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트루스가 나오는 이유는 결국은 절대 진리에 대한 신념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인 신앙이 강하게 영향을 줄 때는 상대주의자들이 있다고는 해도 절대적으로 변할 수 없는 진리는 있다는 확신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거든요. 절대 진리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면서 사실상 포스트모더니즘도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포스트트루스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기준이나 근거를 객관적 사실이나 증거에 두지 않고 자기가 속한 편과 선호에 두는 방식에 너무 익숙해 졌다는 것이겠지요.(본문 중)

강영안(미국 칼빈신학교 교수)

 

이 글은 2019년 7월 11일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웹진 <좋은나무> 1주년 기념 강연회 강연과 질의응답 내용을 박신호, 태동열, 정병오 님이 녹취한 것을 토대로 정리한 글로서 세 번에 나누어 연재되었습니다. 이 글은 마지막 부분인 질의응답 내용입니다.

(첫 번째 글 보기)

(두 번째 글 보기)

 

 

질의응답

질문 1. 요즘 이정훈 교수(울산대학교 법학과)가 한국 교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철학자로서 그의 주장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시는지요? 기독 지식인이 침묵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답: 이정훈 교수가 누군지는 이름을 들어서 압니다만 그의 주장이 무엇인지,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그렇게 깊이 살펴보지는 않았습니다. 관련된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 사회에, 특히 한국 기독교에 필요한 것은 미국 상황과 마찬가지로 저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하나의 세계관 또는 하나의 사상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사실상 여러 사상, 여러 세계관, 여러 삶의 방식이 통용되는 사회라는 사실의 인식입니다. 20세기 이전에 서양 사람들은 서양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았고, 그 외의 다른 지역은 그 지역의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지금은 여러 삶의 방식들이 다양하게 시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 가운데 물론 지배적인 것, 대중이 따르는 세계관과 삶의 방식이 있지만 어느 하나가 전체를 이끌어 가는 방식은 아닙니다. 종교의 경우에도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등 여러 종교가 통용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원적인 상황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인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기독교가 이러한 다원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지를 숙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15-16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가슴 속에서 거룩하게 하고, 소망을 둔 이유, 근거를 묻는 사람들에게는 대답할 준비를 하되, 항상 온유와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당시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권고하고 있습니다. 저는 베드로전서의 이 교훈이 특별히 한국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그 확신에 거하되, 지금처럼 다원화되고 있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두고 있는 소망의 근거를 묻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능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온유와 존경의 마음으로 할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질문 2. 다문화 사회는 다원주의로 갈 수밖에 없지 않나요? 절대 합의할 수 없는 영역도 평화를 위해서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또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트루스가 날카롭게 구분되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강연내용을 들으면서 서로 겹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답: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트루스는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트루스가 나오는 이유는 결국은 절대 진리에 대한 신념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인 신앙이 강하게 영향을 줄 때는 상대주의자들이 있다고는 해도 절대적으로 변할 수 없는 진리는 있다는 확신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거든요. 절대 진리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면서 사실상 포스트모더니즘도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포스트트루스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기준이나 근거를 객관적 사실이나 증거에 두지 않고 자기가 속한 편과 선호에 두는 방식에 너무 익숙해졌다는 것이겠지요. 포스트모더니즘은 물론 포스트트루스보다는 개념의 내포와 외연이 훨씬 넓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방금 다원성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의미의 해체 문제가 있습니다. 짐작컨대 지금처럼 말이 팽창된 시대도 없지만 동시에 지금처럼 말의 의미를 잃은 시대도 없습니다. 어떤 주장이 있을 때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무엇보다 사실에 부합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물론 논리적 정합성도 있어야지요.