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5일, 기윤실 바른가치운동본부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을 어떻게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긴급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패널로 참여한 세 분(정종욱 변호사, 홍순철 박사, 백소영 교수)의 글을 3회에 나누어 연재합니다.
백소영(강남대학교 기독교학과 초빙교수)
전화를 받고 망설였다. 촉박한 일정보다 더 부담스러웠던 것은 패널의 구성이었다. 공적 활동을 통해 평소 ‘태아의 생명권’에 대하여 확고한 입장을 밝히셨던 분들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예스’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임신 중단이라는 윤리 문제에 대해 여성의 경험과 의미가 빠진 채 ‘기독교적 입장은 하나뿐’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윤리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최를 하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 부탁을 했다. “4대 1은 너무해요. 페미니스트 활동가 한 분을 더 초청해주세요.” 편을 갈라 싸움을 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다만 그 자리에서 내가 발화할 ‘기독교적 입장’이 결코 나 한 사람만의 예외적 목소리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밸런스 장치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여 <믿는페미> 활동가인 ‘달밤’이 든든한 지원군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역사상 ‘하나의 기독교’란 존재한 적이 없었고 특정 윤리 문제나 사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대립해 온 것이 사실이다. 모두가 ‘성경적’ 권위를 근거로 서로 다른 주장을 했고 때론 화형도, 전쟁도 불사한 갈등과 반목이 신앙과 신학의 이름으로 자행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낙태(임신 중단)가 이렇게 첨예한 기독교 윤리적 논쟁의 주제가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신분이나 전통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던 전근대(pre-modern) 사회에서는 자신의 가문이나 공동체를 위협하는 ‘원치 않는 임신’을 ‘신앙과는 별도’로 처리했다. 주로 비공식적으로, 그리고 은밀하게 여자들‘끼리’ 해결하는 것을 눈감아 주는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근현대(modern) 사회에 와서 비로소 교회는 ‘낙태(임신중절)’을 윤리적 이슈로 공론화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역사적 성찰과 페미니스트적 시각을 접목하여 다각적으로 연구한 비벌리 해리슨(Beverly Harrison)에 의하면, 임신중절 이슈가 근현대 사회에서 대두한 까닭은 민족국가 형성 과정에서 특정 인종과 종교적 집단의 세력 확산이라는 정치적 이유와 맞물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는 윤리적 동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는 것이다. 결국 ‘나라’에서 출산권을 관리하게 된 셈인데, 여성들이 시민 주체로서의 자기 인식이 생겨나면서 필연적으로 공적 논쟁이 뒤따랐고, 유럽에서는 1960년대, 미국에서는 1970년대에 낙태죄 폐지로 이어지는 수순을 밟았다.
그런데 서구권, 특히 미국에서 기독교의 내부 연대는 오히려 형법상의 낙태죄 폐지 이후에 더욱 강화되었다. 실제로 미국에서 낙태죄가 폐지된 직후 얼마 동안은 임신 중단 사례들이 급증하기도 했기에(그러나 이후 제도적 안정 기반이 확보되면서 오히려 형법 폐지 이전보다 줄어들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여성들에 대한 기독교적 적개감과 정죄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차례가 온 것이다. 20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가 ‘낙태죄’라는 형사적 처벌 방식에 대하여 ‘헌법 불합치’라는 판정을 내리면서 우리나라의 교회와 종교 단체들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이런 토론회 모임도 만들어진 것이리라. 그런 판단을 하며 앞으로 전개될 갈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답과 다른 말을 할 나에게 쏟아질 비난을 예상하면서 무거운 마음으로 토론에 임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수정란이 되는 그 순간부터 생명이며,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약자 중의 약자’인 태아를 ‘모성 인권’이라는 말로 자행되는 낙태(라고 쓰고 ‘살인’이라고 읽는)로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선언을 들을 줄 알았는데, 거기 모인 어느 패널도 공적으로는 그런 말을 발화하지 않았다. 전(前) 낙태반대운동연합회 대표로 활동하신 김현철 회장은 교회가 미혼모를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환경에서 출산을 감행해야 하는 여성들에게 지지기반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과, 원치 않는 임신을 막기 위한 성교육에 방점을 찍는 말씀을 하였다.
