 있는 시민군의 존재와 연관이 있습니다. 시민군은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했던 일에 분노하여 총을 든 시민들이었습니다. 극우주의자들의 프레임으로 볼 때, 시민군의 등장은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5․18항쟁의 시민군을 북한 특수군으로 간주하는 가짜뉴스가 등장한 배경인 셈입니다. 최근 계엄군의 특수부대원들이 광주에 잠입하여 시민들을 선동하여 시민군이 조직되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는데, 이는 다른 자료와의 교차검증을 통해 엄밀히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항쟁의 중심지였던 도청 바로 뒤에는 남동성당이 있습니다. 이곳은 1970년대부터 광주의 재야인사들이 모여 사회운동을 펼쳤던 곳입니다. 5․18항쟁이 일어나자 유신 정권 시절 광주의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이 남동성당에 모여 5․18항쟁을 어떻게 평화적으로 수습할 것인지를 고민하였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이들을 ‘남동성당파’라고 불렀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남동성당파의 상당수가 기독교 인사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남동성당. 이곳과 전남도청과의 거리는 불과 200여m로 아주 가깝다. 당시 시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한 수습대책을 이곳에서 논의했다. 5.18 항쟁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이 교도소에서 단식농성을 하다가 숨을 거두었을 때 그의 빈소가 차려지기도 했다. (출처: 천주교 광주대교구)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남동성당파는 계엄군과의 협상을 통해 사태가 원만히 해결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에 죽지 않도록 고군분투했습니다. 이는 5월 26일 새벽에 이루어진 ‘죽음의 행진’에서 크게 빛을 발휘했습니다. 죽음의 행진이란 계엄군이 광주로 진입한다는 소식을 들은 남동성당파가 계엄군의 시내 진입을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된다는 심정으로 탱크가 있는 곳으로 일제히 걸은 사건을 말합니다. 이 행진에 수백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합류했다고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남동성당파의 기독교 인사들이 호남 기독교의 특유한 현상인 ‘사회적 영성’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호남 기독교는 ‘화순의 성자’라 일컫는 이세종(1879-1944)의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자생적 수도원 공동체인 동광원을 설립한 이현필(1913-1964), 광주 사회운동의 중심이었던 오방 최흥종(1880-1966), 초창기 한센인 사역을 이끌었던 강순명(1898-1959),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으로 신앙을 가진 후 독립교회를 세운 백영흠 목사 등이 이세종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남동성당파에 참여한 기독교 인사들의 배경을 추적해 살펴보면, 이세종의 제자들과 만나는 지점들을 볼 수 있습니다.[2]

‘수습’이 주로 진보적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구호’는 보수 교단에 소속된 교역자들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항쟁 당시 ‘광주시기독비상구호위원회’라는 게 결성되어 구호에 초점을 맞춘 연합활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남동성당파의 활약이 어느 정도 알려진 반면, 광주 기독교회들의 구호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방도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는 구호 활동에 참여한 교회의 당회록, 제직회록, 주보 등의 기록과 구호 활동에 참여한 분들의 증언을 통해 좀 더 밝혀져야 할 부분입니다. 얼마 전에 ‘5․18항쟁과 기독교’라는 주제로 광주에서 팟캐스트 녹음을 한 적이 있는데, 구호 활동에 참여한 교회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관련자들의 이런 증언을 보존하는 데 관심과 예산을 쏟을 수 있다면, 우리의 역사적 유산이 더욱 풍부해질 것입니다.

항쟁이 끝나자 국가권력은 5․18을 폭동으로 인식하도록 몰아붙이려고 전력을 다했습니다. 5․18항쟁의 주요 원인이 국가폭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군부는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규정하려 했습니다. 5․18항쟁에 대한 평가와 기억을 둘러싸고 국가권력과 저항세력 간에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오월의 광주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저항의 몸부림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런 저항은 1980년 5월 30일 김의기라는 기독청년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광주에서 수많은 비극을 목격한 김의기는 광주의 진상을 알리고자 종로 5가에 위치한 기독교회관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3]」을 뿌리며 투신했습니다. 1980년 6월 9일에는 김종태라는 기독청년이 “이 의분을 진정할 힘이 없어 몸을 던집니다”라며 자신의 몸을 불태웠습니다. 교회가 이 청년들의 죽음의 의미를 온전히 평가하여 수용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무엇이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좌)김의기 열사, (중)김의기 열사의 영정사진을 들고 오열하는 모친, (우)김종태 열사.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또한, 5․18항쟁 2주년이 되었을 때,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추모예배의 형태로 부당한 권력에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와 5․18광주의거청년동지회 등이 설립될 때 공간을 내어주었습니다. 광주에서 희생당한 이들을 애도하며,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자들과 함께 울었던 것입니다.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역사는 몸부림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5․18항쟁의 그 현장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불의한 권력이 광주의 진실을 가리고 증언들을 묵살할 때도 분명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내년이면 5․18항쟁이 발생한 지 40주년이 됩니다. 역사적 사건을 몇 주년에 맞추어 성대하게 기념하는 일이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그런 기념일이 오월의 광주를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증언했는지 좀 더 자세히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나은 세계를 만들려면 새로운 미래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고, 이러한 상상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역사를 다시 살펴보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의 미래를 상상하는 데는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만큼 소중한 자원은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오월의 광주를 증언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울림을 줍니다.


[1] 하워드 진,『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유강은 옮김(이후, 2002; 원서 1994).

[2] 강성호,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복있는사람, 2019), 243-244쪽.

[3]「동포에게 드리는 글」전문: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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