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현상은 어떤 말이나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사실을 통하여 확인하려는 의지와 열망이 약화되거나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최근의 현상만은 아닙니다. 고대 희랍의 소피스트와 플라톤의 투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말의 힘’을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말은 ‘힘의 말’이 되고 맙니다. 소피스트들은 말을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인위적인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말의 의미는 사물의 본성과 연관된다고 보았습니다. 삼각형을 ‘삼각형’이라고 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약속했기 때문이 아니라 삼각형이라는 사물의 본성과 연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지식이 사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반면, 소피스트들은 그것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했지요. 똑같은 현실을 오늘날 우리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에 관심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는, 말의 가치가 많이 떨어지고 의미가 해체된다고 해도 말은 계속 해야지요. 복음을 전하고 무엇이 참인지 알고자 애쓰고 말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두 번째로, 말 못지않게, 말에 부응하는, 말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내어야 합니다. 만일 삶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이 하는 말은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진실 가운데 말하고 진실한 삶을 사는 겁니다. 아까 제가 언급한 에베소서 4장의 구절은 사랑 가운데 진실을 말하는 것과 진실을 행하는 것, 이 둘을 모두 포함합니다. ‘명실상부’라는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이름과 실재가 하나 되는 삶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질문 3. 교수님께서 강의해 주신 것처럼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기가 너무 쉬운 사회인 것 같습니다. 저희 친척들 모임에서는 큰아버지께서 가짜뉴스에 휩쓸려 현 정부를 좌파 정권이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라는 권유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답: 저도 사실 겪는 일입니다. 진실을 말해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엔 아가페’,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행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 안에서’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드는 생각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들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적을 대하듯이, 무시하듯이 하면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되지 않겠지요. 그리고 말을 하더라도 상대방을 비판하거나 배제하기 위한 의도로 하지 않고 상대방을 세워 주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역시 두 가지가 중요하겠지요.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행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들어주고 그분을 세워드리는 방식으로 대화를 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화를 하자면 그 가운데 사실은 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정보와 무논리로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아까 잠시 언급한 베드로전서 3:15에 보면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대답할 준비를 늘 하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때 ‘이유’가 다름 아니라 ‘로고스’입니다. 이유, 근거, 심지어는 이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이지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정당한 로고스, 올바른 논리적 사고입니다. 교회에서는 이성적 사고를 별로 강조하지 않는데요, 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점에서는 이성을 좀 강조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성이 뭡니까? 이성(理性)은 ‘추리(推理)하는 능력’ 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렇게 추리하여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이성입니다. 저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때보다 기초적인 논리적 사고, 기초적인 사고 능력을 좀 키워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야 성경도 제대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이 논리 없이, 말도 되지 않게 쓰이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기본적인 사고 훈련과 더불어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태도는 ‘듣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우선 들어주고 그 다음에 내 생각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시원한 답은 아니죠?

