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정의와 구제를 강조하던 교회들(주로 진보 교단에 속한)의 경우에는 자존감의 문제를 순전히 자본주의와 개인적 이기심의 산물로 보고 아예 도외시하는 경향을 보여주는데, 켈러의 관점은 이런 경향에 대해서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자존감이라는 주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음을 고려할 때, 켈러의 접근은 복음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상상으로 한국 사회 전반이 보여주는 사회적 상상을 어떻게 변혁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면에서도 전략적으로 탁월해 보입니다.(본문 중)

팀 켈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⑤: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와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자존감의 문제는 공적인 신앙의 문제이다

 

김상일(보스턴 대학교, 실천신학 박사과정)

 

팀 켈러의 영향력은 좁게는 개혁주의, 넓게는 복음주의를 넘어서 보다 광범위한 기독교 세계로 향하고 있습니다.[1] 그는 우선, 복음을 현대인들이 가장 고민하는 주제 중 하나인 정체성의 언어로 풀어내어 복음이 현대인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하는지 밝힘으로써 복음의 상황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습니다. 또한 죄에 대한 중요한 성경적 이해 중 하나인 우상 개념을 활용하여, 죄를 ‘무언가에 대한 지나친 애착과 집착’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함으로써, 죄가 가리키는 삶의 현실을 현대인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앞의 글들에서 밝힌 대로, 이런 접근은 켈러의 복음 제시를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왜 복음이 대안적인 ‘사회적 상상’일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번 글에서는 켈러의 자존감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그의 공적 신앙에 대한 이해와 직결되어 있는지를, 특별히 그의 두 저술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와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를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켈러에게 있어서 자존감의 문제는 곧 공적 신앙의 문제입니다. 켈러가 직접적으로 그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켈러에게 신앙이란 항상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다른 이들을 지향하도록 이끄는데, 자존감의 문제 또한 결국 이런 지향점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지향성은 켈러가 이해하는 공적 신앙의 정의에 필수적입니다. 자존감과 공적 신앙을 밀접하게 관련짓는 켈러의 시각은, 과거 한국교회가 자존감 회복의 목표를 단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로만 국한하였고, 그 결과 자존감 회복이 어떻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가장 위대한 명령(마 22:37-39)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한 건전한 대안이 됩니다. 한편, 사회 정의와 구제를 강조하던 교회들(주로 진보 교단에 속한)의 경우에는 자존감의 문제를 순전히 자본주의와 개인적 이기심의 산물로 보고 아예 도외시하는 경향을 보여주는데, 켈러의 관점은 이런 경향에 대해서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자존감이라는 주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음을 고려할 때, 켈러의 접근은 복음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상상으로 한국 사회 전반이 보여주는 사회적 상상을 어떻게 변혁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면에서도 전략적으로 탁월해 보입니다.

최근에 자존감이라는 주제는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주제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정신과 의사인 윤홍균 교수의 『자존감 수업』을 비롯한 자존감에 관한 여러 책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통해 드러납니다.[2] 윤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자존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자존감의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self-esteem)다. 곧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지 또는 낮게 평가하는지에 대한 레벨을 의미한다. (자존감 수업, 16)

자존감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그 의미는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자존감 문제를 다룬 켈러의 저서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도 자존감에 대한 유사한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부분은 켈러가 자존감 문제에 대해 제시하는 해결책입니다. 윤홍균 교수의 책을 비롯하여 자존감을 다룬 대부분의 서적들은 ‘자존감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고 하는 반면, 켈러의 경우는 복음은 자존감을 높이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며, 다른 이들의 평가에 대한 관심 자체를 (그것이 높은 평가이든, 낮은 평가이든 간에) 완전히 잊어버리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실마리는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 3:21-4:7,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10쪽에 인용됨)

