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의 생애와 신학을 연구할 때, 쟁점이 되는 질문이 몇 가지 있다. “본회퍼는 평화주의자였는가?” “히틀러 암살공모에 참여했던 본회퍼를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가?” “본회퍼는 목사로서 어떻게 암살 서클에 가담할 수 있는가?” “본회퍼의 정치적인 행동은 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들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본문 중)

고재길(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와문화 교수)

 

본회퍼의 생애와 신학을 연구할 때, 쟁점이 되는 질문이 몇 가지 있다. “본회퍼는 평화주의자였는가?” “히틀러 암살공모에 참여했던 본회퍼를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가?” “본회퍼는 목사로서 어떻게 암살 서클에 가담할 수 있는가?” “본회퍼의 정치적인 행동은 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들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본회퍼는 미국에서 만난 프랑스 출신의 친구, 장 라세르를 통해 평화주의를 알게 되었다. 산상수훈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가 실천해야 하는 특별한 삶의 양식을 배웠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폭력이 아닌 비폭력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들은 뺨을 맞을 때 다른 뺨도 돌려대야 하며, 미움을 받더라도 복을 빌어주어야 한다. 심지어는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평화주의의 원칙은 1930년대 독일의 상황 속에서는 낯선 것이었다. 독일의 루터교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주의라는 말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었다. 그들은 “기독교가 최고 통치자(히틀러: 필자 주)에게 적절한 예를 표하도록 하는 것과 조국을 위해 무기를 들도록 요구를 받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기독교적인 의무”라고 생각했다.[1] 그들은 산상수훈의 교훈은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비극적으로 죄가 많고 무질서한 세계가 아니라, 이상적인 세계를 위한 하나의 이상”으로 여겼다.[2]

 

(좌)장 라세르, (우)본회퍼. 두 사람의 모국인 프랑스와 독일이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친구가 되었다. (출처: wikipedia)

 

물론 본회퍼가 이러한 독일 루터교회의 흐름을 전적으로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본회퍼는 이 세상 가운데 실재하는 살인적인 전쟁을 사실로 받아들였고, 전쟁의 상황 속에서 군복무를 다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시민적 의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본회퍼는 1930년대 초부터는 전쟁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평화적인 자세를 취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3] 즉, 본회퍼는 평화주의를 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체적인 명령으로 이해했다. 본회퍼는 세계 교회들의 연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 세상에서 평화의 질서를 구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전쟁의 기운이 점차 느껴지는 시점에서 전쟁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쟁, 그러니까 다음에 일어날 전쟁은 우리가 결코 하나님의 질서유지의 수단으로서 또한 하나님의 계명으로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살기 위해서 전쟁을 이상화하고 우상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서 배척당하게 될 것이다. … 역시 여기서도 우리는 평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조금도 꺼려서는 안 될 것이다.[4] (『작품집』 11권, 341)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더 이상 전쟁을 바라지 않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평화를 위한 이름으로 전개되는 전쟁도 반대했다.

오늘날 더는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 – 십자가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 … 교회에게 전쟁을 신성시하라고 하면, 교회는 복종하기를 거부한다. 그리스도 교회는 인간들끼리의 전쟁, 민족과 계급, 그리고 인종 간의 평화를 위한 전쟁에 반대한다. (『작품집』 11권, 356)

본회퍼는 정치 조약, 다른 국가에 대한 자본투자, 거대한 은행들, 수많은 자금 그리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재무장이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와 같은 것들은 “평화를 안전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결코 평화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평화는 단순한 “안전 대책”이 아니었다. 평화는 “어떤 안전 대책도 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고, “신앙과 순종 안에서 국가의 운명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었다.[5] 즉, 본회퍼는 덴마크 파뇌에서 개최된 세계교회연맹 회의(1934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추구할 수 있는 세상의 평화를 선포했다.

또한, 본회퍼는 인도에서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간디를 방문해서 그의 평화사상을 배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고백교회의 신학생과 목회자들을 교육하는 핑켄발데 신학교의 원장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간디를 만나지는 못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무기를 들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전쟁을 반대했다.[6] 이런 본회퍼의 모습은 우리를 아주 당황스럽게 한다. 평화주의를 강조한 본회퍼의 모습은 히틀러 암살공모에 가담한 본회퍼의 그것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본회퍼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David Myers 작. 디트리히 본회퍼와 마하트마 간디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그린 그림.

 

먼저, 우리는 본회퍼가 평화주의를 추구했지만 결코 평화주의자나 또는 문자적 평화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알 필요가 있다. 본회퍼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독일과 유럽의 평화 및 세계의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각 나라들이 무기 증강과 전쟁의 수단을 빌어서 평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할 때, 본회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평화의 궁극적인 원천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본회퍼는 전쟁이 일어난 이후, 나치 정권의 만행으로 세상을 떠난 유태인들(약 600만 명)의 주검 앞에서 평화주의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의 무고한 죽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절대 평화주의를 넘어섰다고는 해도, 본회퍼는 적극적인 폭력의 행위를 용인한 것은 아니었다. 본회퍼는 무력이나 폭력 사용을 “마지막 수단”(ultima ratio)으로만 허용했다. 따라서 그의 히틀러 암살 공모는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을 모두 시도한 이후에 선택된 최후의 선택이었다. 즉, 그것은 전쟁과 같은 “한계상황” 속에서 마지막 단계로서 선택했던 폭력에 대한 허용이었다.

본회퍼의 평화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매우 큰 인상을 남겼다. 전후 유럽과 세계는 냉전 체제 아래에서 핵무장을 통해 가능한 세계의 평화를 강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계 각국의 기독교 대표들과 독일교회는 “그리스도의 평화”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해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집회와 시위를 보면 우려가 앞선다. 기독교 단체들이 모여 있지만 거기에서는 화해와 평화보다는 대립과 갈등의 소리가 더 많이 들려온다. 심지어 어떤 극단적인 사람들은 한반도의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전쟁을 언급하기도 한다. 오늘의 전쟁이 모두를 죽음으로 내모는 공멸의 핵전쟁임을 고려할 때, 이것은 실로 무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본회퍼의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은 우리를 평화의 일꾼으로 부르신다. 지금은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할 때이다.

다음 글에서는 절대 선의 실현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상대적인 악한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상대적인 선을 실현하고자 했던 본회퍼의 윤리사상에 대해 알아본다.


[1] Keith Clements, “평화를 위한 에큐메니컬 증언”, 존 W. 드 그루시 편/유석성.김성복 옳김, 『본회퍼 신학개론』 (서울: 종문화사, 2017), 294.

[2] 위의 책, 294.

[3] 자비네 드람/김홍진 옮김, 『본회퍼를 만나다』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3), 242.

[4] 위의 책, 247.

[5] 위의 책, 251-252.

[6] Keith Clements, “평화를 위한 에큐메니컬 증언”,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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