 

질문 4.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기독교 진리를 옹호하는 방식으로 “가치중립적인 것은 없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진리를 수호하는 방법이겠지만 동시에 같은 논리로 성경의 진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트루스 시대에도 이러한 논리가 여전히 유효한가요? 참을 여러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고 하셨는데, 포스트트루스 시대에 성경이 참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답: 저는 성경에서 말하는 참은,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참된 포도나무라 할 때의 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포도나무가 식물학적으로 순수한 종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농부가 열심히 포도나무를 가꾸고 애를 쓰면 때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는 그런 포도나무를 참된 포도나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참’은 신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것, 믿을 수 있는 것이 참입니다. 열매 맺는 나무의 경우에는 열매가 부실하지 않고 제대로 단단하게 열리고 제대로 익어야지요. 우리말의 ‘참’이라는 말도 ‘빈’ 것과 구별되는 참이거든요. 빈 열매, 쭉정이가 아니라 꽉 찼다는 의미, ‘실(實)하다’는 의미의 ‘참’입니다. 참, 진실, 진리를 일컫는 히브리어의 ‘에메트’는 ‘아멘’, ‘아만’, ‘에무나’와 이어져 있는 말인데요, 원래는 ‘단단하다’, ‘견고하다’, 그래서 ‘믿을 만하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나무의 참됨이 무엇에서 증명됩니까? 성경의 관심은 그것이 순종이냐 잡종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열매를 맺는가에 있습니다. 좋은 나무여야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열매는 열매를 맺은 나무가 좋은 나무임을 증명합니다. 그런 나무가 참된 나무이지요. 참된 삶, 참된 말이라고 할 때 그러므로 열매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무척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참이다”, “성경이 참이다”라는 말도, 그 속에 무슨 대단한 원리나 영원한 법칙이 담겨 있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이기보다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따라 살게 되면 생명을 얻게 되고, 참된 삶의 길을 따라 걸게 될 뿐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의미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의 문화는 명제적 진리를 싫어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명제적 진리를 말해야지요. 그럼에도 잊어서 안 될 것은, 진리는 그것이 가르치는 것과 결과가 부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과 사물이 들어맞아야 하고, 말과 삶에는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더구나 말이 힘을 잃은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자기중심성보다는 이웃을 생각하고 타자를 돌보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물질 중심의 삶보다는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의 중요성을 따라 사는 삶이 되어야 하겠지요. 개인의 삶도 중요하지만, 공동체를 세우고 공동체와 함께 하는 개인의 삶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좌절과 절망에 빠진 삶이 아니라 희망을 보여주는 공동체가 오늘도 가능함을 교회가 보여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질문 5. 공평과 정의의 가치로 판단했다고 해도 그렇게 선택하며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머리로 안다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재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공평과 정의를 따르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답: 토마스 아퀴나스는 “행동은 존재를 따른다”(Agere sequitur esse)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지요. 방금 제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나오는 말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마 7:17)는 말씀과 사실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1주년 기념행사를 하는 기윤실의 웹진 이름이 <좋은나무>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자는 의도로 이렇게 붙인 거지요.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나무여야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철학의 언어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다 보면 어느새 좋은 나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의지가 없는 나무에게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겠지만, 사람의 경우는 그렇게 애써 볼 수가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 말 “아게레 세쿠이투르 에세”는 “행위가 존재를 따른다”고 번역되지만 “존재가 행위를 따른다”라고 번역하더라도 문법상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느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어떤 존재가 되느냐, 어떤 인간이냐 하는 것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존재의 변화가 삶의 변화에 선행한다는 생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 여기 참석하신 분 가운데 크리스천이 아닌 분들도 계실 테지만 제가 기독교적으로 이야기하도록 허용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에베소서 5:8-9을 보면 존재 변화를 먼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너희가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어두움에서 빛으로의 존재 변화, 다시 말해 그리스도 밖의 존재에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의’ 존재로 존재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어두움에 속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빛의 자녀로 살아라’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빛의 열매는 선함과 의와 진실함”이라고 말합니다. 존재 변화로부터 빛의 열매를 맺는 행위가 뒤따라 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윤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존재가 바뀌고 존재가 바뀜으로 삶의 열매가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 안에 속한 존재로 나의 존재 변화가 일어났는가’, 일어났다면 ‘나의 삶 속에 이 열매가 맺히는가’ 를 물어봄으로써 내가 공평과 의의 열매를 맺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나에게 빛의 자녀의 존재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선함과 의와 진실함’ 그리고 ‘공평과 정의’의 열매가 맺힐 수 없는 것이지요. 열매를 보고 나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겠지요.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질문 6. 뉴스의 원천을 찾아 <워싱턴포스트>를 찾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가짜뉴스를 직접 언론을 찾아 참과 거짓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오히려 언론보다 시민제보의 SNS가 더 정확할 때가 있지 않을까요? 의심해 볼 필요에 대해 동의합니다. 오늘날 거짓뉴스의 확산이 오히려 기존 사실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고 음모론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은 과거에 은폐되어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많이 노출된 상황입니다. 과거에는 힘을 행사했던 관공서나 국정원의 은폐 사실이 이제는 많이 노출되면서 정부의 신뢰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이 점에서는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론도 불신 대상이 되었습니다. 직접 관련된 시민의 제보가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SNS를 통해 가짜뉴스가 많이 생산되지만 시민들이 자신의 주변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SNS를 통해서 진실을 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훨씬 더 커졌습니다.