특별히, 강조 표시된 부분에서 바울은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합니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 판단 받는 것 또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에게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켈러는 이런 사도 바울의 자존감이 높다고 볼 수도 없고, 낮다고 볼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존감에 대한 관심 자체를 아예 놓아 버렸습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잊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자존감 관련 서적이 말하는 것, 즉, ‘자존감이 높아야 좋다’는 말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바울이 말한 대로 이미 심판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그리스도께 쏟아 부어졌고, 그 결과 바울은 하나님의 전적인 수용과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행위에 앞서 평결이 내려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받으셨기 때문에 나만의 이력을 쌓기 위한 일들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37, 54, 57)

켈러는 하나님께서 바울의, 그리고 복음을 믿는 모든 이의 자존감의 원천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어떻게 평가받는지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켈러는 바울의 예를 통해서 복음을 믿는 길은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어떤 평가를 받는지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는 길이며, 더 나아가 그 길이야 말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릴 수 있게 해주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평가가 이미 끝났다는 것이 복음의 선언이기 때문에, 이 선언을 정말로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은 비로소 자신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는 일들에 관심을 쏟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선언을 믿는 것은 하룻밤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러는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지향점이라고 말합니다.

 

(좌)팀 켈러의 저서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우)좌측 도서의 원어판 『The Freedom Of Self-Forgetfulness』.

 

이렇게 보면, 켈러가 왜 자존감을 공적 신앙의 문제로 이해하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공적 신앙은 자신이 어떻게 비춰지는지에 대한 관심을 넘어 하나님과 다른 이들을 향하게 될 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켈러의 공적 신앙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겠습니다.

공적 신앙이란,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말할 때, 진정으로 마음에 담고 있는 것들을 공적으로 밝히는 일, 그것도 겸손과 다른 이들을 향한 존중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팀 켈러 블로그, 2013년 9월 27일)

켈러에게 공적 신앙이란, 복음 메시지를 공적인 영역(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 문화, 그리고 도시)과 연결하고 소통시키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복음이 어떤 메시지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일 뿐 아니라, 그러한 공적인 영역에서(타인과 맺는 관계에서, 문화적인 부분에서, 도시의 삶에서) 진솔하게 복음을 믿는 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용기를 가지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특히 믿지 않는 이들)이 나를(그리고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과민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내가 복음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었을 때 겪을 수도 있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손해를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나 자신에 대한 복음의 평가에 굳건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음을 거짓 없이, 하지만 겸손하게 공적인 영역에서 드러낼 수 있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을 넘어 이웃과 지역 공동체를 향해 나타내는 일에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켈러와 리디머 교회는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outward face: 나와 우리 교회를 넘어서 이웃의 필요를 바라보는 일 – 필자 주)을 자신들의 핵심 가치와 비전으로 꼽고 있습니다. 실제로 켈러는 작년(2018년)에 열린 공적 신앙 컨퍼런스(Public Faith Conference)에서 리디머 교회의 공적 신앙에 대한 강조는 사역 초기부터 빼놓을 수 없었던 핵심 가치였다고 역설합니다.

요점은, 나의 시선이 더 이상 나의 정체성 문제 해결과 나의 자아상을 개선에 머물지 않아도 된다는 복음의 메시지가, 하나님이나 사람들과 연결되고 소통할 길, 즉 공적 신앙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준다는 것입니다. 내 문제, 내 상처가 가장 커 보이고 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 복음을 통한 자존감의 회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여전히 상처 입은 자존감을 회복해야 할 필요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상처가 자신들의 문제에만 몰두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이웃을 도외시하고 나만을 생각하는 자기중심성임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자기중심성, 그리고 그에 따른 욕심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가장 큰 적임을 직시할 때(약 1:15), 자존감의 회복이 곧 공적 신앙의 문제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켈러의 관점에서는 이런 자기중심성이 문화적으로 확장된 것이 바로 현대 문화의 지배적인 사회적 상상이며, 이런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탈피가 바로 켈러가 강조하는 “자기를 잊는 자유”입니다.[3] 자기중심성을 지배적인 사회적 상상으로 추구하는 현대의 문화의 지향성 속에서 살다가, 또 그런 지향성이 현대 문화가 우리에게 덧씌운 것임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살다가,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과 타인을 바라보는 지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신의 문제에만 매몰되어 살 때는 느끼지 못했던 자유를 줍니다. 내 문제가 복음으로 해결되는 것을 경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나 자신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지고(free from the self), 그러한 자유는 이웃과 지역 사회를 위한 자유(free for others)가 되는 것입니다.