산부인과 전문의이며 헌신된 신앙인인 홍순철 교수도 현재 진보적인 정당에서 주장하는 낙태 가능 임신주수에 의학적 문제를 제기하면서 8-10주여야 한다는 ‘주수’ 조정 방안으로 접근하였다. 물론 낙태가 소위 정상아와 비정상아를 가르는 세속적 기준을 따라 생존력이 떨어지는 태아를 임신중지 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면 안 된다는 우려를 표현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해야 할 것을 명시한 것으로 원론적으로는 나 역시 동의하는 지점이었다. 같은 전공자로서 평소 학회에서 자주 뵙는 기독교윤리학자 문시영 교수도 징벌적 수단이 사라진 이후의 논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말한바 ‘생명을 환대하는 교회’로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공론화하는 공공신학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젊은 여성이요 페미니스트 활동가로서 ‘달밤’은 이번 헌재의 판결이 그동안 여성을 재생산 도구쯤으로 여기면서 ‘임신 중단’이라는 윤리적 문제의 토론에서조차 당사자성을 배제당하게 만들었던 가부장적인 법과 논의를 종결시켰다는 점에 의의를 두었다. 임신주수와 상관없이 ‘임신 중단’은 임신 상태에 있는 당사자 여성의 주체적인 자기결정권의 문제임을 다시 한번 강조함으로써, 굳이 나누자면 태아보다는 임신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에 우선권을 두는 주장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이 ‘낙태죄 폐지는 곧 자유롭고 반복적인 임신 중단’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 무엇보다 적절하고 공적인 성교육을 통해 원치 않는 임신 자체를 예방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의 대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패널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우려했던 것보다, 우리가 ‘교회’로서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이 보인다는 점에서 긴장을 조금 늦추게 되었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신앙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패널조차 ‘혼전 순결’이라는 개신교 성윤리의 핵심적 도덕 가치를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나의 ‘제도(institution)’로서 결혼이 더 이상 인간 보편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까닭일 테다.
사회학적으로 말한다면, 인류 사회가 확대가족을 중심한 전근대 사회에서 개인 중심의 근대적 기획으로 전이하는 과도기적 단계에 존재한 것이 핵가족이다. 개신교의 발생과 전개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이 겹쳤던 근현대 사회에서는 핵가족이 마치 인류 보편의 항구적인 단위요 하나님의 창조질서인양 해석했지만, 사실 성경을 읽어봐도 다양한 공동체적 생활이 존재하되 핵가족이 보편 타탕한 인간 제도로 천명되어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성직자의 독신 서약이 가진 문화적 폐단과 싸우며 시작된 개신교 신학의 ‘가정’ 담론 안에서 성윤리를 지속해온 까닭에, 오늘날 비혼 인구가 늘고 개인 위주의 생활이 이어져 50대 청년부원이 등장하게 된 후기-근대에 와서도, 여전히 성 문제를 결혼 전과 후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성문제를 제도가 아닌 ‘관계’로 접근하며 기독교 윤리를 전개해왔던 나는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이 문제에 대한 토론에서 늘 첨예한 갈등을 경험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5년도 채 되지 않아서 이젠 ‘혼전 순결’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지고, 당일 토론의 장에서 관건이 된 것은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기 위한 ‘올바른 성교육’으로 논의가 수렴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무엇이 ‘올바른 성교육’인가 하는 각론으로 들어가면 패널 간 이견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성성(sexuality)이 우리를 지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임을 고백 한다면, 한 가지는 동의 가능하다고 본다. 성관계란 단순한 놀이나 도구적 쾌락 수단이 아니라, 나의 경계를 넘어 너와 연합하는 가장 친밀한 교제의 행위라는 점 말이다. 성관계란 자기초월과 연합이라는 신비한 경험을 나누는 ‘거룩한 행위’라는 말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성행위와 재생산이 결혼제도 안에서 인과의 문제로 이해되었지만, 더 이상 제도적으로 이 둘이 함께 묶여있지 않은 사회를 살면서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적’으로 성적 연합의 거룩성을 말해야 할까? 임신 중단의 문제는 사실 단일 이슈 하나로 접근하기보다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이 지점에 대한 공동 작업이 가능하겠다는 희망이 보였던 토론의 장이었다.