제가 강의할 때 ‘회의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회의적 태도란 뉴스나 소문을 곧장 수용하기보다는 일단 판단 유보를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회의적’이란 말이 영어로는 스컵티컬(skeptical)인데요, 이 말은 희랍어 스켑시스(skepsis)에서 왔습니다. 이 말의 동사 스켑토마이(skeptomai)는 ‘회의한다’, ‘의심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실은 ‘찾는다’, ‘모색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단정해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옳은지 그른지를 찾아보고 더듬어 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이 태도가 필요합니다.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보다 일단 잠정적으로 유보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중요한 문제라면 좀 더 찾아보고 알아보고 따져 보아야지요. 이러한 태도를 고대 회의론자들은 ‘에포케’(epoche), 곧 ‘판단중지’라고 불렀습니다. 이쪽이나 저쪽에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물론 이 속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판단을 내려야지요. 길을 걸어갈 때는 더욱 그렇지요. 데카르트는 “길 위에서는 회의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켑시스의 태도, 에포케의 태도는 좌든 우든 어느 쪽에 기울어 독단에 빠질 때 좋은 해독제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정치 상황이나 사회 상황 속에서 이런 해독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7. 베드로전서 3장을 인용하면서 언제나, 누구에게나 답변할 준비를 하라고 하셨는데, 실질적으로 우리의 생활에서 어떤 준비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태도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답: 우선 공부해야죠. 물론 책을 들고 읽으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편안하지 않은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양극화가 심하고, 점점 더 다원화되어 가고 있고 사실상 많은 것들이 해체되는 상황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전통도 해체되고, 권위도 해체되고, 기독교든 불교든 전통 종교도 해체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참된 것에 대한 갈증, 진정한 것에 대한 갈증이 우리 사회와 문화 속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오늘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단어 중 하나가 ‘진정성’일 텐데요, 영어로는 ‘오텐티시티’(authenticity)라고 하지요. 독일어로는 ‘아이겐틀리히카이트’(Eigentlichkeit)라고 합니다. 철학자 하이데거(1889-1976)가 1927년에 쓴 󰡔존재와 시간󰡕에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 일과 연관시켜 보았습니다. 대중의 평균적인 사고와 삶의 방식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삶의 방식을 일컫는 것이지요. 최근에는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1931-)가 ‘진정성’을 중요한 개념으로 다시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이데거적 의미든지 테일러적인 의미든지 간에 진정성에 대한 요구는 분명 이제 하나의 시대적 요구로 주어져 있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저는 이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한다면 아까 이야기한 베드로전서 3:15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생각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심장, 우리의 가슴(kardia),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의 중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을 때 우리는 자유인이 됩니다. 자유인으로 우리는 섬기는 이로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 가운데 섬김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 가장 가까운 삶, 자유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진정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두 번째로,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답할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 삶이 가슴으로 한다면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답할 준비를 하는 삶은 머리로 하는 것이지요. 그러자면 다른 종교, 다른 사상과 생각도 알아야 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는지, 우리의 믿음의 내용에 관해서도 깊고 넓게 공부해야 합니다.

세 번째 삶의 태도는 온유와 두려움, 온유와 존경의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건 손발로, 몸으로 하는 것이지요. 타인을 대할 때 나의 눈빛이 어떠하고, 나의 낯빛이 어떠한지, 내미는 나의 손이 어떠한지도 우리의 삶에 중요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대할 때도 우리는 온유와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무엇이 참인지 알면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가운데 섬기는 자세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을 온유와 존경하는 마음으로 넉넉하게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진리 가운데서 자유를 얻지 못한 거지요. 여러분이나 저나 이렇게 사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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