켈러는 이런 복음의 선포를 가장 실제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 공동체라고 봅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선포해 줄 수 있고, 복음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필자는, 켈러가 가정 또한 이런 공동체에 포함시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결혼이야말로 나와는 다른 타인을 온전하게 사랑하는 법을 연습할 수 있는 장입니다. 또한, 공적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 발현되는 곳이 바로 결혼 관계인데, 우리의 뿌리 깊은 자기중심성을 뛰어넘어 하나님과 이웃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장이기 때문입니다. 켈러는 『결혼을 말하다』에서 “자기중심적인 마음가짐에 맞서라”라는 소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늘날 서구 문화에서는 남녀가 서로에게 매력을 느껴 결혼을 결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처음에는 상대가 아주 멋지게 보이지만 한두 해(한두 달인 경우가 더 많다)가 지나면 일반적으로 세 가지 증상이 나타난다. 가장 먼저는, 근사하던 파트너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차츰 깨닫게 된다. 다음에는 그 훌륭한 인간도 비슷한 경험을 해왔으며 이편을 가리켜 이기적이란 말을 입에 담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배우자의 이기심이 자신의 것보다 더 문제가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험한 세월을 거치면서 무수한 상처를 입었다고 느끼는 경우일수록 이런 증세가 더 또렷해진다.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기 일쑤다. “그래,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당신이 내 속을 어찌 알겠어!” 마음의 상처는 이기심을 가려 자신의 모습을 잘 보지 못하게 한다. 상당히 많은 부부들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지점에 이르게 된다. (『결혼을 말하다』, 81-82)

켈러의 강조점은 현대인들의 결혼에 대한 환상을 폭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용된 부분의 소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혼이 공적 신앙을 연습할 수 있는 장이 된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어서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부 생활에 적용해야 할 기독교적인 원리는 성령님의 역사에 기대어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덜, 또는 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족한 존재로 여긴다는 의미다. 그리스도 안에서 필요가 모두 채워질 것이고 또 지금도 충족된 상태이므로 배우자를 구세주로 볼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복음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이들은 방향을 돌이켜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가짐이 문제의 핵심임을 받아들이고 해결할 길을 찾는다. 그런 자세를 갖는 순간, 곧바로 악몽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맛보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동안 얼마나 속 좁게 살았는지, 큰 그림에 비춰 보면 얼마나 시시한 일에 애면글면해 왔는지 퍼뜩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 생각하기를 멈추자 행복이 자라나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결혼을 말하다󰡕, 84-85)

그러므로 켈러에게는 자존감도, 결혼도, 결코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두 가지 관계(자존감을 통해서 드러나는 나 자신과의 관계, 결혼을 통해서 드러나는 배우자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며, 더 나아가 이런 변화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이끄는데, 그것이 바로 켈러가 말하는 공적 신앙으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칭의 교리에 대한 켈러의 관점이 어떻게 사회 정의로 자연스럽게 이끌게 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특히, 그가 펼치고 있는 교회 개척 운동 네트워크인 Redeemer City to City가 연대하는 교회들이 교단과 신학을 넘어서서 활동하고 있으며, 세계의 모든 도시들을 커버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2]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6/11/773179/

[3]『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의 원서 제목은 The Freedom of Self-forgetfulness, 즉, “자기를 잊는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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