다만, 페미니스트 윤리학자로서 안타까웠던 것은 ‘헌법 불합치’ 판결문에도 명시된 임신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이 여전히 토론에 임하는 ‘남성들’의 언어와 사고에서 가려지거나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자신의 물리적, 정서적 건강을 위협하면서까지 임신 중단을 결정하는 여성 당사자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일까? 이런 삶의 정황에 대한 구체적 관심에 대한 논의 없이, 낳는 결정을 한 모성을 칭송하고 낳게 만들 수 있는 기술적 방법론을 논하는 느낌이 들어서 씁쓸했다. 물론 나 역시, 태아만이 아니라 그 ‘생명’을 품은 여성을 또 하나의 ‘생명’으로 응시하며 그 생명이 안전하고 소망스럽게 임신상태를 유지하고 아이를 낳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교회와 사회가 ‘사회적 자궁’이 되어주자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 말은, 혼란과 위협 속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임신 당사자를 조정하고 훈육하여 출산으로 이끄는 기술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임신 당사자의 자기결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문가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협력하여 다양한 정보와 선택지를 제공하자는 취지였다.
결국 임신 중단의 윤리 문제는 ‘생명권’ 대 ‘생명권’이 충돌하는 ‘모럴 딜레마’의 현장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이 문제는 선과 악 사이의 자명한 선택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동안 ‘프로라이프’ ‘프로초이스’라는 대립적 논의 속에서 임신 중단 문제가 마치 ‘생명을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의 문제인 양 접근해 왔는데, 이 질문 속에 가려진 것은 ‘임산부 여성도 생명’이라는 사실이었다. 태아보다 더 오래 산 생명이요 이미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영위해온 생명인데, 임신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권이 물리적, 사회적, 정신적으로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사실 ‘프로초이스’라는 말도 그렇다. 대부분 이를 ‘낙태 선택을 선호하는 권리’ 정도로 이해하는데 본뜻은 ‘프로크레이티브 초이스(procreative choice)’, 즉 출산 선택을 의미한다. 죽일 선택이 아니라 태중에 품고 기르며 낳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선택이라는 말이다.
만약 일부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우려처럼 낙태죄 폐지가 태아를 ‘제거해도 되는 세포 덩어리’ 정도로 치부하게 만들 것이 걱정이 된다면, 이는 생명과 관계에 대한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담론 형성으로 대처할 일이지 형벌의 강화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어떤 상황이든 태아를 낳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낳지 않는 선택을 하는 여성을 정죄하는 대신에 최선을 다해 우리 사회와 교회가 낳는 선택을 해도 산모의 생명권이 위협받지 않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일이다.
결국 낙태죄 폐지는 생명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기독교인인 우리의 믿음과 삶을 위협하는 결정이 아니라, 신앙의 이름으로 더욱 열심히 관계적 사랑을 논하고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며, 핵가족 내에서 책임지는 방식이 아닌 상황에서 아기를 낳아도 아기와 산모의 생명이 안정적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일을 시작하라는 신호탄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커다란 가족 공동체이다. 생명권과 생명권이 충돌하는 윤리 문제를 앞에 두고서 우리의 선택지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 정죄함이 아니라 살리는 선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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