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각종 복지혜택을 사회적 약자에게 제공할 수 있다. 예컨대, 기독교복지기금 같은 재단을 만들어서 산발적이고 비체계적으로 진행되는 기독교계의 복지노력을 통합, 조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산출하는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는 너무 크고 체계적이어서 민간 차원의 노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본문 중)
고세훈(고려대 명예교수, 정치학)
“장애는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관계”라던 스웨덴 학자의 말에 뭉클했던 기억이 있다. 가령 공동체에 청각장애자가 있다면 구성원 모두가 수화를 배우면 된다. 관계 속에서 불편함은 불구(handicapped)가 아닌 장애(disabled)일 뿐이니 관계는 당사자의 장애를 덜어주는 놀라운 마력을 지닌다. 개인의 결핍을 관계의 문제로 인식해 구성원들이 기꺼이 물질적, 심리적 자원을 나누고 공유하는 일, 이런 정신이 공동체 전체로 확대될 때 복지국가가 시작된다.
오늘날 복지국가로 불리는 나라들은, 예외 없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서도 선진국이다. 복지를 사회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거니와 복지국가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그리고 전체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친화적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주된 매커니즘인 경쟁은 불가피하게 소수를 제외한 다수의 탈락자를 산출하며,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시장에서 밀려난 사람들, 즉 장애자, 노약자, 어린이, 실업자, 비정규직 등 애초에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없거나 그에 대한 적절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시장실패로 불리는 이런 상황이 방치되면, 사회적 불안이 커갈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인구 전반의 구매력이 감소해 불황 곧 ‘물건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는’ 상황이 증폭되고, 마침내 공황과 자본주의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피해는 모두에게 돌아간다.
복지국가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체제/체계적으로 양산한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 ‘보이는 정치’를 통해 완화/교정해 보려는 시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복지국가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돈이 말하는’ 시장의 불평등을 ‘1인 1표’의 (형식적으로) 평등한 정치의 논리가 제어한다는 취지이다. 복지국가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선진국에서 발전해온 사정이 여기에 있다. 실제로 서유럽 복지국가들의 역사를 보면, 귀족이 독점하던 정치가 민주적으로, 즉 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에게 순차적으로 개방되면서 마침내 사회민주 계열의 정당들이 단독 혹은 연정을 통해 집권하여 복지제도의 도입/확대를 선도하고, 기독교정신에서 출발한 보수정당들이 이를 발전적으로 계승함으로써 작금의 복지체제가 가능해졌다.
오늘날 한국은 복지의 필요성, 즉 사회경제적 차원의 절대적, 상대적 박탈/결핍 정도는 갈수록 심화되지만, 각종 통계가 보여주는 국가의 복지실태는 말할 수 없이 참담하다. 가령 빈곤층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보여주는 빈곤갭(2014년)은 OECD 34개 국가들 중 한국이 세 번째로 높으며, 지금 추세라면, 2020년 무렵엔 상위 1%의 소득이 전체 소득의 15%를 웃돌면서 OECD 최고의 불평등 국가가 되리라는 추정도 있다. 그런데도 2014년 한국의 국민소득에서 복지 관련 지출의 규모(9.3%)는 OECD 평균(21.8%)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며, 복지국가로 분류되지 않는 미국의 절반을 가까스로 넘고, OECD 비가입국인 중국에 오히려 가깝다. 국가의 복지 의지에 관한 한, 한국은 OECD에 가입한 1996년 이래 몇 해를 제외하면 멕시코, 터키, 칠레와 함께 내내 최하위를 고수하고 있다. 복지공여의 집행과 전달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공공부문의 인적 규모를 들여다보면 상황은 더 확연해진다. 부실한 통계자료나마 꿰맞춰 살펴보면, 2004년도를 기준으로 인구 1천 명당 공무원 수로 나타난 공공부문 규모를 보면, 한국의 28명은 OECD 평균인 75.2명의 1/3에도 미치지 못하는 역시 OECD 최하위로서, 이는 비OECD국가들 평균인 67.3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복지의 필요성과 국가의 복지의지 간의 현격한 괴리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는 복지를 반대하는 담론들이 넘친다. 교회 안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가령 우리는 빈곤과 불평등을 심각히 체감하면서도 성장이 복지의 전제라는 주장에 오랜 세월 길들여져 왔다. 그러나 서유럽국가들이 복지국가를 발진시킨 것은 종전의 폐허 위에서였고, 그들의 소득수준이 오늘날 한국에 비해 한참 뒤지던 80년대에는 국가복지 수준이 이미 완숙 단계에 들어섰다. 아마 미국이 복지국가의 반열에 들지 못한 이유를 성장의 부족 탓으로 돌릴 만큼 대담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복지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복지공여를 통한 재분배는 구매력 즉 소비수요 진작, 인적 자원의 질 향상, 신뢰 등 사회자본의 증대를 가져와 투자, 생산성, 효율 따라서 성장에 기여한다. 낮은 축적단계에서도 일찍이 분배에 눈떴던 서유럽 국가들은 오늘날 가장 선진적인 국가복지체계를 만들어냈으면서도 가장 고도의 성장을 일궈냈다. 성장과 복지는 경험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배타적 개념이 아닌 것이다.
요컨대 국민소득 수준을 따지면, 한국은 오래전에 이미 복지국가의 반열에 들었어야 옳지만, 아직 복지국가의 문턱에도 들어서지 못했다. 우리는 복지‘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에 복지‘사회’를 구축하는 데도 실패했다. 가령 복지국가로 분류되지 않는 미국은 취약한 국가복지를 민간의 기부 전통이 상당히 보전한다. 민간 자선 총규모는 매년 증가해서 2006년에는 GDP의 1.67%에 달할 정도였다. 한국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 그것도 비정례적으로 기부가 이루어져서 통계조차 부실한 형편이지만, 대략 0.05%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는 미국의 1/33, 영국(0.73%)의 1/15, 싱가포르(0.29%)의 1/6에 해당한다. 한국의 국가와 사회가 핑퐁하듯 복지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와중에 사회경제적 약자의 고통이 심화될 것은 자명하다.
한국은 국민총생산이 일정 수준(2만5천불)을 넘어서면 불평등이야말로 제 사회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 된다는 최근의 한 가설을 가장 극명히 확인시키는 사례다. 실제로 한국이란 공동체가 급속히 해체되고 있다는 증거는 넘친다. OECD에서 한국의 자살률은 10년 연속 부동의 1위를 고수할 뿐 아니라, 모든 연령층에서 급증하는 추세여서 같은 기간 대부분의 OECD국가들에서 큰 변동이 없는 것과 뚜렷이 대비된다. 한국은 이혼율, 저출산율, 비정규직비율, 산업재해율, 심지어는 교통사고 사망률까지 OECD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 사회의 성숙 정도를 가르는 기준이 가장 취약한 계층이 어떻게 취급되는지(혹은 대우받는지)에서 일차적으로 드러난다면, 분명 우리는 복지국가도 복지사회도 아닌 야만사회에 살고 있다.
교회가 삶의 모든 영역에 침투해 있던 중세시대에는 교회가 복지를 위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중세는 신분에 따른 위계사회였지만, 상하층 계급 간의 엄정한 상호적 책무의식이 굳건했으니, 하층계급은 노역을, 상층계급–교회는 서유럽 전 토지의 1/3에서 1/2을 소유한 대지주였다–은 하층계급에 대해 최소한의 복지를 제공하는 책임을 졌다. ‘소유하다’(to own)와 ‘빚지다’(to owe)라는 단어의 중세적 어원이 같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거기에서 가진 자의 부는 개인의 노력보다는 사회적으로 형성됐고 따라서 소유한 자는 동시에 빚진 자라는 기독교적 관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이 여기서 비롯됐음은 물론이거니와, 근대 복지국가 발전에서 기독교 계통의 보수정당이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해 온 사정이 이와 무관치 않다.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의 일방적 수탈에 익숙해 온 한국인에겐 이런 전통이 없다. 더욱이 서유럽과는 반대로 기독교 신앙은 융성하는 듯 보이되 기이하게도 기독교 윤리는 나날이 쇠락해 가는 한국적 실정에서 복지한국을 위해 크리스천과 교회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존 스토트 목사는 고통받는 자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두 가지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분노와 연민’이 그것인데, 분노는 탐욕과 이기심에 갇혀 상처를 주고받는 인간 배후의 죄를 향해서요, 연민은 죄에 의해 육체와 정신이 무력하게 휘둘리는 인간을 향한 것이었다. 예컨대 예루살렘을 부르며 통곡하고(눅 19:41),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셨던(요 11:35) 예수의 눈물에서 우린 이 둘을 동시에 본다. 팀 켈러 목사는 예수는 예루살렘 거리를 사실상 울면서 다녔으리라고 말한다. 인간을 죄의 가증한 영향으로부터 가능한 한 벗어나게 하는 일, 즉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들춰서 제어하고 고통어린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이웃사랑의 명백한 방식이다. 하나님의 정의란 바로 이런 작업에 맞물려 있거니와 그것은 인간사회의 전 영역에서 실천되고 확장돼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정치’와 무관한 순수한 ‘사회’문제나 ‘경제’문제는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는 법과 제도를 통해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고 구조적으로 우리 이웃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정치가 사회 내 강자의 이익만을 대변한다면, 정치의 매력은 사라진다. 정치가 사회경제적 약자를 편들어 줄 수 있다는 희망이야말로 복지국가를 낳은 원동력이었다. 정치가 거기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는 한, 정치는 선용(善用)되어야 하며, 크리스천들은 주위의 걸인과 고아, 과부 등에게 안타까움을 갖는 것 이상으로 법과 제도의 문제를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교회는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각종 복지혜택을 사회적 약자에게 제공할 수 있다. 예컨대, 기독교복지기금 같은 재단을 만들어서 산발적이고 비체계적으로 진행되는 기독교계의 복지노력을 통합, 조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산출하는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는 너무 크고 체계적이어서 민간 차원의 노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복지의 필요성과 그에 대한 요구가 광범위할수록 누진세 등을 통해 방대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야말로 복지 책무를 떠안을 일차적인 주체인 것이다. 교회의 구호활동과는 별도로 크리스천들은 국민복지의 일차적 책임은 국가가 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앞에서 지적한 한국 국가복지의 현실을 마주하면서도, 문재인 정부의 복지정책을 트집 잡는 것은 크리스천의 경우는 더욱, 정당화될 수 없다. “모두가 골고루 잘사는 포용국가”를 내세운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지만, 아동수당, 기초연금, 무상보육 등에서 현금복지가 다소 늘어났을 뿐, 양극화는 오히려 증가됐고, 복지국가의 상대적 위상은 여전히 불변인 채로 있으며, 현 정치상황을 고려하면 전망마저 어둡다. 복지제도의 망은 여전히 부실하고, 추진세력은 불명확하며, 늘어나는 복지지출을 뒷받침할 재정 방안 또한 오리무중의 상태다. 이런 점에서 최저임금 상승을 위한 세심한 제도적 배려가 미비했던 것 못지않게, 그로 인해 소득주도성장의 핵심개념이 돼야 할 복지정책이 가려지거나 뒷전으로 물러난 것은 참으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복지 확대나 선거제도 개혁은 아홉을 내주더라도 기어코 관철해야 할 개혁과제다. 그런데도 현 집권세력은 그것들을 위해 나머지 모두를 내줄 수 있다는 진정성 있는 결단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구태의연한 인사행태가 반복되고, 남북관계의 동력은 떨어지는데 도덕성과 애국을 독점하려 들며, 과격한 언사로 국민정서를 불필요하게 자극해 진영논리를 부추기는 일은, 민주정치의 본령을 흐릴 뿐 아니라 핵심적 개혁과제의 정당성마저 실종시킨다. 한국 보수가 지리멸렬의 빈사상태라면, 한국정치가 걸어야 할 험로는 집권당의 책임 아래 펼쳐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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